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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사도행전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행21:20-26)

by 똑똑이채널 2022.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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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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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고린도교회에 여러 문제가 발생했죠.

파벌문제, 음행문제, 제사음식의 문제 등 말이죠.

 

그 중에 제사음식의 문제는 어떤 문제였을까요?

당시 고린도 시장에 내다파는 음식들은 거의 다 우상의 신전 앞에 갖다 바친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었죠.

 

당연히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시장에 내다파는 음식들이 아프로디테 신전에 올렸다가 내려온 것임을 알고 있었죠.

그 까닭에 그걸 먹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교회 내부에 붉어진 것이었죠.

 

그때 바울은 뭐라고 해결책을 제시했을까요?

바울은 그것은 결코 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먹으므로 인해서 누군가 실족하게 된다면 먹지 않겠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이 술과 담배를 먹고 피는 게 죄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술과 담배를 하는 모습을 누군가 보고 그 일로 실족하게 된다면 하지 않는 것도 미덕이 될 수 있다는 뜻이죠.

저도 군대에서 훈련병 시절을 마치고 배가 너무나 더부룩해서 맥주 한 캔을 마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게는 맥주가 소화제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죠.

 

그런데 어떻습니까?

제가 목회자가 되어서 성도님이 보는 앞에서 술을 마셨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맥주 마신 것을 죄로 여기지 않지만, 누군가를 실족시킬 수 있기에, 결코 덕이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성경은 말합니까?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1:23-33)

 

(적용)이것은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죠.

우리 자신은 이 세상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나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지만 타인의 구원과 유익을 위해 제한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자유를 누군가 구원을 얻는 통로가 되기 위해 제한한다면 그만큼 주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이죠.

 

이를테면 19세기 말에 우리나라 조상들은 복음을 영접하고서도 유교논리를 지켜왔습니다.

그시절 액을 물리치기 위해 창포를 넣어 삶을 물로 머리를 감았죠.

또 한 해 동안 부스럼을 예방한다면서 호두와 은행과 같은 부럼을 깨물어 먹는 정월 대보름의 전통을 지켰습니다.

 

그 시절 그런 우리나라 전통을 미신이라고 해서 배척한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지만 그것들을 지킨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죠.

자기 자신은 그것을 하지 않을 자유가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을 구원하고자 스스로 그것을 함께 지킨 이들도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그 모든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 그 행위의 초점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두고 더 많은 이들을 구원코자 하는 게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3차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과 그 일행이 예루살렘교회의 의장인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났죠.

그때 바울은 2차와 3차 전도여행의 코스와 함께 그 여행길에 역사하신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그 간증을 듣던 야고보 의장과 장로들은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잠깐 생각해 봤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인 입술의 고백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삶으로 구별되게 살아가는 삶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라고 했죠.

 

주기도문도 마찬가지라고 했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이 여김을 받으시오며”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일 거룩하게 여김받는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도, 하나님의 이름도, 우리의 삶과 직결된다고 했죠.

우리가 이 시간에 나와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받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만으로 끝나지 않고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바를 세상 속에 펼쳐나갈 때 하나님은 더더욱 영광받으신다는 사실이죠.

 

(본문) 오늘은 그 이후의 행적을 보여주는 말씀인데, 본문 20-22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깨달음) 야고보와 장로들이 말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곳 예루살렘에는 유대인 중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이들이 수만명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는 실은 율법에 다 열성을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2차와 3차 전도여행 때 곳곳을 누비면서 복음을 전하고 성령님의 역사를 일으킨 것을 모두가 알지만,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배반하고 할례를 행치 말라고 했다는 소문이 퍼져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어쩌면 좋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바울이 유대인의 율법과 관습을 배격하며 모세를 배반하는 행위를 했습니까?

아니죠.

바울은 무할례주의자였지만 디모데에게는 오히려 할례를 행해서 전도대열에 합류케 한 일이 있습니다.

 

왜 바울이 그렇게 했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율법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없는 이방인을 얻고자 한 것이죠.

또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관습을 존중하면서 그런 유대인들을 복음안에서 얻고자 한 것이죠.

 

그렇기에 율법은 두 가지 큰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과 관련된 측면이죠.

다른 하는 전통과 의식적인 측면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613가지의 율법을 만들어냈죠.

그것을 구분하자면 제사법, 도덕법, 시민법 그리고 음식법 등이죠.

제사법은 구약의 5가지 제사를 말하는 것이죠.

도덕법은 십계명과 같은 법이고, 시민법은 일상의 생활법과 같은 격이고, 음식법은 먹는 것과 관련된 법입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서 율법이라고 하지만, 제사법이나 십계명만 해도 그것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죠.

대체 이 세상에 어떤 유대인이 그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서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그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여긴채 강조해 왔었죠.

 

하지만 그 어떤 인간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제물삼아 구원해주신 것 아닙니까?

바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제사법으로부터 자유케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죠.

그 제사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벽하게 대체되었기 때문에 음식법도 주님 안에서 자유케 된 것이죠.

물론 십계명과 같은 도덕법이나 시민법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에서 서로가 지켜가야 할 조항들이죠.

그러나 그 역시 완벽하게 지킬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지키는 게 아니라 유대인의 관습처럼 지켜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있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19세기 우리나라 조상들이 주님을 영접했어도 유교사상과 관습을 어느 정도 지켜왔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도 그래서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행해 전도대열에 합류케 한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할례를 강조하는데 구원의 측면이 아니라 관습의 측면에서 뭔가 연결 끈이 필요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만큼 율법은 구원의 조건 차원에서 시행한 게 아니라 유대인들의 전통 의식을 존중하는 측면에서 시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이 전도한 곳곳에서 유대인들의 율법을 무시했고 모세를 배척하며 살아왔다는 소문이 팽배하다는 것입니다.

