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site-verification=bWsZs7W0_gSPuMoDXujZISVmSBQHlpw3IxoqFPAwWOg 고난에 참여하는 자 위로에도 그러할 줄(고후1:5-7) google-site-verification=bWsZs7W0_gSPuMoDXujZISVmSBQHlpw3IxoqFPAwWOg
 

고난에 참여하는 자 위로에도 그러할 줄(고후1:5-7)

반응형

고난에 참여하는 자 위로에도 그러할 줄.hwp
0.09MB

(설교열기)(성화)금다니엘과 세 친구를 아실 것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침공 이후에 1차 포로로 끌려간 자들입니다.

그때 다니엘의 세 친구는 느브갓네살 대왕의 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벨론의 관료들이 제기하는 사회적 압박을 받았고 그런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키다가 풀무불에 들어갔습니다.

그야말로 죽음을 앞에 둔 큰 고난이었조ㅛ.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풀무불의 불꽃으로 인해 그들을 붙잡은 사람들은 죽었을지라도 다니엘의 세 친구는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주님의 위로가 바로 그와 같다는 사실입니다.

주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신앙생활 때문에 받는 고난 속에는 주님의 위로하심이 뒤따른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선친들도 마찬가지요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도 주님으로 인해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큰 위로를 체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전자책]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알라딘

욥이 재산 잃고 자식들 다 죽고 심지어 그의 몸에 악창이 들끓을 때 그의 세 친구가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욥이 고난 당하는 것은 ‘인과응보’ 때문이라고 했죠.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

www.aladin.co.kr

 

 

(역배)고린도후서는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디도를 통해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이 해결됐다는 소식을 듣고 써 보낸 편지라고 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무엇을 목적으로 고린도후서를 써 보냈다고 했습니까?

바울의 사도성을 공격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 단호하게 맞서서 변호함으로써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온전한 화목을 이루고 질서를 확립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어지럽기 그지 없는데 그만큼 지도자의 리더십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화목과 질서도 진정한 지도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도 여태껏 거짓 사도들과 같은 그릇된 지도자가 판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고린도교회가 혼란과 분열을 초래한 것이었죠.

바울은 그런 점들을 바로 잡고 질서를 세우고 화목을 위해 이 편지를 써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장 1-11절은 도입부이고 1장 12절에서 13장10절은 본론부, 13장11-13절은 종결부입니다.

1장 1-11절에는 사도적 축도와 위로의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의 고백이 나와 있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간증이 포함돼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의 고백을 살펴봤습니다.

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고 했습니까?

‘찬송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율로게토스’(εὐλογητός)의 원형 ‘율로게오’(εὐλογέω)는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바라크’(בָּרַךְ)와 같은 말이죠.

‘바라크’는 현세적인 복을 주시는 분을 향해 찬양하다는 뜻이자 무릎을 꿇다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이 땅에서 복을 주시니 어찌 무릎을 꿇어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찬양하며 경배해야 할 이유를 세 가지로 표현했죠.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이요, 자비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요, 위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특별히 ‘위로’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시스’(παράκλησις)는 ‘곁에서 부르다’(a calling near)는 뜻인데, 성령님도 ‘파라클레토스’라고 했습니다.

위로와 성령의 명칭이 ‘파라클레오라’는 똑같은 동사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령님도 우리 곁에서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분이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향해 무릎을 꿇고 찬양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본문)오늘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위로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데 본문 5절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깨달음)여기에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말합니다.

주님의 그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라는 말씀은 주님의 고난이 그리스도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바울도 마찬가지였죠.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말할 정도(골1:24)였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고난도 당연히 받는 것이라(롬8:17)고 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거반 죽을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행14:19).

빌립보에서는 귀신들린 여종을 낫게 해 줬다가 그 주인들에게 고소를 당해 매를 맞고 투옥되기도 했고 유대인 암살단에게 살해당할 위험도 겪었습니다(행16:16-24).

 

(원해1) 우리말 ‘넘치다’는 헬라어 ‘페리스소에우오’(περισσεύω)는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 직설법 동사입니다.

이는 고난이 차고 넘치는 과거 일이 아니라 바울의 선교 생애에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현장을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고난을 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로 여겨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적용)그래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주님을 믿는 성도라고 해서 고난이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고난과 환란을 피하려고 합니다.

무당을 찾아가는 이유나 점을 보고 부적을 쓰는 이유가 그것이죠.

 

그런데 기독교인 중에도 주님을 믿으면 고난이 없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독교를 고난의 도피처로 생각하고 교회에 나오는 이들이 그렇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고난이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믿는 동안 고난이 닥쳐올 수도 있고 그 고난이 물러갈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난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 고난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은 신실한 믿음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욥도 그랬고 모든 믿음의 선친들이 당한 고난이 그랬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이 찾아올 때 오히려 기뻐할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위로도 갑절로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전자책]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알라딘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오래전 신영복 교수의 책을

www.aladin.co.kr

 

(본문2) 본문 6-7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깨달음)여기에 ‘우리’가 환란을 당하는 것이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바울과 그 일행이 당하는 환난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직접적으로 위로와 구원의 유익을 가져다준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가 당하는 환난이 고린도교회 성도가 받는 위로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사실 바울 사도와 고린도 교회 성도가 동일한 신앙 아래 있는 공동 운명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부모와 자식이 하나로 연결돼 있는 것과 같은 이치죠.

