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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사도행전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행22:14-23)

by 똑똑이채널 2022.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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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없애 버리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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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애굽 땅에서 40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건져내셨습니다.

그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신 것이었죠.

그들이 자유와 해방을 얻어 애굽 땅에서 나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6개월에 걸쳐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죠.

피, 개구리, 이,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그리고 장자와 모든 짐승의 초태생의 죽음이 그것이었죠.

그 일로 인해 애굽 전역은 매일 같이 고통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장자의 죽음과 모든 짐승의 초태생의 죽음 앞에서는 애굽의 파라오기 더이상 이스라엘 민족을 붙잡아 둘 수 없었죠.

 

그렇다면 그 모습을 바라본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겠습니까?

지난 400년간 노예로 고통의 삶을 살아온 그들은 그 무엇보다도 자유와 해방을 맞이했으니 얼마가 감사했겠습니까?

흔히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를 36년이라고 하는데 어떤 이는 34년 11개월이라고 하는데, 그 기간 동안의 치욕은 어떨까요?

우리말도 못쓰게 하고, 문화와 생활방식까지 다 일본제국주의에 따라 살게 하지 않았습니까?

35년이든 36년이든 그 기간도 긴긴 세월 같은데 400년간 노예로 살아왔다면 그야말로 민족혼이 모두 말살되지 않았을까요?

 

그런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와 해방을 맞았다면, 더욱이 6개월에 걸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목격했다면 어떨까요?

그때부터는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줘도 그 사람에게 평생 은혜를 갚으며 살려고 하듯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앞에서 죽는다면서 불평했고, 마라의 쓴물 앞에서도 불평했고, 시내산에는 하나님 우상을 만들었죠.

 

그 뿐입니까?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식을 체결한 이후에 그들이 율법을 좇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겠다고 맹세하고 다짐했죠.

그런데 그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10명의 정탐꾼이 온갖 불평과 악담을 늘어놓자 그 백성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았죠.

 

(깨달음)왜 그토록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목격했는데도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하고 불평한 것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에 대해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목격했어도 그들 속에 자리잡고 있는 그들의 자아가 훨씬 더 컸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 자신을 죽이지 못하면 언제라도 불쑥불쑥 자기 자아, 자기 고집이 튀어나올 수 있다는 거죠.

 

(적용)이것은 우리 자신이라고 다르지 않죠?

우리도 말씀 앞에 비추지 않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죽이지 않으면, 우리 속의 자아가 불쑥불쑥 튀어나올 수 있는 것이죠.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하면서 우리 자신을 십자가 앞에 죽이지 않으면 그렇죠.

내가 죽고 예수로 살지 않으면 우리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내 자아와 내 의를 더 내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와는 반대되는 삶을 살아야 하겠죠.

마치 12명의 정탐꾼 중에 10명의 정탐꾼이 불평하고 낙담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보고를 한 것처럼 말이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 자신을 비춘 자들이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을 죽인 자들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볼 때 자기 자신은 연약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능히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죠.

그만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 자신의 의나 자기 자아를 내세운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죽인 자들이었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바울이 자신을 조롱하고 폭행한 유대인들을 향해 히브리 말로 복음을 전했죠.

바울이 그렇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대로 그들을 배려하고 공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왜 바울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했는지 그들은 바울이 전하고자 한 복음에 대해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바로 그 사실을 바르게 일깨워주고자 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이른 나이에 예루살렘에 유학와서 율법을 배웠음을 알려줬죠.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율법에 열심있는 자로서 예수 믿는 자들을 감옥에 쳐 넣는데 앞장서서 일했다고 고백했죠.

그 날도 다메섹 도상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려고 길을 가는데, 그때 정오의 빛보다 더 밝은 빛으로 주님이 찾아오셨다고 했죠.

그때 주님께서는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하고 물으셨는데, 바울은 한 번도 주님을 박해한 적이 없었죠.

그래서 “누구십니까?”하고 물었는데,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죠.

 

물론 바울은 그때 홀로 간 게 아니라 체포조들을 동원해서 함께 그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그들도 들었지만 그 음성이 누구의 음성인지는 오직 바울만 알게 되었죠.

그때 바울은 주님의 빛에 의해 눈이 멀어서 눈은 떴으나 보지 못했고, 그 일행에 의해 다메섹 도상에 들어가게 되었죠.

