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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얼마 전 미국의 휴스턴 시장이 동성애를 비판하는 목회자들을 감시하기 위한 법안을 만들었습니다.
레즈비언 시장인 그는 동성애를 옹호하는 시장이었고 동성애를 반대하는 목회자들을 억압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는 목사들에게 설교문을 제출토록 하는 법안을 만들었는데 설교 내용에 동성애 비판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함이었죠.
그러자 미국사회에서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그때 미국의 성도들은 항의 차원에서 성경을 시장에게 보냈고 목회자들은 설교문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멀다하고 수많은 성경과 설교문이 들어오자 결국은 그 법안을 철회했다고 하죠.
어디 그뿐입니까?
지금 미국에서 논란되는 것 중의 하나가 마리화나가 아닙니까?
현재 콜로라도주와 워싱턴주 그리고 오레곤주에서는 마리화나를 합법화하고 있습니다.
마리화나를 합법화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을 타락으로 이끄는 길목을 허용하겠다는 뜻이죠.
(깨달음)어떻습니까?
동성애를 합법화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하나님나라의 가치에 위반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율법을 통해 남자가 남자로 여자가 여자로 더불어 관계를 갖는 걸 혐오하셨고 죽이도록 명령하셨죠.
하나님께서는 이성 간에 사랑을 나누는 게 거룩한 사랑의 모습이요 그를 통해 자손을 이어나가도록 하셨기 때문이죠.
마리화나를 합법화하는 것 역시 마약에 취해 사람의 이성이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인간 본성을 파괴하는 짓이죠.
그를 통해 성을 착취하고 물욕에 빠져들게 하고 결국 사람 목숨까지도 하찮케 하는 것이니 그 역시 창조질서에 어긋난 거죠.
구약의 율법에 독수리나 올빼미를 먹지 말도록 한 것도 약탈하는 본성을 지닌 동물들에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죠.
박쥐나 올빼미를 먹지 말도록 한 것도 낮에 일하고 밤에 쉬는 게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그걸 보고 역행할 수 있기 때문이죠.동성애와 마리화나를 합법화하는 것도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하나님나라의 질서에 반하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것이죠.
(적용)그처럼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세계 속에서 움직이는 것 같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 살고 있죠.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를 통해 말하듯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세력이 이 세상에 불순종의 아들들 속에 역사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을 주도하는 사탄을 ‘세상 임금’(요12:31, 요14:30, 요16:11)이라고 표현하셨죠.
이 세상에는 각 나라가 있고 통치자가 있지만 영적으로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사탄의 권세가 세상 사람들 마음을 주도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어둠 속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탄의 소굴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내신 것이죠.
죄와 사망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도 사탄의 소굴에서 빛의 자녀로 건져내주신 것이고요.
주님 오실때까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로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이 땅에 구현하도록 부르신 것이죠.
물론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는데 어찌 환란과 고난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를 향해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아무리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세력이 이 세상을 판친다 할지라도 승리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특출나거나 영적 권세가 강해서가 아니라 승리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이기게 하신다는 거죠.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선포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A.D.90년경 에베소에 머물 때 그 지역 성도들에게 쓴 편지라고 했죠.
처음 예수님께서 요한을 제자요 부르실 때 갈릴리 호수의 어부였던 그에게 자격이나 능력이 있는 건 아니었죠.
주님의 선택하심과 부르심의 은혜, 좌절과 낙심 속에 있던 그를 사랑해주시고 격려해주신 은혜로, 주님의 제자요 사도가 된 거죠.
그런 사랑과 격려에 힘입은 사도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봉양하다가 A.D.60-70년에 에베소로 건너갔죠.
로마에 맞선 유대인들의 항전과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쳐들어와 예루살렘 성읍과 성전을 초토화시킬 그 어간에 말이죠.
그때도 사도 요한은 에베소에 집을 짓고 예수님의 어머니를 봉양했고 틈나는 대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섬겼죠.
그러다 A.D.90년 경에 요한복음과 요한일이삼서를 남겼고 밧모섬에 유배를 다녀온 뒤에 요한계시록을 남기고 자연사했죠.
그렇다면 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쓴 것입니까?
하나는 그 당시 로마의 황제숭배사상이 도시 곳곳에 만연했기 때문이죠.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절하지 않으면 시장에 나가 물건을 사고팔 수 없을 정도로 황제를 떠받들던 때였죠.
