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site-verification=bWsZs7W0_gSPuMoDXujZISVmSBQHlpw3IxoqFPAwWOg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음으로(딤후4:1-22)_2025년 4월 17일 고난주간넷째날 새벽설교_2025년 고난주간목요일새벽설교 google-site-verification=bWsZs7W0_gSPuMoDXujZISVmSBQHlpw3IxoqFPAwWOg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음으로(딤후4:1-22)_2025년 4월 17일 고난주간넷째날 새벽설교_2025년 고난주간목요일새벽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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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의 목요일날 예수님께서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는 것은 그들의 죄를 씻겨주려 오심을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어서 당신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나누셨죠. 떡을 떼어주시면서 이것이 자신의 살이라 말씀하셨고 잔을 나눠주시면서 이것이 내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떡이란 곧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요 생명의 떡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은 섬김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대속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살기로 다짐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좇아, 예수님의 나눔을 좇아, 예수님의 생명을 좇아 살아가는 자들 말이죠. 2천년 전 주님께서 그 본을 보여주셨다면 이제는 저와 여러분들의 차례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전자책]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예스24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 속에서 페르시아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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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디모데후서의 끝 장이자 바울이 생애 마지막으로 디모데에게 당부한 명령입니다. 개인의 사사로운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명령 곧 신명(神命)이라고 부를 수 있죠. 왜냐하면 본문 1절에 이렇게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맨 먼저 나오는 ‘하나님 앞에서’, 너에게 명한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 앞은 앞으로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이기도 하죠. 지금 바울은 하나님 앞에 선 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선 심정으로 디모데에게 명령한다는 것이죠.

과연 무슨 명령을 하는 것입니까? 2절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또 5절은 이렇게 명령합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바울은 먼저 디모데에게 ‘말씀을 선포하라’고 명령을 합니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말씀전파에 힘을 쓰라’는 명령이죠. 그것이 전도자(傳道者)의 일이고, 그것이 디모데가 감당해야 할 하나님 앞에서의 직무라는 것입니다.

‘전도자’란 ‘도(道)를 전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도(道)’ 란 단순한 ‘길’을 말하는 게 아니죠.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논어나 맹자 같은 사서삼경의 도를 말하는 게 아니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도를 말하는 것이죠. 더 구체적으로 말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생명의 복음을 말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 분 안에서만 영생의 길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분의 생명과 진리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전도 사역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 아니었습니까? 누가복음 4장 43-44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예수님이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아픈 자를 만져주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기 위함이셨습니다. 그 까닭에 12제자를 세우셔서 그들로 하여금 전도 사역을 감당케 해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3장 14절에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사역을 위해 파송하셨습니다. 그처럼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그런 제자의 삶 곧 전도자의 삶을 당부한 것이었죠.

 

 

[전자책]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예스24

욥이 재산 잃고 자식들 다 죽고 심지어 그의 몸에 악창이 들끓을 때 그의 세 친구가 어떻게 평가했습니까?욥이 고난 당하는 것은 ‘인과응보’ 때문이라고 했죠.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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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도 주님의 그 당부를 위임받은 자들 아닙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에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시면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하고 명령하셨죠. 오늘 우리 모두에게 전도자의 삶을 살도록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가 사는 이 세대는 바울의 말처럼 ‘건전한 가르침’을 듣기 싫어하는 상황입니다. 오히려 자기 귀를 만족시켜주길 원하는 시대죠. 어떤 것이 진리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가치와 신념에 부합되는가, 그렇지 않는가, 하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입니다. 그야말로 자기 옳은 것만 좇아 살려고 하는 사사시대와 똑같은 때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만 항해는 것 말입니다. 그로 인해 상대적인 진리만 존재할 뿐 절대적인 진리를 거부하는 시대죠.

