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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사도행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행21:19-20)

by 똑똑이채널 2022.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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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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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 예수님께서 잡혀가시기 전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가지셨죠.

예수님께서는 이미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날 저녁 최후의 만찬을 나눈 이후 밤기 깊었습니다.

그러자 맨 먼저 가룟 유다가 자리를 떴죠.

예수님을 대제사장 무리에게 넘겨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3장 31-32절의 새번역성경 말씀입니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렇게 하실 것이다.”(요13:31-32)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까?

가룟 유다가 밖으로 나갔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이 이제 목전에 다가왔다는 뜻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시고 채찍질 당하시고 가시관을 쓰셔서 이마에 피가 흐르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손과 발에는 대못이 박히고 옆구리는 창에 찔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지 않겠습니까?

 

그만큼 가롯 유다가 밖으로 나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가롯 유다가 만찬장을 빠져나간 그 시각이야말로 예수님께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 당신이 당하실 고통을 토로하신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초읽기에 들어간 그 순간에 무엇을 바라보신 것입니까?

당신 자신의 고통과 죽음만 내다본 것입니까?

아니죠.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실 하나님께 그 시선을 고정시킨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신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당신을 던져 하나님의 영광을 구현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당신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임을 믿고 계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으로 끝이었습니까?

아니죠.

예수님께서 그렇게 믿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시신이 된 예수님을 다시금 일으켜 세워주심으로 독생자의 영광도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적용)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하나님의 영광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우리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죠.

 

때로는 내게 손해가 나고 내가 계획한 것이 뒤틀릴 때도 있겠죠.

그런데 그런 과정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영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초읽기에 들어간 상태, 실제로 채찍에 맞고 대못이 박히는 그 고통은 하나님의 영광과 무관해보입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예수님께는 고난이요 죽음이지만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류의 대속을 이룰 수 있는 영광이 된다는 거죠.

 

우리의 삶에 아픔과 고난이 닥쳐올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영광받읏는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바울과 그 일행이 가이사랴에서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죠.

예루살렘교회에 도착하자마자 바울과 그 일행이 알현한 사람은 야고보와 장로들이었죠.

 

그 야고보는 지난 시간 살펴본 것처럼 야고보 사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였습니다.

예수님 살아생전에는 메시아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똘마니를 데리고 다니면서 골목대장이나 하는 줄 알았던 야고보였죠.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야고보에게 찾아왔을 때 바로 그때부터 예수님이 구원자요 메시아요 부활의 주님임을 믿었죠.

그때부터 열심히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했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도 열심히 기도하며 초대교회 그 누구보다도 열심이었죠.

그리고는 예수님의 동생이라는 사실과 함께 당대 유대인들이 혈육을 중시하던 터라 야고보는 어느새 예루살렘교회의 최고 의장이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사도행전 15장에서 제1차 전도여행을 끝마친 바울과 바나바가 할례 문제를 가지고 예루살렘교회를 찾았을 때도 그때 제1회 예루살렘 공의회의 의장도 바로 야고보였죠.

지금은 바울이 2차와 3차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교회를 찾은 마당이니 적어도 10년 세월이 흐른 뒤임을 알 수 있죠.

중요한 것은 10년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의 의장 곧 최고 수장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써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야고보가 만약 교권에 휩싸였거나 권력에 눈먼 자였다면 예루살렘교회는 얼마든지 분열되고 말았을 것이란 사실이죠.

하지만 야고보는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언제나 자기 자신을 낮추었고 겸손히 섬김의 본을 다하였기에 그때까지도 존경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그 일행은 야고보에게 ‘들어갔다’고, 다시 말해 ‘알현하러 만나뵈러갔다’고 표현했던 것이죠.

 

(전개)오늘 본문은 그 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인데, 바울은 일행과 함께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난 뒤에 선교보고를 했습니다.

본문 19절에 나온 말씀처럼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하는 말씀이 그것이죠.

이른바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가 끝난 뒤에 바울은 2차와 3차전도 여행을 차례로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사실을 낱낱이 보고했다는 뜻입니다.