사도 요한은 로마 황제가 왕이 아니라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가 만 왕의 왕이라고 알리고자 이 편지를 쓴 것이죠.
또 다른 차원이 있다면 그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에베소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죠.
영은 거룩하고 육은 더럽다는 이단적인 논리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유혹해 왔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영혼은 천국가지만 육체는 썩기 때문에 방탕하게 살아도 괜찮다고 한 것이죠.
하지만 사도 요한은 우리의 구원은 영혼만 구원받는 게 아니라 영혼육의 전인적인 구원을 받는다고 알리고자 한 거죠.
그렇지 않았던들 “자녀들아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요일3:18)고 하지 않았겠죠.
그만큼 하나님께 속한 자녀들은 율법의 목표요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육체로 지키길 원한 것이죠.
(깨달음)그 계명이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계명 아닙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 ‘내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안식일 곧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하는 법도가 그렇죠.
애굽에서 43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켜 자유를 누리게 하셨다면 그 사랑에 덧입은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의 법도를 좇아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복, 곧 우리의 행복을 위함이라고 신명기 10장 13절에 말씀하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그것이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도라면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덕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남의 물건에 탐내지 말라’죠.
남의 것을 일부러 훔쳤다면 5배나 더 배상하고 남을 다치게 했다면 꼭 그만큼을 배상을 요구한 것도 사람을 사랑하는 배려 차원이죠.
하나님께서 그런 율례와 법도를 계명으로 주시면서 지키라고 하신 것은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지키도록 한 것이죠.
책임감이나 의무감에서 지키라고 한다면 누가 그런 율례와 법도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능히 지킬 수 있는 것이죠.
70년대 시골 부엌데기가 서울대 출신의 아들과 결혼하게 되어 그 수준과 가풍에 맞는 법도를 지키는 것도 바로 그런 이치였죠.
죄와 사망으로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도 주님을 만난 주님의 영적 신부가 되었으니 우리도 하나님나라의 율례와 법도를 좇아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요.
(본문)오늘 본문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에게 부어주시는 은혜에 대해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원해)여기에 ‘이기다’는 헬라어 ‘니카오’(νικάω)는 ‘극복하다’(overcome) ‘정복하다’(conquer) ‘승리하다’(victory)의 뜻입니다.
그 원형 동사 ‘니케’(νίκη)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을 뜻하는 이름이기도 하죠.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니케 조각상은 배 위에 올라탄 날개 편 니케의 여신이 파도를 가르고 있는 모습으로 서 있죠.
니케의 여신상은 기원전 190년 로도스섬과 사모트라케섬 사람들이 해전 전투에서 로도스섬 사람들이 승전 기념물로 만든 거죠.
미국의 신발제조 업체 나이키도 니케라는 이름에서 따 온 것인데 본래는 다른 이름이었다가 나이키라는 이름으로 변경한 거죠.
그러니 해상 전투에서 뱃머리에 조각상을 만들 때 얼마나 많은 배들이 ‘니케의 여신상’을 새겨 넣었을지 짐작할 수 있겠죠.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 때 맨 앞머리에 용의 머리를 한 거북선을 만든 것처럼 말이죠.
고대 해상 전투에서는 대부분 그렇게 뱃머리에 니케의 여신상을 만들어 새겨넣었을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죠.
그 부분을 생각할 때 수요일 밤 말씀을 나눈 ‘디오스구로’가 떠오릅니다.
‘디오스구로’란 바울과 함께 한 276명의 사람들이 멜리데 섬에서 3개월을 지난 후에 로마로 향할 때 타고 간 알렉산드리아 배의 머리 장식이죠.
‘디오스구로’는 로마의 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 신의 쌍둥이 아들의 이름이고, 그 형상을 따서 만든 게 뱃머리 장식입니다.
니케의 여신상과 같은 모습, 거북선을 한 용의 모습과 같은 격이라 할 수 있죠.
(깨달음)그런데 바울은 알렉산드리아 선박의 뱃머리 형상 ‘디오스구로’를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그것을 신의 형상으로 여겼습니까? 아니며 신이 그 안에 깃들어 있다고 믿었습니까?
1970년대 말 외국인 선교사 한 분이 양화진의 교인집에 들러 바둑판에 새겨진 용 그림을 보고 당장 버리라고 책망했죠.
이유인 즉 용 그림은 귀신의 그림이고 용이 새겨진 그 바둑판에 귀신이 산다는 이유였죠.
