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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논지)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모시고 기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데도 모함과 환란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인생 자체가 시험의 연속이고 사탄의 세력들도 신실하게 믿는 자들을 폭풍으로 몰아넣고자 하기 때문이죠.
그때 과연 어떤 마음과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
내가 악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계속 시험과 고난이 겹친다면, 그 속에서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성화)우리가 아는 다윗은 15살 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자라”,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택하심의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응당 이듬해든지 1-2년 뒤에 왕으로 등극하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골리앗을 쓰러트린 이후에 어떻게 됩니까?
다윗은 점차 곤란한 상황으로, 더 엄청난 폭풍에 휘말리게 되죠.
다윗은 그때 사울 왕이 원하는 대로 블레셋 군대를 죽이고 사울의 딸 미갈과 결혼을 했죠.
그러나 백성들이 다윗을 창화하고 자신보다 다윗을 더 드높이자 다윗을 죽여 없애겠다고 생각해 자객을 보내 죽이도록 했죠.
그 사실을 알게 된 다윗은 그때부터 도피행각을 벌어야 했습니다.
총 8년 넘는 도피생각이었습니다.
최초 놉--아둘람동굴-블레셋 가드- 증조할머니 롯의 고향 모압- 유대 광야 헤렛수풀 그일라-십광야-마온광야-사해바다 해변가 엔게디동굴-유대 최남단 바란광야 그리고 십광야 황무지 등을 도망쳐 다녔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4년 동안이었습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의 치외법권 지역인 블레셋의 시글락에 들어가 3년 4개월간 도피행각을 벌였습니다.
그곳 시글락은 이스라엘 땅이 아니라 블레셋의 가드 왕 아래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지역이었죠.
그때 다윗은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투를 벌일 때 참전하겠다고 했지만 블레셋의 장수들이 안된다고 했죠.
만약 다윗이 전투에 나갔다가 마음이 변심해 블레셋을 칠 수도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깨달음)사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블레셋의 장군들이 다윗을 견제하기 위해서 그 전투에 참전하지 말도록 한 것 말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믿음의 눈으로 보면 다윗을 그 전투에 참전하지 말돌고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 블레셋의 장수로 다윗이 출전했다면 어쩌면 이스라엘 군사의 화살이나 창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다는 것 말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생명을 당신의 생명싸개로 보호하시고자 그 전투에 참여치 않도록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적용)이것은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의지하며 선을 행하는데도 때로 어려움과 고난을 겪게 하실 때가 있다는 거죠.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고자 하는데 더욱 막혀버리는 듯한 일을 겪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 눈으로만 보면 더욱 답답하고 괴롭기 그기 없지만 하나님의 시선을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이요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하게 하기 위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역배)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교회에 왔죠.
그때 예수님의 동생이자 예루살렘교회의 의장인 야고보와 그곳의 장로들에게 여태껏 선교현장에 일어난 일들을 간증했죠.
그러자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울 사도에게 당부한 게 있었죠.
바울이 이방지역을 다니면서 모세의 율법을 비방하고 돌아다녔다는 소식이 예루살렘에 파다하니, 그걸 무마하라고 말이죠.
그러니 지금 나실인 규례를 지킨 4명의 사람이 있는데 그들의 정결례에 바울이 함께 참여하고 비용을 내라는 것이었죠.
그렇게 하면 바울도 유대인의 율법을 준수하는 자임을 모두가 알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야고보 의장과 장로들의 조언과 당부를 받아들이고 그렇게 준행했습니다.
사실 바울은 무할례파지만 바울이 그렇게 한 것은 한 영혼이라도 주님안에서 구원할 수 있도록 그 통로가 되기 위함이었죠.
자신은 할례나 정결례를 시행치 않아도 될 자유가 있었지만 자기 자유를 남을 위해 절제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4명의 사람과 함께 정결례를 행하며 그 비용을 대고 있는데, 그 끝날에 어떤 일이 터졌습니까?
이전의 3차 전도여행에서 만난 에베소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알아보고 곧바로 ‘저자다’하면서 난동을 피웠습니다.
‘바로 저 자가 모세의 율법을 비방하는 자요,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출입한 자다’하고 말이죠.
그러자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이 순식간에 바울을 향해 달려들었고, 죄수를 포박바듯이 바울을 꿇게 하면서 때리기 시작했죠.