그러나 어떻습니까? 절대 진리요, 절대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자신들은 어떠한 자들이어야 합니까? 자기 귀에 좋고, 자기 마음에 달콤한 것만을 좇아 사는 세상 사람들을 빛되신 주님 앞으로 인도할 책임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그 삶을 우선순위에 두로 살도록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전도자의 직무를 위해 우리에게 어떤 덕목들이 요청되는 것이겠습니까? 평생을 이방인 전도에 매진했다가 이제 이별을 앞둔 바울의 고백속에서 찾아볼 수 있겠죠. 본문 7절에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전도에 일평생 헌신했던 바울은 자신의 생을 ‘선한 싸움’으로 정의합니다. 뒤에 등장하는 ‘달려갈 길’ 이라는 표현은 전투를 위한 싸움이라기보다는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 경주를 위한 싸움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흔히들 인생을 장거리 경주로, 또 마라톤 경주로 빗대 설명합니다. 마라톤에 필요한 게 무엇입니까? 인내와 끈기입니다. 그것이 있어야 결승점까지 도달할 수 있죠.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한 영혼을 건져 올리는데 있어서도, 마라톤 경주자처럼 인내와 끈기가 필요한 법이죠.

그래서 2절에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또 범사에 오래 참으면서 경책하고 권하라”고 권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 영혼을 건져 올리기 위한 마라톤의 자세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상황에서든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이 되고, 또 그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리고 모든 일에 함부로 대하지 말고 신중한 자세로 절제하며 다가서는 것 말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전도자의 직무를 완성할 수 있고, 그때 바울처럼 주님의 선한 싸움을 통해 달려갈 길을 마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 선한 싸움을 한 자들에게 8절에 면류관이 예비돼 있다고 말해 줍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여태껏 전도자의 직무를 다한 바울만 면류관을 받는 게 아니라 디모데도, 그리고 우리 시대의 전도자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그런 면류관을 주신다는 것이죠.

 

 

[전자책]하나님의 시간표 - 예스24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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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9-22절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여러 당부입니다. 그를 통해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는 바울의 단호함을 엿볼 수 있지만 바울의 외로움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19절에 “너는 속히 오라”, 11절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리고 13절에 ‘겉옷을 가져오라’ 하는 이 당부를 통해서 말입니다.

왜 이렇게 바울의 외로움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까? 본문 10-16절 보면 바울이 믿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다 버리고 떠나갔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바울 곁에 지켜준 동역자들이 있었죠. 11절의 ‘의사 누가’도 있었고, 그리고 디모데 편으로 연락을 받고 오게 될 ‘요한 마가’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받는 것처럼 다들 바울 곁을 떠나갈 때, 바울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겠습니까? 이것이 때로는 믿음의 사람들이 겪는 고독입니다.

그러나 이 고독 속에 있을 때 더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는 영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곧 바울을 지탱하게 하는 영적인 동력이 되는 것이죠. 본문 17-18절을 보더라도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 곁에 많은 이들이 떠나갔지만, 끝까지 바울 곁에서 지지하고 동역한 누가와 요한 마가, 그리고 이제 곧 찾아올 디모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가장 근본적으로 바울을 위로하고 힘 주실 이는 그 고속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주님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바울을 품어주셨고 바울을 생명으로 감싸주신 분이시죠. 비록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께서 친히 발을 닦아 주신 것도 아니고 떡과 잔을 나눠주신 것도 아니지만 바울이 가는 곳마다 당신의 생명과 사랑으로 품어주신 주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당신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에게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죠.

 

 

[전자책]눈을 뜨면 볼 수 있어요 - 예스24

2020년 한 해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너무나 답답했다. 지금도 그게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고 모든 게 답답하기만 하다. 청년들도 꿈을 꿀 수 없는 상태다. 초등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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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의 넷째날인 목요일 이 아침에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들려주십니까? 디모데후서 마지막 편지를 통해 성령님은 어떤 음성을 들려주십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은 섬김의 경주자라는 사실입니다. 섬김의 마라토너로 살 때 곧 복음전도자의 마라토너로 살때 우리에게 여러 장애물이 있고 이 길에서 이탈하는 자도 있고 그로 인해 고독을 겪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속에서도 저 영원한 천국에 이를 때까지 우리에게 힘과 위로를 주시고 늘 격려하시는 주님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그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세상 끝날까지 우리아 함께 하시는 복된 날이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처럼 그 나라에  예비된 의의 면류관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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