하지만 그 선교사님이 바울의 이야기를 읽어봐다면 한 번만 깊이 생각했다면 고가의 예술품인 바둑판을 버리라고 하지 않았겠죠.
바울은 그만큼 제우스 신의 쌍둥이 형상을 한 디오스구로를 신의 형상이나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것이 신의 형상이나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 목을 치도록 하거나 아예 그 배를 타지 않았겠죠.
바울은 그만큼 디오스구로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조각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긴 채 그 배에 몸을 맡기고 로마로 향했죠.
(적용)얼마 전에 형님과 함께 해남 도솔암과 미황사를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1평 남짓한 도솔암은 그야말로 기도처에 불과했고 주지 스님은 반대편 집에서 잘 살고 있었죠.
그곳에서 나와 형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그곳을 찾는 이들이 자연계에 드러난 하나님의 신성을 보고서 하나님을 믿도록 기도를 드렸죠.
금속이나 나무로 새긴 신의 형상을 한 조각상은 그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조각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주단지나 부적 역시 인간의 조각상에 불과하고 종이짝에 불과할 뿐 거기에 신이 깃들어 있을 리가 만무한 것이죠.
그러니 니케의 여신상이 이 세상을 이기게 하시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죄와 사망의 문을 여시고 부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법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을 이긴다’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 잘 나가고 성공하고 유명한 사람이 되어 세상의 인정을 받는 걸 말하는 게 아니죠.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영적 공중권세 잡은 자들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동성애를 주장하고 마리화나를 부추기는 법안이 통과되도 우리가 꿋꿋하게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좇아 살아가는 것 말이죠.
신주단지나 부적이나 오늘의 운세가 판을 쳐도 그것은 인간이 만든 형상이나 종이짝에 불과할 뿐 변함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승리자로 모시고 사는 삶을 말하는 거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세력들의 조종 속에서도 승리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거죠.
(주음성)그래서 주님께서 오늘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세력이 주도하고 있는 걸 알고 있느냐?”
“이 세상의 정치경제군사문화 모든 면에서 사탄은 그 하수인인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니 말이다.”
“애굽의 어둠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빛의 자녀로 건져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지 않았더냐?”
“너도 전에는 어둠에 속한 자요 사탄에 속한 자였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지 않더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요 이 세상의 시험과 환란속에서도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를 힘입어 살아가는 자녀이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니케의 여신상을 뱃머리 장식으로 해도,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들 신인 디오스구로를 뱃머리 장식으로 해도 그게 신의 형상이거나 신이 깃든 게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만든 조형물에 지나지 않더냐?”
“신주단지나 부적을 쓴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형상이요 아무런 힘을 못 쓰는 종이짝에 불과한 것 아니더냐?”
“오늘의 운세로 세상을 이기는 힘을 얻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의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을 이기는 힘을 얻고 사는 것 아니더냐?”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녀들은 이 세상의 창조질서에 역행하는 동성애나 마리화나법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나라의 질서를 좇아 사는 자들 아니겠느냐?”
“그를 위해 고난과 역경을 당한다 할지라도 승리자이신 주님을 통해 이 세상을 이길 힘을 얻고 사는 것 아니더냐?”
“우리 주님은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선포하셨으니 그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오늘도 승리의 삶을 살게 하지 않겠느냐?”
“세상을 이기는 것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유명세를 날리는 게 아니라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세력들 앞에 굴복하지 않고 승리하는 삶임을 기억했으면 좋겠구나.”
(찬양)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 함이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사랑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축복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 함이라
(전개)‘세상을 이기느니라’ 할 때 ‘이기다’는 ‘니카오’라는 헬라어 단어가 신약성경에 29회 쓰였습니다.
그 원형인 ‘니케’는 신약성경에 1회 사용되었는데, 니카오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쓰인 곳은 요한계시록인데 17회나 쓰였죠.
왜일까요?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이 세상의 공중권세가 잡은 사탄이 판을 치고 사탄의 하수인인 적그리스도가 주도하기 때문이죠.
그 속에서 승리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마지막까지 이기는 삶이 쉽지는 않기 때문이죠.
내 의지나 자랑이나 공로나 내 믿음만으로는 이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세력들의 유혹과 핍박을 이길 수 없는 것이죠.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사탄의 세력을 마지막에 무저갱에 처넣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최후까지 이길 수 있는 것이죠.
바로 그런 자들을 향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친히 이렇게 약속해주시죠.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1-7)
(깨달음)주님의 재림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데 거기에는 눈물도 사망도 애통도 슬픔도 아픔도 없는 곳이라고 말씀하죠.