그때 성전 밖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순식간에 성전 안으로 달려들어와 바울 폭행하고 죄인취급하기 시작했죠.
문제는 성전 안에서 수종들던 레위인들조차도 그 일은 자신과 상관이 없다는 듯이 바울을 끌고가는 그들의 문을 쾅 닫아버린 것이었습니다.
(깨달음)그와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가 지난 시간에 깨달은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똑같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지만 하나님의 뜻을 좇아 순종하는 자에게 더 어려움이 밀려들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똑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보다 군중심리에 이끌린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죠.
참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하나님의 뜻을 묻기보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치중하게 되면 다들 그렇게 휩쓸릴 수 있죠.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빌라도 법정에 끌려다닐 때도 똑같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 새벽녘부터 아침까지 5번에 걸친 법정에 끌려다녔죠.
대제사장 가야바의 법정,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의 법정, 빌라도 법정, 헤롯 법정 그리고 빌라도 법정 말이죠.
그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고문을 당하고 모욕을 당할 때 하나님의 뜻을 좇기보다 어떻게 했습니까?
다들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본 채, 저런 무력감으로는 이 나라를 구원할 메시아가 될 수 없다면서, 다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죠.
그들도 본문 속에서 바울을 치고 바울을 끌고 가는 유대 군중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깨어 있는 자로서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 속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오늘 본문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때리고 질질 끌고 갈 때 레위인이 문을 쾅하고 닫은 그 후의 말씀입니다.
본문 31-3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원해)유대인들이 바울을 때리고 결박해서 끌고 갈 때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퍼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요란하다’는 헬라어 ‘슁케오’(συγχέω)는 ‘함께 붓다’는 뜻입니다.
퐁수가 범람하듯이 마구 퍼붓듯이 성전 밖에 있는 사람들까지 달려들어 난동을 피우는 모습이죠.
그런데 그들의 난동이 누구에게까지 전해진 것입니까?
군대의 천부장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갔다고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과연 이 천부장은 누구일까요?
사도행전 23장 26절을 보면 그 천부장은 글라우디오 루시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로마군 수비대는 성전 북서쪽의 안토니아 요새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안토니아 요새는 성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그러니 성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감시할 수 있었던 것이죠.
더욱이 요새의 중간 계단이 성전 바깥뜰과 연결돼 있어서 성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곧장 출동할 수 있게 되었죠.
천부장 글리우디오 루시아가 백부장들과 군사를 대동해서 곧바로 성전 바깥뜰에 나타난 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바울을 치고 있던 유대인들이 천부장과 그 군사들의 등장에 놀라서 멈추게 된 것이죠.
(깨달음) 그러자 천부장 루시오가 어떻게 합니까?
바울을 잡아 쇠살로 결박하도록 하죠.
왜 그렇게 했는지는 38절 말씀처럼, 바울이란 자가 혹시 자객 4천명을 거느리고 난동을 피운 그 애굽인줄 알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바울을 결박토록 해 놓고, 바울을 때리고 난동을 피운 유대인들에게 물어본 것입니다.
‘왜 너희들은 이 자를 때리고 결박하고 난동을 피우느냐?’하고 말이죠.
그러자 그곳에 있던 유대인들은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 몇몇이서 벌인 일이라 정확한 경유를 알지 못해 이러쿵저러쿵 말했죠.
그러자 그들의 말이 일치하지 않는 걸 알게 된 천부장 루시아는 군사들에게 명령하죠.
‘저 바울이란 자를 쇠사슬로 당장 결박하고 영내로 데려가라’하고 말이죠.
그가 말한 영내란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안토이나 요새의 감옥을 말하는 것이죠.
그러자 그곳의 유대인들이 또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쇠사슬에 결박당한채 끌려가는 바울을 그곳의 유대인들이 또 폭행을 가하는 모습이죠.
그로 인해 바울은 쓰러지게 되었고, 급기야 35절을 보면 그 군사들이 바울을 들고가는 상황이죠.
그런데도 그 유대인들은 바울을 없이해야 한다고 하면서 따라가는 모습이죠.
(적용)어떻습니까?
이 상황만 놓고 보면 가장 억울한 사람이 바울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마치 다윗과 같은 모습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선을 했는데도 계속 모함받아 쫓겨나디고 급기야 이방 시글락에 들어가 꼼짝달싹 못하는 처지 말이죠.