 

대체 2차와 3차 전도여행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울은 2차전도여행 직전에 1차전도여행의 파트너였던 바나바와 결별할 수밖에 없었죠.

가때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올라온 실라를 데리고 1차 전도여행지를 걸어서 올라갔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드로아 항구에서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여주셔서 에게해를 건너 유럽 대륙의 마게도냐로 이끄셨죠.

유럽 대륙은 바울이 계획한 것이나 머릿속에 생각한 곳이 전혀 아니었죠.

그때 바울은 마게도냐의 첫 성읍인 빌립보에서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 집 식구들까지 세례를 받았죠.

바울은 또 빌립보에서 귀신 들린 여종을 귀신의 손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는데 그 여종의 고용인들의 모함 때문에 매질을 당하고 투옥되기도 했죠.

그렇지만 그 감옥의 간수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의 온 가족들도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죠.

그로 인해 루디아 가족들과 간수의 가족들이 빌립보교회를 든든하게 세우는 주역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였죠.

그 이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부터 유대인들의 박해에 떠밀려 베뢰아와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에까지 다다랐죠.

그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곳에서 데살로니가전후서를 기록하여 써 보내기도 했죠.

 

그 뒤에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고대 세계의 불가사의로 불리던 아데미신전이 있는 에베소에서 3년간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죠.

그 덕분에 우상의 도시 에베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은총을 덧입었을 뿐 아니라 그 인근 지역에까지 복음이 전해졌죠.

바울은 그곳 에베소에서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전해듣고 두 차례나 방문했고 또 네 차례에 걸쳐 편지를 써보내기도 했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고린도전후서죠.

그 후에 바울은 다시금 유럽 대륙의 마게도냐로 건너가 2차전도여행 중에 복음을 전한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를 거쳐 고린도도 재방문했죠.

그때 고린도에서 3개월간 머물렀는데 로마서를 그때 써 보내기도 했죠.

 

바울은 그곳 고린도에서 3차 전도여행을 매듭짓고 이제 배를 타고 지중해를 횡단해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려고 했죠.

하지만 지중해를 횡단하는 배 위에서 바울을 살해하려는 고린도의 유대인들이 꾸민 음모를 알아차렸죠.

그래서 다시금 마게도냐를 거치는 600킬로미터의 먼길을 걸어서 돌아와야했는데 그때 빌립보에 남겨뒀던 의사출신의 누가도 다시 만나게 되었죠.

그리고 배를 타고 드로아 항구에 도착해 복음을 전하는데 난간에서 떨어진 노예 출신의 유두고를 살려내는 은혜를 덧입었죠.

 

그래서 바울이 1차 전도여행 때는 13개 도시를 지나며 2,300km를 누비는 여행길에 복음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2차 전도여행 때는 방문한 도시가 21개 도시였고, 걷거나 배를 타고 누빈 거리는 총 5,000km가 넘습니다.

제3차 전도여행 때는 24개 도시를 방문하면서 무려 6,000km를 누빈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1차전도여행 이후 2차와 3차에 걸친 약 10년간 누빈 유럽 대륙은 45개 도시를 방문한 것이고 1만11천km를 걷거나 배를 타고 다닌 것이었죠.

 

(깨달음)바울이 그렇게 여행한 곳이 자신의 안락과 쉼을 위한 여행길이었습니까?

아니죠. 때로는 매질을 당하고 투옥되기도 하고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 죽음의 직전까지 간 일도 있었죠.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다시금 소생케 하는 힘을 주셨던 것이죠.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베풀어주셨던 것이죠.

 

(본문)바로 그와 같은 주님의 역사를 바울은 야고보와 장로들에게 ‘낱낱이 보고’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때 야고보와 그 장로들이 보인 반응을 오늘 본문 20절 상반절에 이렇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원해) 여기에서 ‘영광’이란 헬라어로 ‘독사조’(δοξάζω)입니다.

그 뜻은 ‘생각하다’(to think), ‘찬양하다’(to praise), ‘영화롭게 하다’(to honour)입니다.

