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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사도행전

문들이 곧 닫히더라(행21:27-30)

by 똑똑이채널 2022.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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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 예루살렘 성전은 다윗이 모든 것을 준비했고 솔로몬의 시대에 건축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이동식 성막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이후부터는 모든 백성들이 성전중심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문제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하나님 중심보다 자기 중심적인 모습으로 변질되기 시작한 점이었죠.

그러니 일반 백성들도 성전에 나와 제사를 드리지만 그 중심이 온통 자기 이로움만 추구하는데 급급한 모습이었습니다.

성전 안에서 제사를 드리며 참회하는 모습은 성전 안에서만 끝날 뿐 성전 밖에서는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었죠.

 

그래서 구약의 예레미야 선지자는 뭐라고 외쳤습니까?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7:4)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한 성전이라고 나와 제사를 드리지만 그 백성들은 온통 자기 중심적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사장도 그렇고 일반 백성들도 모두 한 통속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은 예수님 시대에도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초기에 성전에 나와 장사치들과 환전상들의 상을 엎으며 내 쫓으셨겠습니까?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11:17)

성전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성전과 관계된 모든 이들이 ‘강도의 소굴’을 만들어버렸다고 탄식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런 모습이 공생애 시작 초기 뿐만 아니라 3년간 계속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9-21)

 

이때부터 예수님은 자기 육체를 성전으로 칭하셨던 것입니다.

건물로서의 성전 시대는 이제 모두 허물어졌고 예수님을 모신 몸이 참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하고 선포한 것이었죠.

 

(깨달음)오늘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 곧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당에 나와 예배하고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배당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깨달음을 세상 속에서 구별되게 지켜나가기 위함인 것이죠.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광받으시는 분이시고, 그때 비로소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거룩한 성전으로 사는 거죠.

 

(적용)문제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어도 온통 자기 이기심만 좇아사는 자들은 건물로서의 성전만 추구하는 자들이죠.

그런 자들을 통해서는 세상을 새롭게 할 수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할 수 없고 참된 성전일 수도 없다는 거죠.

 

오늘 본문은 참된 성전으로 살아가는 자의 모습과 그 반대편에서 자기 이기심만 좇는 자들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를 통해 우리가 어떤 길을 좇아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구별된 성전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이죠.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바울은 예루살렘교회의 의장 야고보와 장로들이 당부하는 부탁에 순종했습니다.

그 당부가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이 2,3차 선교여행을 다니면서 유대인의 율법을 무시하고 모세의 법을 거부한다는 소문이 예루살렘에 파다하는 것이죠.

물론 야고보와 장로들은 그 소문이 헛소문인 줄 알지만 그래도 유대인들의 오해를 불식시키는 게 낫지 않겠냐는 것이었죠.

 

그때 어떤 방침을 제시해 줍니까?

지금 나실인 서원을 한 네 명의 사람이 있다는 것이죠.

그들이 이제 만료 시점이 되었고, 7일간 정결예식을 예루살렘성전에서 하는데, 제 8일엔 머리를 깎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성전에서 그들과 함께 결례예식을 지켜봐주면서 함께 하고, 그 비용까지 내 준다면, 그 오해를 없앨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어떻게 했습니까?

“나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할례나 유대인들의 율법 의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2차 전도여행 때는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났을 때는 그에게 할례를 행케 해서 선교사역에 동참케 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들에게 맞게 복음을 전하고, 유대인들을 만나면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볼 때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율법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에 있었습니다”

“나는 주님의 은혜로 모든 것에 자유를 얻은 자입니다. 하지만 한 영혼이라도 더 얻을 수 있다면 내 자유를 제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야고보 의장과 장로들이 이야기한 바대로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4명의 사람들이 결례의식을 행하는 걸 돕겠습니다”

 

(깨달음)바울이 그들의 당부에 순종한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복음 안에서 더 많은 이들을 주님 안에서 얻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주님 안에서 구원할 수 있다면 자기 자유를 제한하여 남의 유익을 위해 내려놓겠다는 바울의 의지였죠.

 

(적용)우리도 실은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지난 시간에 살펴봤죠.

나는 모든 걸 먹고 마실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나의 행위로 인해 누군가 실족할 수 있다면 그 자유를 제한하는 것 말이죠.

그것이 바로 주님께 영광돌리는 삶이요, 참된 성전으로 살아가는 삶인 줄 믿습니다.

 

(본문)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인데, 바울이 그 일에 순종한 것으로 인해 화를 당하는 모습입니다.

본문 27-29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원해)바울은 야고보와 장로들의 의견에 따라 4명의 나실인 서약자들과 함께 그 정결례가 끝나는 7일동안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그 끝나는 시점에 예루살렘에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은 유대인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날의 터키 서부 지역인 그 당시의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에서 개종한 크리스천들이 아니라 유대교 열혈 신봉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에베소에 3년간 머물 때 바울을 지켜보던 자들이었고, 바울을 배교자로 간주해 헤칠 기회를 엿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자마자 그곳에 모인 유대인들을 충동질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말 ‘충동하다’는 ‘슈그케오’(συγχέω)는 적개심을 품게 하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한 번 두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충동질해서 바울을 ‘붙들게’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붙들다’는 ‘에피발로’(ἐπιβάλλω) 포로로 끌어가기 위해 결박하다(used of seizing one to lead him off as a prisoner)는 뜻입니다.

 

그러니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면 어떤 모습이 연출된 것인지 알 수 있죠.

바울이 4명의 나실인 서약을 한 이들과 7일간 계속 성전을 출입하며 그들 곁에서 함께 하고, 이제 끝날이 된 것입니다.

