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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언젠가 아는 목사님의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대전에 있는 장례식장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어떤 목사님과 함께 정읍에서 만나 함께 가기로 했는데, 시간에 여의치 않아 기차로 올라갔죠.
대신 조문을 하고 내려올 때 함께 내려오자고 약속을 했고,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전에 도착해서 그 장례식으로 가는데, 그 목사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언제쯤 오나요?”
“지금 택시타고 가고 있는데요.”
“저희는 조문 끝나고 가야 되겠는데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갈께요.”
그렇게 통화를 하고 장례식장에 도착을 할 무렵에 또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안 되겠어요.”
“아니, 인제 도착했는데요.”
“저희들 일행이 있어서 그냥 가야 될 것 같아요.”
“아니, 5분만 기다려주면 안 되겠어요. 식사도 않 하고 그냥 조문만 하고 나올께요.”
“죄송해요. 안 되겠네요.”
(깨달음)그 순간 제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중간에 전화가 왔길래, 얼마나 화가 났는지, 도무지 참지 못하고, 마구 퍼부은 적이 있었죠.
그 일로 그 분이나 나나 한 참 동안 좋지 않는 감정으로 지냈죠.
그 후에 어떤 계기가 있어서 내가 먼저 사과를 했습니다.
그때 그 분은 그에 대해 “미안했습니다. 제가 조금만 더 기다렸더라면 좋았을텐데”하고 말할 줄 알았는데, 그런 말을 하지 않았죠.
(적용)우리의 삶에도 이런 경우가 없으리라는 법은 없죠.
그때 제가 한 번 더 깊이 생각했더라면, 모욕을 당한 것 같은 기분속에서도, 한 번 더 주님의 마음을 품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었습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내가 부정당하고 없인여김을 받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없죠.
그러나 그때도 주님의 마음을 품고 한 번 더 호흡하는 마음으로 나아간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의해 조롱당하고 집단으로 폭행당한 바울은 도리어 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신을 만나 주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들에게 소개했고, 그 분이 하신 말씀을 따라, 그들도 생명을 얻도록 전했죠.
하지만 그들은 도리어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없애 버려야 한다고 더욱 소리치고 난동을 피웠습니다.
그때 천부장 루시아는 군사들에게 바울을 데리고 안토니아 요새로 데리고 가서 바울을 채찍질하며 심문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바울을 채찍질하는 그 채찍은 납덩이가 붙어 있어서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채찍이었습니다.
그러니 나이가 많은 바울로서는 그걸 견뎌낼 재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성령님께서는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도록 감동을 주셨죠.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채찍질하고 심문하려던 로마 군사에게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혔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상관인 천부자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천부장은 그 즉시 바울에게 찾아와 사실 여부를 물었죠.
그러자 그것이 사실임을 천부장은 알게 되었죠.
다만 바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였고, 천부장 루시아는 돈을 주고서 뇌물로 로마 시민권을 획득한 자였습니다.
(깨달음)그래서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본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천부장 루시아는 자신이 획득한 로마시민권으로 더 많은 불의와 권력을 탐하기 위해 그 시민권을 활용한 자였죠.
반면에 바울은 주님의 복음을 로마에까지 가서 전하기 위해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혔던 것이죠.
그걸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어떤 지위와 직책을 맡겼을 때 그 지위와 직책을 더 많은 영광을 돌리는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길 원하신다는 것이죠.
(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알게 된 로마 천부장 루시아는 바울을 채운 쇠사슬을 풀어주는 대신 유대법정에 세우고자 하죠.
이른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으로 구성된 71명의 유대 최고법정 기구인 산헤드린 공의회에 바울을 세운 것이었죠.
그곳에서 바울의 죄목이 나온대로 유대 사회의 법정기구의 처벌에 맡기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22장 30절 말씀의 상황입니다.
23장 1절은 바울이 그곳에 둘러 앉은 공회원들 곧 71명의 산헤드린 의원들에게 자신의 신앙심을 밝힙니다.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하고 말이죠.