그러자 주님께서 예비한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바울에게 찾아왔고, 그에게 안수하면서 “다시 보라”고 이야기해줬죠.

 

(깨달음)그때 다시 보다는 뜻은, 지난 시간에 살펴 본 것처럼, “위를 보라”는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여태 열심을 보이고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는데 압장선 것은 모두 자기 자아와 의로움에 사로잡힌 까닭이었죠.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그 열심과 자랑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위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깨달으라는 것이었죠.

여태껏 이 세상의 거짓된 그림자에 속아 이 세상의 욕망에 사로잡혀 왔다면 이제부터는 참 생명이신 주님의 실체를 바라보고 다시 태어나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도 이 땅의 것만 쳐다보지 말고 위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영생의 길을 바로 걸어갈 수 있고, 영원하신 하나님나라를 바르게 바라보며 살 수 있기 때문이죠.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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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두 가지 차원에서 자신을 조롱하고 폭행한 자기 동족 유대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합니다.

 

14-16절은 주님의 제자 아나니아가 자신을 안수한 후에 위를 바라보라고 말산 뒤에, 주님의 택하심에 대해 전한 내용이죠.

바울이 주님의 선택을 받아 구원받게 된 것은 주님의 전적인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잘 나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라는 사실이죠.

그것은 마치 400년간 애굽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한 것과 같은 이치죠.

그 민족이 잘나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수효가 작고 연약한데도 그들을 선택하신 것은 전적인 은혜였죠.

 

그만큼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울을 선택하셨는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말씀의 뜻을 깨닫게 해주셨고, 참된 의인이신 예수님을 보게 해 주셨꼬,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그렇게 하신 것은 모든 사람 앞에서 바울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증인이 되도록 하라는 뜻이었다는 거죠.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그 모든 것을 설명하고 이해시킨 다음에, 바울에게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주저 없이 아나니아에 의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죠.

바울은 훗날 세례에 데해서 “바다 아래에서 세례를 받았다”(고전10:2)고 고백하게 되는데, 예수님과 함께 애굽의 삶을 청산하고 가나안 땅을 향하는 마음가짐을 세례로 표현한 거죠.

그만큼 세례 때 이전의 율법에 갇혀 살던 삶을 주님과 함께 죽고,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며 살겠다는 표식으로 세례를 받았죠.

 

(깨달음)바울이 지금 아나니아가 자신에게 해 준 이야기를 자신을 조롱하고 폭행한 유대인드레게 전하고 있는 것이죠.

왜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증언하고 전하는 것입니까?

오직 바울이 바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전적인 선택과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걸 자기 동족 유대인들이 깨닫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전개)그리고 바울이 18-21절까지 전하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에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간 경건훈련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왔는데, 누구도 반겨주지 않는 것이었죠.

오히려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은 바울을 배교자로 여겨 바울을 죽이려드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는데 황홀한 중에 주님께서 말씀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아, 속히 예루살렘을 떠나가라. 네가 아무리 주님을 만난 걸 증언해도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속히 떠나라.”하고 말이죠.

그때 바울은 ‘제가 예전에 주님을 믿는 자들을 가두고 때리고 스데반 집사가 피를 흘릴 때 증인으로 있던 걸 다들 알텐데요.’

그래도 주님은 “어서 떠나가라. 네가 아무리 변론해도 믿지 않을 것이니 여길 떠나가라. 내가 너를 이방인에게로 보내노라.”

 

(깨달음)바울이 왜 이런 말을 자신을 조롱하고 폭행한 동족 유대인들에게 전하는 것입니까?

나도 예전에는 당신들처럼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 전에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기 전에는, 똑같았다는 거죠.

그러나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주님의 음성을 들은 뒤에는 진정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들었다는 것이죠.

 

(본문)그런데 여기까지 들은 그 유대인들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본문 22-23절까지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깨달음)바울이 전한 복음 앞에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모두 소리를 지르며 “이런 자는 세상에서 없애버리는 게 낫다”, “절대로 살려둘 자가 아니다”하고 소리치는 모습이죠.

그러면서 유대인들이 극도로 분노할 때의 관습처럼 옷을 벗어 던지고 먼지를 공중에 날리고 있는 모습이죠.

