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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사도행전

큰 분쟁이 생기니(행23:7-10)

by 권또또 2022.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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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우리가 아는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왜 그가 눈물의 선지자로 불렸겠습니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경외하기보다 이방 신과 세상의 탐욕이라는 우상을 좇기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을 보고 탄식하며 운 것이죠.

 

그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 왕과 제사장과 고관대작들 앞에서 그렇게 이야기했죠.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 우리나라를 징계하기기를 원하시는데, 바벨론에게 항복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왕과 제사장들들과 고관대작들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듣기보다 오직 자기들의 논리만을 더 주장하며 펼쳤죠.

바벨론에 항복할 게 아니라 차라리 애굽의 군사력과 무기를 빌려 바벨론에 대항하자고 말이죠.

결국 그들은 바벨론을 통해 그 백성들을 징계하시고 그들을 바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거부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전한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 가두고 또 진흙 구덩이에 가둬버렸죠.

 

그렇다며 왕과 제사장들과 고관대작들 앞에서 하나님이 뜻과 섭리를 선포한 예레미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위대 뜰과 구덩이 속에서 죽고 말겠습니까? 아니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선포한 예레미야를 바벨론 제국이 쳐들어왔을 때 오히려 그의 생명을 살려주시고 그의 지위까지 보장해 주셨습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명을 다할때까지 결코 죽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죠.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할때부터 기적과 이변을 일으키신 주인공이라 유대 당국자들은 예수님이 눈엣가시였죠.

그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지만 그때마다 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7:30, 8:20)

 

(적용)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좇아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받들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사명을 이루기까지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는 법이 없는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받들며 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드리는 것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좇아 살 때 예레미야와 같이 어려움에 빠질 수 있죠.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손길로 친히 구해주시는 전능하신 아바 아버지이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바울은 지금 천부장이 소집한 산헤드린 공회에 서 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가장 출세한 자들 앞에 서 있는 바울이죠.

그들은 유대 사회의 정치종교사회 모든 면에서 최고의 실세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보기에도 그렇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그들은 가련한 인생이었죠.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중시하는 자들이었지만 하나님과 성전을 우상시해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장사치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권세와 욕망으로 그들은 바울이 하나님과 성전을 모독했다면서 바울을 죽이려고 심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모든 면에 걸쳐서 신앙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겨왔노라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입을 치는 것은 인격에 대한 최악의 모독이었죠.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의 입을 침으로서 그의 인격을 완전히 짓밟아버리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성전을 모독한 자는 살려둘 가치가 없다고 선언한 셈이었습니다.

 

사실 율법은 두세 증인의 증언이 있을 때에만 사람의 범죄를 확정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 과정이 없이는 누구도 죄를 정할 수가 없었죠.

하지만 산헤드린 의원의 최고 수장인 아나니아 대제사장은 그런 과정조차 거치지 않고 바울을 짐승처럼 취급하고자 한 것이죠.

그러자 바울은 그를 향해 “회칠함 담”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너를 치실 것이라고 경고했죠.

그것은 바울이 아나니아를 향해 저주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거스르고 자신의 입술을 치게 한 아나니아에 대한 정당한 자기 변호였습니다.

 

그때 바울의 입술을 치려던 자들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네가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욕하는 것이냐?”하고 반문했죠.

그러자 바울은 그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다고 대답을 하죠.

더 나아가 바울은 출애굽기 22장 28절의 말씀을 인용해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라”는 말씀도 잘 알고 있다고 대답을 하죠.

 

바울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모른다고 한 것은 사실이었죠.

바울을 심문하는 산헤드린 공회가 갑자기 열린 것이었고, 지난 20년간 바울이 유대사회를 떠나 선교여행을 다녔기 때문이죠.

그러나 바울은 율법을 잘 알고 있었기에 두세 증인 없이 자신의 입을 치라는 그가 대제사장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죠.

하지만 자신의 입을 치라고 한 그가 대제사장임을 안 즉시 율법을 이야기하면서 지도자를 존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린 것이죠.