무슨 뜻입니까?
내가 여태껏 하나님을 섬겨왔지만 양심에 거리낌 없이 참되게 하나님을 섬겨왔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그는 바울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을 합니다.
왜 그가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했겠습니까?
지금 이 공의회가 열리기 전에 바울을 폭행하고 죽이려 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대제사장에게 말했기 때문이죠.
바울이란 자는 본래 유대인이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지금 기독교인이 되어 유대교를 말살하려고 한다고 말이죠.
그러니 대제사장도 모든 유대 정치 경제 사회 종교의 우두머리 격인데, 그런 유대교를 말살하려는 바울이란 자를 살려둘 수가 없는 것이었죠.
그러니 바울이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 자체가 듣기 싫어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한 것이죠.
이때 바울이 어떻게 말합니까?
본문 3절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무슨 뜻입니까?
바울은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향해 ‘회칠한 담이여’하고 비판한 것이죠.
회칠한 담이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회칠한 무덤”(마23:27)과 같다는 뜻이죠.
속은 썩어가는 송장이 들어 있는데 겉은 아무렇지도 않게 흰색 회를 칠해 놓았다는 뜻입니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이중 인격자라는 뜻이죠.
지금 대제사장이 그런 이중인격자로서 율법대로 심판하지 않고 도리어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자신의 입을 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에는 적어도 두 세 증인이 있을 때 사람의 범죄를 확정할 수 있다고 신명기 19장 15절에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런 증인도 없이 마구잡이로 바울의 입을 치라고 하니까 바울도 회칠한 담이라고 비판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율법대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대제사장을 향해 비판의 말을 할 때,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본문 4절을 보면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하고 이야기하죠.
‘너의 입을 치라고 명한 사람은 대제사장이다’하는 뜻이죠.
‘그런데도 내게 함부로 대제사장과 맞서려고 하느냐’하는 뜻입니다.
그때 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본문 5절을 다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깨달음) 바울은 자신의 입을 치라고 명령한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산헤드린 공의회가 정식으로 재판을 연 게 아니라 임시로 연 것이라 관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자신이 대제사장을 향해 비판한 것은 모르고 한 일임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한 말은 우리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게 하는 말입니다.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한 말이 그것이죠.
이 말씀은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는 출애굽기 22장 28절 말씀을 인용한 거죠.
바울은 그만큼 자신의 관리 곧 산헤드린 의회의 최고 의장인 대제사장을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자신의 죄도 묻지 않고, 두 세 증인도 없이 마구잡이로 입을 치고 모욕하며 정죄하는 대제장을 그래도 말씀에 근거해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곧 ‘내가 당신을 나의 관리 상관으로 존중하고 있으니 당신도 나를 말씀에 근거해 존중해줘야 하지 않겠소’하는 뜻이죠.
(적용)이 부분에 바울의 훌륭한 인격과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을 살리려는 깊은 뜻을 헤아리 수 있습니다.
내가 말씀의 사람인지, 내가 기도의 사람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입니까?
나를 무시하고 나를 짓밟는 사람 앞에서 내가 똑같이 입에는 입으로 눈에는 눈으로 칼에는 칼로 맞서는가, 그렇지 않는가죠?
설령 그는 나를 모욕하고 짓밟고 없는 말을 지어내면서까지 무시할지라도, 바울처럼 나는 그를 인격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갖추는 것이죠.
그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에, 기도의 중심이 있기에, 그렇게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갖는 것 말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나를 모욕하고 나를 무시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대하기보다 주님의 말씀에 근거해 그를 인격적으로 대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점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를 조롱하고 너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을 때 너는 어떤 자세로 대하며 살고 있느냐?”
“너의 부정하고 너의 인격을 짓밟는 사람이 있을 때 너는 주님의 마음으로 대하며 살고 있느냐?”