그곳에 입성하는 자들은 에덴동산의 가로막고 있던 영생수를 값없이 마시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 영생수를 마신다는 것입니까?
‘이기는 자’죠.
이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세력이 불순종하는 자들 가운데 역사해서 우리를 유혹하고 고난을 가져온다 할지라도 최후승리하는 자녀들에게 말이죠.
우리가 어떻게 세상 끝날까지 믿음의 삶으로 이길 수 있는 것입니까?
내 힘이나 의지나 노력이나 내 믿음의 공로론 불가능하지만 이 세상의 승리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가능한 줄 믿습니다.
해바라기가 꽃을 피웠는데 해바라기는 해가 떠 있는 곳을 향해 바라보듯이 우리도 그런 모습으로 주님을 바라볼 때 최후 승리를 누리게 하실 줄 믿습니다.
내 삶의 환경에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세력이 어떤 유혹을 해 와도 어떤 핍박과 고난을 가져와도 꿋꿋하게 믿음의 자리를 지켜나가는 자들에게 말이죠.
(예화)영국의 워커 박물관(Walker Art Center)에 가면 ‘에드워드 존 포인터’(Edward John Poynter)가 그린 ‘충성’(Faithful unto Death)이라는 그림이 있다고 하죠.
옛날 로마 시대에 폼페이시가 베수비우스(Vesuvios) 화산이 폭발해서 용암이 쏟아져 나오고 폼페이시를 덮쳤습니다.
그로 인해 폼페이시는 완전히 땅에 묻혀 버리고 말았죠.
그 후 현대의 고고학자들이 폼페이시를 발굴을 하는데 참으로 감명을 주는 걸 발견한 것입니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가 화산이 폭발해서 용암이 흘러 내려오는데도 성문을 떠나지 않고 부동자세로 지키다가 화석이 된 겁니다.
그것을 ‘콘트러’라는 화가가 그림으로 그렸고 그 제목이 ‘충성’이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심정으로 그곳을 지키다 화석이 되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죠.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다 그런 모습으로 마지막 생을 다한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생각할 때 미련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는 진정으로 충성스런 사람이요 최후 승리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깨달음)바로 그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모습, 최후 승리자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내게 어떤 유혹과 환란과 고난이 닥쳐와도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승리자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자리를 굳게 지키는 모습 말입니다.
설령 그런 모습 속에서 우리가 죽어간다 할지라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다시 살 것이요, 새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그날 영생수를 마시며 영생의 부활로 우리를 승리케 하실 줄 믿습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사탄의 세력을 두려워하기보다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실 승리자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더욱더 경외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이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세력이 아무리 날뛰고 불순종의 알들들을 통해 우리를 유혹하고 고통을 가져온다 할지라도 최후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음의 승리하게 해 주시옵소서.”
“로마의 폼페이시에 화산재가 덮어 모두가 도망치다가 죽었지만 그 속에서 마지막까지 소임을 다하 죽은 무명의 청지기처럼 우리도 해바라기처럼 마지막까지 주님을 바라보며 최후를 맞이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에덴이 회복될 때 그곳에서 영생수를 부어주셔서 마시게 하실 승리자이신 주님을 찬양하며 맞이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찬양)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 함이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사랑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축복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이 눈에 보이는 대로 흘러가는 것 같지만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세력이 주도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저와 여러분들도 빛의 자녀답게 승리하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아무리 사탄의 세력이 주도하고 불신자들을 통해 우리를 유혹하고 핍박을 가해도 주님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승리케 하시는 은혜를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렇기에 내 의지나 내 공로를 자랑하기보다 비록 넘어질 지라도 오직 승리자이신 주님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권세는 신주단지나 부적이나 오늘의 운세를 통해 믿는 자들을 유혹할지라도 인간의 손으로 만든 조각품이요 종이짝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것들이 신의 형상이거나 신이 깃들어 사는 게 아니요 그것들을 통해 세상을 이기는 게 아니죠.
오직 부활하신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 안에서만 이 세상의 유혹과 핍박도 이기게 하신 줄 믿습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하신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살 수 있기 바랍니다.
폼페이시의 그 문지기처럼 어떤 어려움과 환란속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자리를 문지기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자녀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 사탄의 세력을 무저갱에 처넣을 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수를 마시게 하시는 은총을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가 임할 수 있도록 이 시간 주님께 고백의 기도 다짐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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