 

(깨달음)이를 통해 지난 시간에 깨달은 바가 있었죠.

나를 힘들게 하고 내게 모욕을 주는 이가 있을 때 내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였습니다.

주일날 나눈 말씀처럼 내게 죄를 지은 자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가와 같죠.

주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번을 용서하라고, 무한대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죠.

 

그러나 우리 안에 자비심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쉬운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크신 은혜 안에 있을 때, 빛에 비춰 내가 흉악한 죄인임을 알 때 그때 용서할 수 있다고 했죠.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이요,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 때문이죠.

바울은 자신의 입을 치라는 아나니아 대제사장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존중하고자 한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다는 뜻이죠.

 

(적용)우리도 그래서 바울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해야 어떤 사람이든지 주님의 말씀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거죠.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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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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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6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전개)바울은 자신을 심문하려는 71명의 산헤드린 의원이 반반으로 구성돼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절반은 사두개인이고 절반은 바리새인이라는 것 말이죠.

실은 바울도 20년 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산헤드린 의원이 되는 것을 꿈꾸고 있어서 잘 알고 있었죠.

 

그런데 ‘사두개’란 명칭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주전 2세기경 사독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제사장들이 성전관리의 기득권을 주장하면서부터 사두개파가 형성되었죠.

바울 시대의 사두개파들은 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의원 등 유대 사회에서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기득권의 지배계층이었죠.

그들은 모세오경의 권위만 인정할 뿐 다른 구약성경의 권위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셨을 뿐 인간사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죠.

그런 관점으로 살았기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섭리는 애당초 중요한 게 아니었고, 천사와 영도, 부활과 영생과 내세도 믿지 않았죠.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현실 세계뿐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도덕성과 윤리성을 상실한 물질주의자들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성해야 할 성전의 제사의식마저 추악한 장사꾼의 상거래로 전락시킨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시의 유대 서민들에게 사두개파 사람들은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었죠.

 

그런 사두개파와 달리 바리새파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바리새란 ‘분리된 자’ 혹은 ‘구별된 자’를 뜻을 지닌 말입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고 사두개파 사람들과 구별된 자라는 의식을 갖고 살았죠.

그들은 주전 4세기경 유대교 개혁에 앞장섰던 하시딤의 후예답게 누구보다도 율법에 충실했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것들 곧 비율법적인 것들이나 불경건한 모든 것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해 스스로 분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명칭만큼이나 자부심을 갖고 산 자들이었죠.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과 달리 모세오경뿐 아니라 구약성경을 모두 정경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전통도 존중했죠.

그들은 천사와 영의 존재는 물론 부활과 영생과 같은 내세도 믿었습니다.

그들은 물질주의에 빠져 있는 타락한 제사장들과 달리 엄격하게 율법을 준수하며 살았기에 유대 서민들에게 존경을 받았죠.

 

어떻습니까?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그 정도로 신학적인 견해도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산헤드린 공회가 열린다 해도 늘 두 진영 간에 대립과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죠.

그런 그들에게 둘러싸인 바울이 그들에게 뭐라고 말을 했습니까?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바울은 자기 자신이 바리새인이라고 힘주어 강조한 것입니다.

자신은 바리새인의 아들이라고, 자기 당대가 아니라 조상적부터 바리새인이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심문받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깨달음)그렇다면 바울이 굳이 바리새인이라고 말한 것이 지금의 위기를 모면하고픈 생각 때문이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죠.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바리새파중에 바리새파였습니다.

그것은 빌립보서 3장 5절에 바울 자신이 이야기한 내용을 통해서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지금 바울이 바리새인임을 밝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산헤드린 의원들 중에 절반이 자신과 같은 바리새파이기 때문에 그들의 덕을 보고자 한 것입니까?

바울이 바리새파와 동질감을 갖도록 한 것은 오직 한 가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려는 이유였죠.