 

그렇다고 말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뜻이 아니라 최상의 가치 곧 나의 삶으로 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 중에 나의 삶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을 하는 것은 내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으로 받으시는 것이죠.

 

(깨달음)오늘 본문의 말씀도 바로 그런 이치입니다.

바울이 2차와 3차 전도여행을 통해 약 10년간 45개 도시를 방문했고 걷거나 배를 타고 다닌 거리가 1만11천km나 되었죠.

그 과정 중에 바울이 매를 맞고 감옥에 투옥되고 모욕을 받기도 했지만 성령의 역사를 통해 복음이 더 깊게 더 널리 전파되었죠.

 

바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야고보와 장로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바울의 삶을 하나님께 드릴 때 그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신 것이란 의미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도 기꺼이 영광받으시길 원하시는 주님이란 사실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시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나는 너의 삶을 통해 영광을 받길 원한다는 사실을 너는 알고 있느냐?”

때로는 너의 아픔과 고통을 통해서 주님께서 영광받는다는 것 말이다.”

바울도 2차와 3차 전도여행을 통해 약 10년간 45개 도시를 방문했고 걷거나 배를 타고 다닌 거리가 111km를 다니지 않았더냐?”

그 선교여행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신 것이 놀라운 기적과 이적이 나타날 때만 그런 것은 아니지 않았느냐?”

때론 모욕을 당하고 빌립보감옥에 투옥되기도 했고, 데살로니가에서는 유대인들에게 쫓겨다녔고,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 죽는 그 직전까지 가지 않았더냐?”

바울에겐 그 일이 고통이요 죽음과도 같은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바울의 삶을 통해 영광받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에게 바울과 같은 고통과 괴로움이 닥쳐올 때 그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봤으면 좋겠구나.”

네게 뭔가 틀어지고 막히고 답답한 상황이 가로막고 있을 때 그때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도록 하려무나.”

때로 하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주일을 지키는 것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괴로운 일이 쌓일 때도 주님은 너의 삶을 통해 영광을 받지 않겠느냐?”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주의 율례를 배우나이다.”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라.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

생각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다가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8:18)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려고 밖으로 나가는 그때가 예수님은 가장 괴로웠지만 그때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실 때라고 선포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침밷음 받고 가시면류관쓰고 대못이 박히고 옆구리에 창이 찔리는 고통의 그 순간이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는 순간인 것처럼 말이다.”

바울에게 모욕스럽고 치욕스런 그 일이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셨던 것처럼 너에게도 닥쳐온 모욕과 치욕스런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좋겠구나.”

 

(찬양)영광의 길 너 걷기전에 갈보리길 너 걸으라 내 모든 것 주께 맡긴 후 하늘 문을 바라보라

하늘가는 다른 길 없네 오직 예수 오직 한 길 갈보리길 걸어가신 주 그길 따라 너 걸으라

방황하는 영혼을 위해 십자가에 길이 있네 죄에 빠진 영혼을 위해 주님께서 피 흘렸네

못박힌 손 날개 펼치사 나로 그늘에 쉬게 하며 부드러운 사랑의 음성 날 오라 부르시네

하늘가는 다른 길 없네 다만 한 분 나의 예수 부활의 주 말씀하시네 갈보리 길 너 걸으라

고난의 길 앞서가신 주 가시관에 머리 찔렸네 그 십자가 그십자가 날마다 보네 내 모든 죄 다 씻겼네 내 모든죄 다 씻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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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야긴과 보아스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BR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BR 이 책에는 사무엘서와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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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우리는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칠 때가 많습니다.

주기도문의 첫머리가 어떻게 시작됩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죠.

 

그만큼 우리는 주님의기도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도하곤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매일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고 소리로 외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는 데 달려 있는 것이죠.

거룩한 삶이란 세상과 분리된 삶을 말하는 게 아니라 구별된 삶을 말하는 것이죠.

 

세상 속에서 구원받은 자녀로 불러내주신 그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자녀처럼 구별되게 살아가는 삶 말입니다.