그래서 바울이 그리스도와 연합해 환란을 당하면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그 환란에 연합으로 동참케 되는 것입니다.

 

(원해2)우리말 ‘소망’은 헬라어로 ‘엘피스’( ἐλπίς)인데 ‘바라다’ ‘희망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 소망이 ‘견고하다’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를 통해 고린도교회에 대한 그의 신뢰가 매우 강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품고 있는 소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겪고 있는 문제들 곧 이단 침투, 바울의 사도권 문제,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고 새롭게 세워나가는 소망임에 틀림 없습니다.

 

(원해3)우리말 ‘참예하는 자’로 번역된 헬라어 ‘코이노노이’(κοινωνός)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는 성도들의 사귐’을 뜻하는 말입니다.

성도들 간의 교제를 말하는 것이죠.

바울은 자신이 참여한 바 있는 환난과 위로에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참여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자식이 환란과 고난을 당할 때 부모가 함께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 때 보좌에 앉아계신 주님께서 서서 스데반 집사를 바라보시는 것과 같은 이치죠.

그렇게 주님은 성도가 당하는 환란과 고난 속에서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깨달음) 특별히 본문 3절부터 7절에 사용된 ‘환난’이나 ‘고난’이란 말이 여섯 번 나옵니다.

놀랍게도 ‘위로’란 단어는 열 번이나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환난이나 고난이란 말이 사용된 것보다 두 배나 많은 것입니다.

 

그만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해 고난을 받으면 주님의 위로는 두 배로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으로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에 절하지 않을 때 풀무불에 들어갔지만 머리카락 조차 타지 않는 위로를 베풀어주셨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거반 죽었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다시 살려주실 때 그 주변의 동료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두 배나 넘쳐났던 것 아니겠습니까?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바울이 드로아에서 저녁늦게까지 집회할 때 창문에 걸터 앉은 노예 출신 유두고가 피곤을 못 이겨 떨어져 죽었지만 주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그를 살려내실 때 그 동료들의 위로가 두 배나 임했던 것이죠.

 

(원성)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49: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2:16-17)

 

 

[전자책]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알라딘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페르시아의 고

www.aladin.co.kr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겪는 고난과 환란을 통해 주님의 위로는 두 배로 갚아 주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네가 주님 때문에 받는 고난과 환란이 있느냐? 주님은 그런 너를 외면치 않고 위로도 두 배로 베푸시는 분 아니더냐?”

다니엘의 세 친구가 느부갓네살의 신상 앞에 절하지 않는 일로 뜨거운 풀뭄불에 던져졌지만 주님은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는 위로로 감싸주지 않았더냐?”

바울이 에베소에서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안고 세 번 방문하고 네 번 편지를 써서 해결코자 얼마나 많은 애를 썼고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겠느냐?”

주님은 그런 바울을 내버려두신 분이 아니라 디도를 통해 해결케 하시는 위로를 받게 해 주셨고, 급기야 에베소 사역을 마치고 고린도에 갔을 때 그의 두 눈을 주님의 위로하심을 직접 목격케 하신 것 아니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주님 때문에, 믿음의 신앙심 때문에, 지금도 겪고 있는 고난과 환란이 있을 때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가 닥친 고난과 환란에는 주님께서 두 배로 위로하시려는 섭리가 있는 것이니 말이다.”

자식이 아파하고 괴로워할 때 부모가 함께 아파하고 괴로워하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파할 때 어찌 하나님께서 함께 아파하지 않겠느냐?”

스데반 집사가 고난 속에서 죽어갈 때 주님께서 보좌에서 일어나 위로하듯이 주님은 지금도 너를 그렇게 위로하고 격려하지 않겠느냐?”

 

(찬양)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주 나의 하나님이 지켜주시네

놀라지 마라 겁내지 마라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주 나의 하나님이 지켜주시네

놀라지 마라 겁내지 마라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내 맘이 힘에 겨워 지칠지라도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세상에 험한풍파 몰아칠 때도 주님 나를 지켜 주시네

주님은 나의 산성 주님은 나의 요새 주님은 나의 소망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전자책] 귀먹은 하나님 응답하소서 : 알라딘

성경으로 문화 읽기를 접목한 세 번째 책이다. 첫 책은 출애굽기로부터 시작해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까지의 내용이 담겨 있다. 두 번째 책은 여호수아로부터 시작해 사사기, 룻기, 사무엘서,

www.aladin.co.kr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허락하신 고난과 환란 속에서는 주님께서 두 배로 베푸시는 위로가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겪는 환란도, 스데반 집사가 겪은 죽음의 고난도, 돌에 맞아 죽어가던 바울도, 주님의 위로는 두 배로 넘쳐났습니다.

자식이 고난을 당할 때 어느 부모가 가만히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함께 아파하고 함께 해결책을 모색하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주님 때문에 믿음을 지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고난과 환란을 당할 때 두 배로 위로하시는 은총을 베푸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가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