 

그런데 어떻게 상황이 전개됩니까? 본문 7-10절 상반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큰 분쟁이 생기니

 

(깨달음)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그들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다툼을 벌인 거죠.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활과 천사와 영을 믿는 이들이고, 사두개인들은 오로지 혈실주의자요 물질주의자들이죠.

그러니 서로 다투고 큰 분쟁이 생긴 상황입니다.

 

(원해)여기에 ‘분쟁’으로 번역된 헬라어 ‘스타시스’(στάσις)는 완력을 동원한 다툼을 의미하는 단어죠.

민란을 주도하고 폭동을 일으킬 때 사용하는 단어(막15:7,눅23:19)죠.

그만큼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서로 주먹을 휘두르며 뒤엉킨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고자 한 복음, 부활을 통해 생명을 주시려는 주님의 생명을 듣는 것보다도 자기 관점만 주장하며 다툰 것이죠.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좇지 않으면 언제나 자기 주장만 강요하게 된다는 것이죠.

내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하나님의 뜻에 비춰 생각하지 않으면 언제나 자기 주장과 자기 고집만 강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우리도 내 감정 내 기분 내 생각을 앞세우기보다 언제나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바라보며 사는 바울과 같은 자들이 돼야 하겠죠.

 

(전개)중요한 것은 이런 논쟁과 다툼이 벌어질 때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천부장 루시아가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죠.

본문 10절은 천부장 루시아가 그들의 다툼 때문에 바울이 다칠까봐 군인들을 명령해서 영내로 데려가게 하죠.

어떤 면에서 보면 사두개인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다툼의 소굴에서 건져내도록 한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천부장 루시아가 주도한 일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감동을 주셔서 바울을 구해내도록 한 것입니다.

 

왜죠? 바울에게는 아직 해야 할 하나님의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이죠.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사명을 받았든지 간에, 가정과 일터와 하나님의 교회에서 각자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우리를 데려가는 법이 없다는 것이죠.

그만큼 저와 여러분들도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 때 악의 소굴에서 우리를 친히 건져내 주실 줄 믿습니다.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죠?

(은혜)주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바라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데려가지 않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그렇게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사두개인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보다 자기 관점 자기주장만 내세우는데 너는 어떠하느냐?”

바울이 지금 천사와 영과 부활을 말하는 것은 바리새인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을 전하고자 함이 아니더냐?”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지만 그들은 오직 자기 관점 자기 생각으로 똘똘 뭉친 자들 아니더냐?”

오늘을 사는 너도 매사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따라야 사두개인과 바리새파와는 달리 바울처럼 살 수 있지 않겠느냐?”

바울이 자기 관점 자기 생각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좇아 살 때 그를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신 것 아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매사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 때 너를 향한 하나님의 사명을 다하기까지 너를 데려가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도록 해라.”

네가 속한 가정과 일터와 하나님의 교회에서 너를 향한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바울처럼 이 땅에 너를 악에서 건져내주지 않겠느냐?”

지금 위기의 상황에 직면에 바울을 천부장 루시아가 구출해 낸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감동을 주셔서 건져내신 것 아니겠느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만큼 너를 지키시는 분이시오,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않도록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않도록 모든 환란에서 네 영혼을 지키시는 분임을 기억했으면 좋겠구나.”

 

(찬양)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에 해와 밤에 달도 너를 해치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난을 면케 하시니 그가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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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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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나의 뜻 나의 주장을 좇아 살기보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좇아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시죠.

본문 속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보다 오직 자기 주장 자기 논리만 강화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바울을 통해 전해주시고자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복음은 전혀 관심 밖이었죠.

그런 그들이 아무리 하나님과 성전을 위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 자신을 강화하는 수단밖에 되지 않는 것이죠.

 

하지만 본문 속의 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매사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좇아 순종하는 자였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좇아 순종하다가 악의 구렁텅이에 빠질 뻘한 위험에 처할 때 하나님께서는 천부장 루시아를 통해 구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그 사명을 완수하기전까지는 결코 천국으로 데려가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매사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좇아 순종하여 사는 영광의 주인공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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