 

(본문2)그래서 어떤 해결책을 제시합니까?

본문 23-26절 말씀이 바로 그 해결책이고 바울은 그대로 이행하게 되죠.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깨달음) 야고보 의장과 장로들이 제시한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유대인 가운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을 행한 나실인 서원을 한 사람이 네 명이 있다는 것이죠.

그 서원기간이 끝나는 시점이 되면, 민수기 6장 13-15절에 따르면, 7일 동안 정결예식을 행해야 하는 관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관례를 행하기 위해서는 제물도 바쳐야 하고, 그에 따른 경비도 필요한 것이죠.

 

야고보 의장과 예루살렘교화의 장로들은 바울에게 그걸 당부한 것이죠.

‘지금 네가 오해를 받고 있으니, 그 네 명과 함께 성전에 머물면서 결례를 행하고 비용도 모두 지불하라’하고 말이죠.

그렇게 하면 유대인들 사이에 퍼져 있는 오해도 다 사라지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죠.

 

이때 바울이 어떻게 합니까?

본문 26절의 말씀처럼 바울은 야고보 의장과 예루살렘교회이 장로들이 제시한 방책을 그대로 따라 지켰다는 점이죠.

 

 

[전자책]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BR 그 속에서 페르시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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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용) 그렇다면 바울이 왜 이렇게 한 것입니까?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목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바울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나는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마치는 일에 내 생명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내게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위해 나는 간다”하고 말했죠.

 

그렇다면 평소 구원의 조건으로 할례 같은 것은 받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한 바울은 그런 결례를 안 지켜도 되는 것 아닙니까?

그냥 자기 소신대로 “나는 네 명의 유대인들이 결례를 행하는 것도 봐 줄 수 없고 그 비용도 댈 수 없습니다.”하고 맞서 나가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바울이 야고보 의장과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이 조언한 유대인들의 관습과 전통을 따르고자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9:19-23)

 

바울은 그만큼 유대인의 율법을 무시하거나 적대시한 게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면 그것으로 구원받기에 충분하지만, 유대인의 결례를 전통처럼 여기는 영혼들을 품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할례와 각종 결례를 지키는 게 구원과 무관하기에 그것을 지키지 않아도 될 자유가 있었죠.

히자만 그 할례와 결례 의식을 따름으로 한 영혼이라도 실족치 않는다면 자기 자유를 제한하며 따르겠다는 것이죠.

 

그 이유는 오직 하나죠.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한 한 영혼을 주님 안에서 품고자 한 게 그것입니다.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를 구원얻는데 제한하며 타인을 구원하는 통로로 사용하길 원하시는 은혜를 베푼다는 점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도 사도 바울처럼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누군가 실족하는 것 때문에 네 자유를 포기할 수 있겠느냐?”

무할례자인 바울이 할례나 결례를 지키지 않아도 될 자유가 있었지만 관습처럼 결례를 지키는 유대인들을 얻고자 자유를 제한하지 않았더냐?”

바울도 루스드라에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행해 같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한 것처럼 말이다.”

지금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결례를 바울이 직접 참여하고 지킨 것도 같은 유대인들을 주님 안에서 얻고자 함이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와 권한이 있지만 그 자유와 권한을 누군가 실족한다면 그것을 제한하는 게 은혜이지 않겠느냐?”

너도 술도 할 수 있고 담배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고 그것이 죄가 아니지만 같은 그리스도인의 실족함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그 자유를 제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 네 삶의 모든 초점을 너에게 두기 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인의 유익에 두고 살았으면 좋겠구나.”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가하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면 잘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별되게 행했으면 좋겠구나.”

 

(찬양) 영광의 길 너 걷기전에 갈보리길 너 걸으라 내 모든 것 주께 맡긴 후 하늘 문을 바라보라

하늘가는 다른 길 없네 오직 예수 오직 한 길 갈보리길 걸어가신 주 그길 따라 너 걸으라

 

방황하는 영혼을 위해 십자가에 길이 있네 죄에 빠진 영혼을 위해 주님께서 피 흘렸네

못박힌 손 날개 펼치사 나로 그늘에 쉬게 하며 부드러운 사랑의 음성 날 오라 부르시네

하늘가는 다른 길 없네 다만 한 분 나의 예수 부활의 주 말씀하시네 갈보리 길 너 걸으라

 

고난의 길 앞서가신 주 가시관에 머리 찔렸네 그 십자가 그십자가 날마다 보네 내 모든 죄 다 씻겼네 내 모든죄 다 씻겼네

 

 

[전자책] 야긴과 보아스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BR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BR 이 책에는 사무엘서와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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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구약의 율법 특히 제사법이나 음식법을 지키는 것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온 마음으로 믿어 마음 속에 주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받는 것이죠.

 

그러나 유대인들 중에는 아직도 할례와 결례와 같은 전통을 따르는 이들이 있었고, 바울은 그들을 얻고자 그 결례에 동석하고 비용도 다 내줬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지키지 않아도 될 자유가 있었지만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할 수 있다면 기꺼이 자기 자유를 제한했던 바울입니다.

 

마찬가지죠.

우리 모두는 술이든 담배든 그 어떤 것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자유와 권한이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그리스도인이 실족하게 된다면 그 자유와 권한을 얼마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제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같은 자유의 제한을 통해 누군가 한 영혼이라도 주님 안에서 품고 구원얻는데 그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바로 그것이 주님께서 영광받으시는 길이요,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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