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site-verification=bWsZs7W0_gSPuMoDXujZISVmSBQHlpw3IxoqFPAwWOg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만 의지하게(고후1:8-11) google-site-verification=bWsZs7W0_gSPuMoDXujZISVmSBQHlpw3IxoqFPAwWOg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만 의지하게(고후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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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고난 중에 가장 큰 고난이 무엇이겠습니까?

죽음의 고난이겠죠.

아무리 세상에서 용맹을 떨친 사람도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죽음 자체는 공포입니다.

특히 부당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면 공포와 억울함이 휩싸여 자신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를 보면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간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과연 그들이 어떤 죽음을 맞이했습니까?

스데반의 경우에 성경에 나와 있듯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가 죽음을 두려워했했습니까?

아니죠.

성난 군중들이 돌로 그의 머리와 몸을 던져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소리쳤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7:60)

그렇게 소리친 스데반 집사는 자기 죽음을 위해 주님께서 보와 우편에서 일어나 자신을 맞아주시는 모습을 바라봤습니다.

 

기독교 초기에 로마 황제의 박해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폴리갑도 있습니다.

폴리캅 교부는 서머나교회의 지도자요 사도 요한의 수제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를 향해 재판관이 말했습니다.

“폴리캅. 제발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예수를 안 믿겠다고 하시오”하고 말이죠.

그때 폴리캅이 어떻게 대답했을 것 같습니까?

“아니오! 주님께서 내 평생에 한 번도 나를 모른다고 하신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단 한마디 거짓으로라도 그분을 부인할 수 있겠소!”

그렇게 고백하면서 불길 속에서 화형 당하면서도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모습은 우리나라의 주기철 목사도 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해 모진 옥살이를 한 분이 주기철 목사님이죠.

그렇게 4년간 심한 옥살이와 고만을 당했는데 끝내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깨달음)어떻습니까?

왜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그토록 당당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에게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께서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시겠다고 약속하신 것(고전15:20-22)을 믿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바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11“25-26)

 

(적용)그렇습니다.

죽음이 두렵고 고통스럽긴 하지만 죽음 자체가 성도를 가둘 수는 없습니다.

죽음은 성도에게 있어서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 신앙만 갖는다면 어떤 고난과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귀먹은 하나님 응답하소서 | 권성권

"성경으로 문화 읽기를 접목한 세 번째 책이다. 첫 책은 출애굽기로부터 시작해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까지의 내용이 담겨 있다. 두 번째 책은 여호수아로부터 시작해 사사기, 룻기, 사무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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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고린도후서 1장 1-11절은 도입부 1장 12절에서 13장 10절은 본론부, 13장11-13절은 종결부입니다.

1장 1-11절에는 사도적 축도와 위로의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의 고백이 나와 있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간증이 포함돼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위로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일깨워줬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그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에게 위로로 다가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말할 정도(골1:24)였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고난도 당연히 받는 것이라(롬8:17)고 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거반 죽을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행14:19).

빌립보에서는 귀신들린 여종을 낫게 해 줬다가 그 주인들에게 고소를 당해 매를 맞고 투옥되기도 했고 유대인 암살단에게 살해당할 위험도 겪었습니다(행16:16-24).

 

바울과 그 일행이 당하는 환난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직접적으로 위로와 구원의 유익을 가져다준다는 뜻입니다.

놀라운 것은 본문 3절부터 7절까지 ‘환난’이나 ‘고난’이란 말이 여섯 번 나오는데 ‘위로’란 단어는 열 번이나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환난이나 고난이란 말이 사용된 것보다 두 배나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해 고난을 받게 되면 주님의 위로는 두 배로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으로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천군 천사를 통해 위로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위로해 주셨습니까?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그들의 머리카락조차 상하지 않는 위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죠.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거반 죽을 뻔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바울을 다시 살려주셨고 주변 동료들이 많은 위로를 받게 되었죠.

심지어 초신자들조차도 말이죠.

 

그런가 하면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드로아에서 저녁늦게까지 집회할 때도 그랬습니다.