지금 바울이 그런 꼴입니다.
3차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들처럼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들처럼 여러 모양으로 복음을 전했죠.
그런데도 지금 에베소에 온 몇 몇 유대인들의 난동과 모함으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결박당한 모습이죠.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본 천부장 루시아가 백부장들과 군인을 데리고 와서 쇠사슬로 결박하며 데리고 나가는데 또 다시 유대인들에게 폭행을 당해 쓰러지자 바울을 들고 가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때 바울이 얼마나 괴롭고 답답하겠습니까?
여태껏 하나님의 주권을 모시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살아왔는데 이런 고통과 환란의 폭풍에 휘말려야 하는 모습 말입니다.
더욱이 다윗이 시글락에 갇혀 아무런 것도 못하듯이, 바울도 로마의 천부장에게 붙잡혀 꼼짝달싹 못하는 처지 아닙니까?
(깨달음)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으로 이 장면을 바라보면 전혀 다른 깨달음을 얻게 될 수 있습니다.
나 중심으로 놓고 보면 왠지 곤욕을 치른 모습이고 로마 천부장에게 쇠사슬에 붙잡혀 꼼짝달싹못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다르다는 거죠.
만일 로마의 천부장이 군사를 동원해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성전을 모독하고 더렵혔다는 죄목을 들여 사람을 돌로 때려죽여도 무방했습니다.
그런 생각들로 바울을 결박해 돌로 쳐죽인다고 해도 누구 하나 눈 깜짝이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로마의 천부장 루시아를 통해 바울을 쇠사슬로 결박시켰고 유대인들의 사지에서 건져주신 거죠.
그리고 로마의 천부장에게 끌려가는 게 꼼짝달싹 못하는 처지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것이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단초가 된다는 점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시선을 본다면, 로마의 천부장은 바울을 경호하도록 보낸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입니다.
이후에 천부장은 바울을 죽이려는 자객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가이사랴의 총독에게 바울을 보내기 위해 밤에 보병 200명, 기병 70명, 창병 200명을 동원하게 되죠.
바울 한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로마 제국의 군사를 470명을 동원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바울이 로마에 입성하게 되는데, 그 모든 과정을 보면 천부장은 하나님께서 붙여준 경호원이요, 바울을 결박한 쇠사슬은 은혜의 쇠사슬임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주권을 따르고 선을 행할때도 뭔가 결박당하는 상황에 직면할 때 그때 은혜의 쇠사슬로 결박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의 음성으로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네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좇아 그 분의 이끄심 대로 순종하고 있느냐?”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기도요 삶이지 않겠느냐?”
“그러나 그런 삶을 살질라도 고난과 역경과 우겨쌈이 있지 않겠느냐?”
“다윗이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과 영광을 좇아 선을 행했어도 고난과 환란의 길을 겪은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시글락 지역에 들어갔을 때는 꼼짝달싹도 못하지 않았더냐?”
“지금 바울도 주님의 선한 선교여행을 다녀와 매질을 당하고 결박당하여 죽을 지경이지 않더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로마 천부장 루시아를 보내 바울을 경호하도록 했고 로마에까지 이끌도록 신변을 지켜주지 않았더냐?”
“그러니 한 눈으로 보면 바울이 불평과 원망을 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은혜의 결박이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한 눈으로만 이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또 다른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시선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네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좇아 살아도 결박과 환란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를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너를 통해 더욱 놀라운 일을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이니 말이다.”
“그러니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않으면 때가 이루매 거둘 것이니라.”
“다윗의 시글락이 꼼짝달싹 못하는 사슬과 같지만 그곳이 은혜의 사실이요 바울도 결박당한 채 로마에까지 압송되어 복음을 전했으니 그 역시 은혜의 사슬로 결박하신 것이니 말이다.”
(찬양)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난을 면케 하시니
그가 너를 지키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주관과 영광과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음성을 좇아 사는 자들을 신실하게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두 개의 눈을 주셨으니 한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또 다른 눈으로는 하나님의 시선을 갖게 하셨습니다.
다윗과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신실하게 살다가 억울한 지경에 처했고 꼼짝달싹 못하는 시글락과 쇠사슬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더 큰 섭리를 위한 길이었습니다.
다윗을 왕으로 삼기 위한 과정이요 바울을 로마로 보내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함 것 말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런 믿음의 눈, 그런 하나님의 시선을 갖고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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