 

왜 그들이 이토록 바울이 전하는 복음 앞에 분노하면서 바울을 죽이려 드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참된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죠.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율법의 틀 안에 자신들의 의로움을 더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죠.

진정 먼지와 같은 존재가 자기 자신인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실체를 보지 못한 채 진리를 전하는 바울을 죽이려든 것이었죠.

 

(적용)그만큼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었지만 주님을 만난 적도, 주님의 말씀을 깨달은 적도, 주님의 음성을 들은 적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을 내려놓지 못한 채 자기 자아와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힌 자들이었죠.

 

마치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목격했어도 말씀 앞에 주님의 음성 앞에 자기 자신을 죽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똑같은 격이죠.

12명의 정탐꾼 중에 10명이 불평과 원망을 하자 그 모든 백성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한 것처럼 말이죠.

 

왜요? 주님의 말씀 앞에, 주님의 음성 앞에, 한 번도 자신을 죽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정으로 자신을 비춰보면 얼마나 자신이 형편없는 자인지 깨닫게 되는데 그걸 못해본 것이었죠.

그만큼 그들은 말씀 앞에 자기 자신을 죽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 바울을 조롱하고 폭행한 유대인들이, 바울이 주님을 만나 체험과 음성을 전해줘도 전혀 듣지 않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죠.

그들은 주님의 진리와 생명의 말씀보다도 오직 자기 자아로만 똘똘 뭉쳐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바울이 전한 음성을 주님의 음성으로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거죠.

그만큼 자기 자아로 똘똘 뭉쳐 있으면 주님의 말씀일 들려오지 않는 것이죠.

오히려 주님의 말씀을 기꺼이 죽여버린 그들의 모습입니다.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말씀과 음성을 듣고 깨닫도록 자아를 쳐서 주님께 복종시키 은혜를 베푸신다는 점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성령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애굽에서 400년간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한 것 아니더냐?”

“6개월에 걸쳐 10가지 재앙을 내린 걸 그 백성이 목격했고, 홍해를 건너고 반석에서 생수를 공급해준 것도 목격하지 않았겠느냐?”

더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전수받고 그 말씀대로 살겠다고 다짐한 그들 아니었더냐?”

그런데도 10명의 정탐꾼이 악담하고 불평할 때 그 모든 백성들도 돌을 모세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더냐?”

그들이 말씀 앞에 자기 자아를 죽이지 못한 까닭이지 않더냐?”

지금 바울이 전하는 복음 앞에 살기 등등하여 바울을 없애겠다고 하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 아니더냐?”

그들도 말씀 앞에 자신들을 비추거나, 주님의 음성 앞에 자기 자아를 죽이지 못한 까닭이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주님께서 바울을 택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음성을 듣게 하시고, 깨달을 주셔서 날마다 주님과 함께 죽게 하고 주님과 함께 살게 한 게 얼마나 큰 은혜더냐?”

너도 매일매일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의 말씀 앞에 너를 비춰 너의 자아를 죽이는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래야만 매일매일 하나님나라를 너의 삶에 구현할 수 있고, 천국의 삶을 이 땅에 실현할 수 있으니 말이다.”

본문 속의 유대인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말씀과 음성 앞에 자기 자아를 죽이지 않으면 헛것이지 않겠느냐?”

그러나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에 주님의 말씀과 음성 앞에 매일매일 자기 자아를 죽이며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않았더냐.”

너도 바울처럼 주님의 말씀과 음성 앞에 너를 죽이고 예수로 인해 사는 훈련을 할 때 네 삶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찬양)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

 

 

야긴과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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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음성 앞에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그를 위해 자기 자아를 십자가 앞에, 주님의 음성 앞에 복종시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 수 있죠.

 

하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했어도 말씀 앞에 자기 자아를 죽이지 못한 광야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것은 본문 속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죠.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것 같아도 말씀 앞에 주님의 음성 앞에 자기 자아를 쳐서 복종시키지 않으면 헛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매일매일 “나는 죽노라”고백하면서 주님의 말씀앞에 주님의 음성 앞에 주님의 십자가 앞에 자기 자아를 죽이며 살았습니다.

그로 인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도 본문 속의 유대인들이 아니라 바울처럼 주님앞에 날마다 죽노라 고백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 놀라운 은총의 역사를 친히 베풀어주시는 축복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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