그때 에베소에서 온 열혈 유대 신봉자들이 바울을 발견하자마자 바울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소리를 치기 시작한 것이죠.

그러자 성전 안에 있던 유대인들이 바울을 단번에 결박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무슨 명목으로 바울을 죄수처럼 다루는지 이야기를 하죠.

본문 28-29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 한 가지 죄목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율법을 비방했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 죄목은 이방인과 함께 성전에 드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죠.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처럼 유대인의 율법을 존중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 29절을 보면 에베소에서 온 드로비모와 함께 시내에 있었는데, 그 사람과 함께 성전에 드나들었다고 막무가내로 고발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 구절입니다.

본문 30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깨달음)처음에는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 안에 있는 유대인들을 선동할 때 한 두명이 바울을 제압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바울을 제압한 이유를 말하자 온 성이 소동할 정도로, 온 유대인들이 난동을 피울 정도로 바울을 결박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죄수 다루듯이 바울을 결박해서 끌고 나가는 모습이죠.

 

그런데 이 때 성전이 문이 어떻게 되었다고 밝혀줍니까? 곧 닫히더라

이 말씀은 누군가 성전의 문을 닫은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성전을 관리하는 레위인들이 성전의 문을 닫았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깨닫게 하는 말씀 같습니까?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인데, 성전에서 섬기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거룩과는 무관하게 삵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오직 자신들에게 이로움이 되는지 해로움이 되는지, 그것만 따져 묻고 행동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성전 안에서 바울을 붙잡고 난동을 피웠다면 그것을 못하도록 말리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바라보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이로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끼어들어 말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적용)그렇기에 본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그들 모두가 하나님을 믿지만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죠.

한 부류는 바울과 같은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심령 속에 예수님을 모신 참된 성전의 사람으로서 나의 유익을 위하지 않고 타인의 유익을 위해 자기 자유를 제한하며 사는 사람이죠.

 

다른 부류는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건물로서의 성전만 신봉할 뿐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자기 이기심만 좇는 이들 말이죠.

바울을 결박하도록 선동한 유대인들과 무턱대고 선동당한 유대인들도 그렇고 그들을 말리거나 떼어내지 않고 성전만 지키면 그만이라는 레위인들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참된 성전으로서 나의 이기심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길에 순종하며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점이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의 음성을 통해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본문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느냐?”

바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 자유를 제한하면서 결박당하는데 너도 참된 성전으로 살 수 있겠느냐?”

그런 바울을 매도하고 정죄하여 선동질하는 유대인들도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온통 자기 이기심만 좇던 자들이지 않더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인지, 너도 먼저 분별해야 하지 않겠느냐?”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붙잡을 때 군중심리에 이끌린 이들이 다 달려들었는데, 너도 그런 군중심리에 이끌려 살지는 않는지 늘 살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바울이 주님을 본받아 하나님의 영광된 일에 순종했듯이 너도 바울을 본받아 하나님의 영광된 일이라면 순종하길 바란다.”

네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누군가를 주 안에서 구원할 수 있다면 너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참된 성전된 모습이지 않겠느냐?”

더욱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순종하다가 결박당하는 바울이 모습이 비참할지라도 하나님은 더 큰 영광을 받지 않겠느냐?”

지금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과 성전 안에 있는 유대인들과 레위 제사장들은 다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 같지만 하나님의 영광과는 무관한 자들 아니더냐?”

그러니 너는 그들과는 구별된 자들이요 참된 성전된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매사에 하나님의 영광된 길에 순종하며 살았으면 좋겠구나.”

 

(찬양)영광의 길 너 걷기전에 갈보리길 너 걸으라 내 모든 것 주께 맡긴 후 하늘 문을 바라보라

하늘가는 다른 길 없네 오직 예수 오직 한 길 갈보리길 걸어가신 주 그길 따라 너 걸으라

방황하는 영혼을 위해 십자가에 길이 있네 죄에 빠진 영혼을 위해 주님께서 피 흘렸네

못박힌 손 날개 펼치사 나로 그늘에 쉬게 하며 부드러운 사랑의 음성 날 오라 부르시네

하늘가는 다른 길 없네 다만 한 분 나의 예수 부활의 주 말씀하시네 갈보리 길 너 걸으라

고난의 길 앞서가신 주 가시관에 머리 찔렸네 그 십자가 그십자가 날마다 보네 내 모든 죄 다 씻겼네 내 모든 죄 다 씻겼네

 

 

[전자책] 야긴과 보아스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BR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BR 이 책에는 사무엘서와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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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지)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느냐 그렇지 않느냐,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칭찬받는 교회냐 그렇지 않느냐는 어떻게 나뉘겠습니까?

그 교회의 건물이 크고 성도 많으면 많을수록 주님께 사랑받고 칭찬받는 교회이겠습니까?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죠.

곧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 자신들이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주님께 사랑받는 교회,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칭찬받는 교회는 예배당의 크기나 화려함에 달려 있는 게 아니죠.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태도에 달려 있는 것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 바울처럼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을 수 있는 그 길을 좇아 살 수 있기 바랍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간다면 우리의 예배당이 아무리 작고 그 수가 적어도 주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교회요 칭창받는 교회일 것입니다.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오늘의 저와 여러분들을 성전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 몸이 성령님이거하시는 참된 성전입니다.

 

그 성전된 몸으로 나의 유익이나 나의 이로움을 좇기보다 주님의 영광을 위한 통로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인들과 레위인들처럼 건물로서의 성전만 추구하는 이들이 아니라 바울처럼 우리의 몸을 성전으로 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참된 성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것이고 주님 재림하실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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