마치 애굽에서 건져내 주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 은혜를 기억하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때 가나안 원주민들과는 다른 구별된 삶을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거룩히 여김받는 삶이 되는 것이죠.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하는 것도 똑같은 이치죠.

빈말로 끝나 버릴 습관적인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내 삶으로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는 삶이 되는 게 그것이죠.

 

(예화)경상북도 안동에 김수만 장로님이라고 하는 분이 계셨다고 합니다.

김 장로님은 안동에서 개척교회만 12교회를 세운 분이시고요.

 

그런데 이분은 다리가 하나 없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요즘 같은 의족도 없던 시대라 ‘목발’을 그냥 붙잡고 다니셨던 것이죠.

하지만 교회 생활과 전도 활동을 얼마나 잘하셨고 많이 하셨는지 높은 산꼭대기에도 기어이 올라가서 전도했다고 하죠.

그래서 교회를 12개나 세운 분이셨습니다.

 

하루는 동네 아이들이 그 장로님을 놀려주고자 새끼줄을 걸어놨다고 합니다.

그 새끼줄에 그 장로님이 걸려 넘어지길 바랐던 것이었죠.

그런데 정말로 그 장로님이 한 쪽발에 걸려넘어져서 그냥 나가떨어져 떼굴떼굴 굴렀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목발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죠.

 

그런데 그 장로님이 일어나서 하는 소리가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감사합니다. 오늘 저를 넘어뜨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분들 다 예수 믿어 장로 되게 해 주옵소서”

그런데 그분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이라고 해 주셨듯이 훗날 그 아이들이 다 교회 장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어떻습니까?
우리는 두 발이 있어서 기쁨을 못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장로님이 두 발이 있어서 기쁜 게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며 살았던 분입니다.\

그 분은 재산이 많아서 기뻐하며 산 게 아니라 가난해도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며 전도하며 사셨던 것이죠.

 

자신의 한쪽 다리가 없어 불편할지라도, 그래서 넘어지는 아픔을 겪더라도, 그 십자가가 오히려 부활의 은혜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 장로님에게 아픔을 준 그 아이들이 도리어 주님을 믿는 은혜를 덧입고 장로들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십자가의 아픔과 고통을 통해 부활의 영광을 받으시는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찬양)영광의 길 너 걷기전에 갈보리길 너 걸으라 내 모든 것 주께 맡긴 후 하늘 문을 바라보라

하늘가는 다른 길 없네 오직 예수 오직 한 길 갈보리길 걸어가신 주 그길 따라 너 걸으라

방황하는 영혼을 위해 십자가에 길이 있네 죄에 빠진 영혼을 위해 주님께서 피 흘렸네

못박힌 손 날개 펼치사 나로 그늘에 쉬게 하며 부드러운 사랑의 음성 날 오라 부르시네

하늘가는 다른 길 없네 다만 한 분 나의 예수 부활의 주 말씀하시네 갈보리 길 너 걸으라

고난의 길 앞서가신 주 가시관에 머리 찔렸네 그 십자가 그십자가 날마다 보네 내 모든 죄 다 씻겼네 내 모든죄 다 씻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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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BR 그 속에서 페르시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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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2차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10년만에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나 선교보고를 할 때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죠.

바울의 능력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행하셨기 때문이죠.

다만 바울은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고 병든 자를 고치고 기적을 행한 주역이 아니라 때론 모욕과 수치와 감옥과 돌에맞아 죽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아픔과 수치와 모욕과 고통이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는 것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가 그 밤에 나가는 게 고통스러운 일이요 십자가에 모욕과 대못이 박히는 게 죽음이지만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신다는 것을 아신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 때문에 모욕도 받고 수치와 고통을 받는다면 오히려 그때가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는 것임을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주님 때문에, 주일을 지키는 것 때문에, 아픔과 손해를 본다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는 더 큰 영광이 되기 때문에 말입니다.

바울이 그런 고통을 감내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주님께서는 더 놀라운 복을 부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수치와 수모와 죽음의 고통을 감내할 때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영광으로 드높여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런 은혜의 영광을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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