“대전에 장례식장에 함께 가고 함께 오자고 했던 그가 너의 존재 자체를 없인 여길 때 너는 그때도 주님의 자세로 대했어야 하지 않았느냐?”
“본문 속의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의 입을 치며 바울을 부정하고 인격을 짓밟을 때 바울은 도리어 그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았더냐?”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죽이려 드는 대제사장 아나나아를 향해 바울은 주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세워주고자 하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삶의 현장이나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때로는 네가 부정당하고 네 인격이 짓밟힌다고 생각될 때 그때 묵묵히 주님을 바라봤으면 좋겠구나.”
“누군가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라고 했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라고 하지 않았더냐”
“살다보면 네가 원하는 바와 달리 너를 무시하는 사람도 있고 너의 인격을 짓밟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때 본문 속의 바울을 떠올리길 바라며, 십자가 상의 예수님의 마음과 자세를 떠올리며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란다.”
(찬양)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힘이 없고 네 마음 연약할 때 능력의 주님 바라보아라
주의이름 부르는 모든 자는 힘주시고 늘 지켜주시리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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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 아나니아에 대해 바울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20년 전에는 바울도 유대교의 열혈 신봉자로서 산헤드린 의원이 되는 꿈을 안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또 안디옥교회를 섬기는 일에, 1차 2차 3차 선교여행에 집중했죠.
그러니 지난 20년 사이에 유대교의 최고 지도자가 누군인지, 바울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주후 48년부터 59년까지 대제사장으로 재임한 아나니아는 탐욕스러운 자였다고 평가합니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께 바친 십일조를 횡령했을 뿐만 아니라 폭력과 암살도 불사하던 잔인한 인간으로 평가하죠.
본문 속의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그만큼 하나님을 이용해 자기 뱃속만 챙기는 부도덕한 장사꾼이었던 것입니다.
(깨달음)살다보면 이런 사람을 우리도 만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이죠.
세상에도 백인 백색이 있듯이 교회 안에도 백인 백색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사람을 대하면 그 사람의 인격이 어떤지 우리는 환히 알 수 있죠.
그렇다고 지난 세월 동안 살아온 그 사람의 인격과 태도가 한 순간 변화될 수가 없죠.
중요한 것은 그를 변화시키려고 하면 할수록 변화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바울이 변화시키고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격이죠.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아나니아가 그런 사람임을 알았다 할지라도 바울의 태도는 일관디게 나아갔는 점입니다.
오직 그를 인격적으로 대한 바울의 태도, 그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세우고자 한 바울의 모습이 그것이죠.
그는 악으로 나를 대할지라도 선으로 그를 대하는 바울의 태도를 저와 여러분들이 닮아가는 것, 그걸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내음성)그러니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나를 힘들고 하고 내 인격을 짓밟는 사람을 내가 어찌 변화시킬 수 있겠어요.”
“내가 힘들고 내가 지칠지라도 더욱더 주님을 바라보고 선으로 그를 대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본문 속의 아나니아를 바울이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선으로 그를 대했고 말씀으로 세우고자 했어요.”
“저도 본문 속의 바울처럼 주님의 인격으로 대하게 하시고, 그를 위해 중보하며 말씀으로 세울 수 있게 해 주세요.”
(찬양)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힘이 없고 네 마음 연약할 때 능력의 주님 바라보아라
주의이름 부르는 모든 자는 힘주시고 늘 지켜주시리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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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에게 오른뺨을 치는 것 같이 나를 무시하고 내 인격을 짓밟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가 어떤 마음과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본문 속의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대하는 바울의 모습과 자세처럼 선으로 악을 대하고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우리 주님께서 매 맞고 침뱉음 당하고 조롱당할 때 “저들이 몰라서 저렇게 하는 거예요”하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오른뺨을 칠 때 왼뺨을 돌려대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하며 속 옷까지 내어는 저와 여러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로 인해 한 영혼이라도 주님 안에서 얻게 된다면, 주님의 말씀과 사랑 안에서 주님께서 변화시킨다면 그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그런 축복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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