그날 창문에 걸터 앉은 노예 출신 유두고가 피곤을 못 이겨 떨어져 죽는 일이 발생했죠.

그때 바울은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님의 역사 가운데 다시금 살아났고 그 주변 동료들이 많은 위로를 받게 되었죠.

 

(깨달음)그만큼 주님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고난을 받으면 그 위로는 두 배로 넘쳐나게 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위해 고난받는 자리에 있다면 기꺼이 위로를 기대하며 그 고난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권성권

성경으로 문화읽기2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오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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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오늘 읽은 본문은 바울 자신이 아시아에서 당했던 극한 환난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환난 중에서도 건지신 하나님의 구원을 간증하는 말씀입니다.

본문 8-9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여기에 ‘아시아’란 지금의 터키 서부 지방을 말합니다.

일부 성서학자들은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지역을 ‘에베소’로 이해하기도 하죠.

그것은 에베소에서 있었던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일으킨 소란(행19:23-40)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의 실체라고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시아가 에베소만을 가리킨다면 고린도전서 15장 32절이나 16장 8절처럼 에베소라는 지명을 구체적으로 밝혔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서 당한 환란을 에베소라고 속단하기는 힘들고 어쩌면 에베소를 포함한 소아시아 전 지역으로 일컫는 것으로 해석하는 게 타당하겠죠.

 

(원해)중요한 건 그 환란이 에베소든 소아시아든 그 환란으로 인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라고 표현한 점입니다.

여기서 ‘살 소망’은 헬라어로 ‘자오’(ζάω)인데 생명(life)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끊어지다’로 번역된 헬라어 ‘엑사포레오’(ἐξαπορέω)는 ‘밖으로’를 뜻하는 ‘에크’(ἐκ)와 ‘곤경에 처하다’는 뜻의 ‘아포레오’(ἀπορέω)의 합성어입니다.

문자적으로는 길이 끊어져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방책이 전혀 없다’, ‘모든 희망을 포기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마치 너무 많은 짐을 실은 배가 무게를 견디지 못해 침몰하고 마는 듯한 뉘앙스입니다.

바울이 그 정도의 생명까지 위협당한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입니다.

 

(원해2)더욱이 9절에서 바울은 그런 환란과 고난으로 인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사형 선고’로 번역된 ‘아포크리마 투 다나투’(ἀπόκριμα τοῦ θανάτου)는 그 해석이 분분할 정도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사도행전 19장 23-41절을 언급하면서 에베소의 데메드리오 폭동 사건 때 폭행을 당해 죽을 지경까지 갔던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또 어떤 신학자는 법과 질서를 어긴 사람에게 내려졌던 형벌로서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들과 싸우는 심각한 위험에

처한 경험으로 간주하기도 하죠.

그리고 다른 신학자는 법정에서 내려진 사형의 판결로 이해하는 가하면, 복음을 증거하다가 겪은 육체적 고난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어떤 해석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사형 선고 곧 죽음의 직전까지 갔던 환란과 고난이라는 점입니다.

 

(깨달음)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그처럼 바울이 죽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그런 환경을 만들어 가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연약한 자기 자신을 의뢰하지 말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신뢰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점입니다.

그만큼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 죽은 자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창조적인 부름과 동시에 오로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어떤 요소도 이 일에 끼어들 수 없는 것임을 일깨워주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번제로 바친 이삭을 살리신 일도, 후손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후대의 산 소망을 주신 일도 오직 하나님만이 하신 일이라는 점입니다(롬4:17,히11:19).

그런 것처럼 바울도 살 소망조차 없는 환난과 고난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권성권

하루 한 장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묵상하기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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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2)본문 10-11절입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원해3)바울은 9절에 이어서 여기서도 자기들을 큰 사망에서 건지신 하나님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자신이 신뢰한 하나님을 계속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큰 사망’은 헬라어로 ‘τηλικούτου θανάτου(텔리퀴토우 다나토우)인데 문자적으로 ‘심한 죽음의 고비’를 말하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은 아예 ‘어려운 죽을 고비’로 번역을 할 정도입니다.

