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요설교WednesdaySermon/사도행전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행21:37-40)_사도행전21장 설교말씀

by 똑똑이채널 2022. 6. 29.
728x90
반응형
SMALL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hwp
0.16MB

(설교열기)(성화) 예수님은 만인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셨고 그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던 날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전날부터 한 밤중에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고, 그 후에 대제사장이 보낸 군사들에게 체포당하셨죠.

그때부터 5번에 걸친 법정에 질질 끌려다니면서 심문을 받고, 조롱을 받고, 놀림을 받으셨죠.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법정인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 사형 선고를 받으셨죠.

 

그리고 날이 새자 육중에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셨죠.

중간에 너무 기진맥진해서 쓰러지자 구레네 시몬에게 그 십자가를 짊어지게 했죠.

이제 9시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양발과 양 손에 대못이 박혔고, 그때부터 오후 3시 무렵에 숨을 거두셨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당할 때 로마 군사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유대인들도 조롱하고 무시하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십자가 좌편과 우편에 매달려 함께 죽던 강도 두 사람도 처음엔 둘다 조롱했죠.

하지만 그 많은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독 몇 몇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태도와 말씀 때문에 변화되었죠.

그 누구보다도 로마 백부장은 예수님의 그 모습을 보고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27:54)하고 고백을 하죠.

또 오른편 강도도 처음과 달리 시간이 흐르면서 “주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기억해 주소서”(눅23:42)하고 변화되었습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며 조롱하고 무시했지만 그 속에서 주님께서 보이신 모습과 말씀으로 변화된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 말이죠.

 

(적용)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누군가 똑같은 말을 할 때 그 말이 누군가의 심령에 꽂히면 그 삶에 도전이 생기고 변화가 일어나는 이치죠.

그것은 주님의 구원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똑같은 복음을 들어도 주님의 은혜가 임하는 영혼에게 새로운 결단과 변화가 일어나는 이치입니다.

 

그만큼 동일한 말을 들어도 누군가의 심령은 분명코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히4:12)시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기에 누군가의 심령에 역사가 일어나면 그 심령과 그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전자책] 야긴과 보아스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BR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BR 이 책에는 사무엘서와 열

www.aladin.co.kr

(역배)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 의장과 장로들의 견해를 따라 나실인 정결례를 향한 4명의 사람과 함께 했죠.

바울이 그 일에도 자유함이 있었지만 그들과 함께 한 것은 자기 자유를 제한하면서까지 한 영혼이라도 얻고자 함이었죠.

 

그런데 그 마지막 날이 되어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알아보고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죠.

바울이란 자가 모세의 율법을 무시했고, 이방인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드나들었다면서 말이죠.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죠.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무시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오히려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해 전도대열에 합류케 했고, 이방인의 뜰만 밟을 뿐이었죠.

그런데도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이전에 3차 전도여행때부터 바울을 겨누고 있었는데, 이 때다 싶어 바울을 향해 돌진했죠.

그러자 그곳에 있던 유대인들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바울을 때리기 시작했고 성전에서 결박해 질질 끌고 갔죠.

그때 성전에서 수종들던 레위인들은 아무런 제제도 없이 그저 문만 쾅 닫는 것으로 자기 할 도리를 다했고 생각했죠.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울을 폭행하는 사건을 안토니아 요새에서 목격한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 백부장들과 군사를 동원해 그곳으로 내려갔죠.

당시 로마의 주둔군이 머물던 안토니아 요새는 성전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 건물 아래의 계단이 성전으로 연결돼 있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천부장 루시아가 군사들을 동원해 그곳에 나타났을 때 많은 유대인들은 바울 때리기를 그쳤죠.

 

그때 그 천부장 루시아는 바울을 당장 쇠사슬로 체포하도록 했죠.

왜냐하면 본문 38절 말씀처럼 바울이란 자가 이전에 자객 4천 명을 거느리고 역모를 꾸민 애굽인 줄 알았기 때문이죠.

그가 역모를 꾸밀 때 많은 유대인들도 로마로부터 해방을 시켜줄 자라며 돈을 대고 함께 대의를 꿈꿨겠죠.

그런데 그 자가 4천명을 거느리고 어디론가 숨어버렸을 때 그 허탈감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에게 뒷돈을 댄 유대인들, 그에게 자기 자식을 내어맡기며 해방을 꿈꾼 유대인들이 얼마나 이를 갈겠습니까?

천부장 루시아는 바로 그 애굽인 줄 생각하고 바울을 결박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 바울을 결박해서 안토니아 요새로 데리고 가려는데 그곳에 있던 유대인들은 바울을 향해 더욱 때리고 폭행을 가했죠.

그때 바울은 쓰러져버렸고, 그러자 군인들이 바울을 들어서 층계 계단으로 올라가는 상황이었죠.

 

(깨달음)여기까지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인간의 시선으로만 생각하면 바울은 이제 안토니아 요새에 꽁꽁 갇혀버린 것 아닙니까?

오직 복음을 위해 1,2,3차 전도여행을 다녀왔고, 또 나실인 정결례를 행하는 이들을 얻고자 그들과 함께 했는데, 지금 돌아온 것은 쇠사슬에 꽁꽁 갇힌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보면,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어떤 모습이라고 했습니까?

바울 앞에 나타난 루시아 천부장은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으로서 유대인들로부터 구해내기 위한 하나님의 대리자였죠.

만약 그때 천부장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바울은 유대인들에 의해 돌팔매질로 죽임당했겠죠.

하지만 그 천부장이 나타나 쇠살로 결박하여 그들에게서 떼어냈으니 그때의 쇠사슬은 오히려 은혜의 쇠사슬이란 사실이죠.

 

그만큼 우리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세상의 시선으로만 볼 게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는 게 중요하다고 했죠.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인데,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21:37-40)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말씀 같습니까?