 

(원해4)‘건지셨다’는 헬라어 로 번역된 ‘ῥύομαι’(뤼오마이)는 ‘끌어당겨 구해내다’(to draw to one's self)는 뜻입니다.

과거 죽음의 위협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에 근거해 앞으로도 어떤 환란이 닥쳐와도 구해줄 것을 기대하는 표현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죠.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자를 보호해주시고 죽음으로부터 건져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보살피심은 과거와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까지도 제한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전3:14,딤후4:18).

 

(깨달음)바울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억하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우리를 위해 간구하라’고 ‘기도로 도우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른바 중보기도를 요청한 것이죠.

 

사실 중보 기도는 매우 신비로운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를 위해 기도하는 게 아니고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게 중보기도죠.

사도행전 12장에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초대교회는 그를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 18절에서는 친히 바울이 이렇게 권면한 바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그만큼 중보기도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열쇠를 여는 키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자신의 복음전도를 위해, 복음을 전하다가 겪는 고난과 역경을 위해 중보기도를 해 주면 하나님께서 더욱 기쁨으로 역사하지 않겠냐고 하는 것입니다.

 

(적용)바로 이것이 사형선고를 받은 바울일지라도 죽은 자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아가겠다는 바울의 신앙관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스데반 집사도 폴리캅도 교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폴리갑 교부가 화형의 불길에 죽어가면서도, 주기철 목사가 옥살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끝내 그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죽음 너머에 부활의 역사로 자신을 맞아줄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그 사실을 믿기에 온갖 고난과 환란 속에서도 담대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았던 것이고 그를 위해 중보기도해 주도록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눈을 뜨면 볼 수 있어요 | 권성권

2020년 한 해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너무나 답답했다. 지금도 그게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고 모든 게 답답하기만 하다. 청년들도 꿈을 꿀 수 없는 상태다. 초등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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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어떤 고난 속에서 부활신앙으로 믿음을 지켜나가는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스데반도 폴리캅도 주기철 목사도 모두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게 믿음을 지킨 이유가 있지 않았더냐?”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 너머 영광의 부활이 있음을 믿었기 때문에 말이다.”

지금도 바울도 에베소와 소아시아에서 환란과 고난을 당해 살 소망까지 끊어진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인내한 이유가 있지 않았더냐?”

오직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그 능력을 온전히 신뢰했기 때문이지 않았더냐?”

바울은 그만큼 자기 자신의 힘이나 능력을 믿었던 게 아니라 하나님의 부활능력을 온전히 믿고 의지했던 것 아니었더냐?”

그 까닭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도 복음 사역을 위해 고난을 받을 때 함께 중보기도해 달라고 요청했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주님의 복음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 때문에 환란과 고통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왜 나에게 이런 고난과 고통이 찾아오는 거냐면서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 믿음으로 인내해야 하지 않겠느냐?”
설령 그 고난과 고통으로 인해 복음 때문에 죽는 한이 있어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말이다.”
그만큼 누가 복음의 현장에 고난당하는 이가 있다면 함께 중보하며 기도하는 자들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하나님께서 베풀지 않겠느냐?”

 

(찬양)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의 괴수 무익한 날 부르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셨네

어디든지 가리라 주 위해서라면 나는 전하리 그 십자가

내 몸에 밴 십자가 그 보혈의 향기 온 세상 채울 때까지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사나 죽으나 난 주의 것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의 소망 내 안에 주만 사시는 것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의 괴수 무익한 날 부르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셨네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사나 죽으나 난 주의 것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의 소망 내 안에 주만 사시는 것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의 괴수 무익한 날 부르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셨네

내 사랑 나의 십자가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살다가 그 어떤 고난과 환란을 당한다 해도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감싸고 계심을 믿기 때문에 죽음 속에서도 다시금 부활케 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심정으로 누군가 고통에 처하고 누군가 복음의 현장에서 고난을 겪을 때 함께 아파하는 심정으로 중보기도자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시간표 | 권성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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