유대인들의 폭행에 의해 쓰러진 바울을 들어서 안토니아 요새로 데리고 가는데, 그때 바울이 천부장에게 말한 것이죠.

“네가 당신에게 말을 할 수 있겠느냐?”하고 말이죠.

그러자 그 천부장이 뭐라고 말합니까?

“네가 헬라말을 하느냐?”한 것이죠.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렸지만 천부장 루시아는 바울이란 자가 4천명의 자객을 동원해 로마를 전복시키려는 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깜짝 놀란 것이죠.

더욱이 바울이 고급 헬라 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더더욱 놀란 것이었고요.

 

그러자 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유대인인데 소읍 곧 작은 마을 출신이 아니라 대도시 길리기아 다소의 시민이다”하고 말하죠.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출신과 배경과 가문을 중시하고 높이하던 때라 바울이 그것을 이용해서 지금 말하고자 한 거죠.

그러면서 바울이 뭘하고 천부장에게 말합니까?

“그러니 내가 지금 이곳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말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하고 부탁한 것이죠.

그때 천부장은 애굽인도 아니고 자객 4천명을 거느린 이도 아니고, 유대인으로서 같은 유대인들에게 말하겠다고 하니까 허락죠.

 

그러자 바울은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 심지어 자기 자신을 때리고 폭행을 가한 이들 앞에서, 히브리 말로 말을 하기 시작한 거죠.

 

(적용)왜 바울이 자신을 때리고 폭행을 가한 그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조롱하고 무시하고 죽이려한 그 유대인들에게 히브리 말로 시작한 걸까요?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대못이 박히시고, 매질을 당하고 침뱉음과 조롱을 당할때도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고자 사랑을 보여주신 것과 같은 이치죠.

바울이 자신을 조롱하고 침뱉고 구타한 그들을 향해 히브리말로 말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죠.

그 내용은 다음 시간에 살펴보면 될 것이고, 오늘 본문은 바울이 보여준 그 태도와 말에 있는 것이죠.

그들이 오른 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면서까지 그들을 구원하고자 말입니다.

설령 그들 모두가 바울의 말을 듣고 감동감화를 받지 않을지라도 한 영혼이라도 구원받는다면 기꺼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한 것이었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7마디를 외칠 때 그를 통해 백부장과 오른편 강도가 변화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비록 자신을 폭행하고 죽이려 했던 그 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님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한 것이죠.

더욱이 히브리 말로 말한 이유는 같은 동족으로서 어떻게 하면 한 영혼이라도 주님 안에서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한 것이었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복음 안에서 고통당해도 한 영혼이라도 품을 수 있다면 기꺼이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생명의 말을 전하게 한다는 거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수 많은 군중들 앞에서 어떤 태도와 어떤 말을 했는지 알고 있지 않느냐?”

자신을 조롱하고 침밷고 모욕을 주고 옆구리에 창을 찌른 로마 군사들과 유대군중들에게 사랑의 말 생명의 말을 하지 않았더냐?”

지금 죽어가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할 때 누가 과연 그 말을 듣고 생명을 얻을 수 있겠느냐?”

대다수의 군중들은 무시해버렸을지 모르지만 백부장과 오른 편 강도 또 몇 몇 사람들은 생명을 얻고 변화되지 않았더냐?”

지금 바울도 자신을 조롱하고 침뱉고 폭행한 유대 군중들 앞에서 생명의 말 복음의 말을 하고자 히브리 말로 전한 것 아니더냐?”

그들 중에 주님께서 택하신 자는 기필코 생명의 말을 듣고 변화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평소 남에게 하는 말을 잘 헤아려보길 바란다.”

심지어 너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너에게 모욕감을 주는 이들이 있을 때 너는 어떤 태도와 어떤 말을 하는지 말이다.”

네가 복음 안에서 행하고 복음의 삶을 사는데도 너를 모욕하고 너를 무시하고 조롱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때도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행동하고 말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주님께서도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며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을 내주라고 했듯이 말이다.”

너의 태도와 너의 말이 누군가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복음 안에서 네가 하는 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말이라는 것을 네가 기억했으면 좋겠구나.”

 

(찬양)주님 예수 나의 동산 내 맘속에 동녘 하늘

아침햇살 가득 안고 활짝 피는 백합 같아

그 안에서 이 생명도 피어나는 꽃 되리라

오 하나님 이 꽃 바쳐 주의 재단 밝히리니

은혜로운 사랑으로 하늘 평안 내리소서

 

주님 예수 나의 동산 내 맘속에 동녘 하늘

아침햇살 가득 안고 자라나는 나무 같아

그 안에서 이 생명도 귀한 재목 되겠어요

오 하나님 이 재목 바쳐 주의 재단 쌓으리니

은혜로운 사랑으로 하늘 평안 내리소서

 

 

[전자책]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BR 그 속에서 페르시아의

www.aladin.co.kr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는 하루 동안에 무수한 말들이 생겨나고 무수한 말들이 죽어갑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복음의 말들은 생명을 살리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살아 있는 말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하신 말들을 통해 백부장과 오른편 강도가 생명을 얻고 변화되었듯이 말이죠.

바울을 때리고 죽이려던 그 유대인들 앞에서 바울이 히브리말로 동족을 살리고자 한 그 말을 통해서 누군가는 생명을 얻었듯이 말이죠.

 

그러니 내가 복음 안에서 괴로움을 당할때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생명을 살리는 말임을 기억할수 있길 바랍니다.

그때 성령님께서는 내가 복음 안에서 하는 말들을 통해 누군가는 지옥에서 새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실 테니 말입니다.

나의 말 자체는 힘도 능력도 없지만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살리게 하시고 풍성케 하시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런 은총의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