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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사도행전

사울아 다시 보라(행22:1-13)

by 똑똑이채널 2022.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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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아 다시 보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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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 민수기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행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말씀이죠.

민수기 1-19장까지는 시내산에서 출발한 광야 2년간의 삶을 담고 있습니다.

민수기 20장은 광야 38년을 보내고서 이제 40년째에 접어드는 모습을 보여주죠.

그렇다면 민수기 19장과 20장 사이에 광야 38년의 삶이 빠져 있는 것이죠.

 

왜 38년의 삶을 성경 내용에서 빼 버렸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1-19장까지의 2년간의 삶도 불평과 원망으로 점철됐는데 38년도 뻔하지 않았겠습니까?

2년간의 삶도 마실 물이 없다고, 먹을 게 없다고 불평하고 원망했는데 나머지 38년도 오죽했겠냐 싶어 뺀 것이죠.

 

그런데 정말로 40년째 접어든 삶도 불평과 원망이었는지 보여주는 척도가 있습니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째 접어든 시점에 호르산을 지나 에돔 족속의 길로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에돔 족속이 그 길을 가로막고 터주지 않았죠.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또 원망하죠.

“왜 우릴 애굽에서 인도해 광야에서 죽게 하냐? 이 곳엔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고, 우린 하찮은 음식을 싫어한다.”(민21:5)

반석에서 생수를 공급해줘도, 빈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줘도, 그렇게 불평하고 원망한 그들이었습니다.

출애굽할때부터 38년을 거쳐 40년째 접어든 시점에도 좀체 변하지 않는 그 백성들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어떤 재앙을 내리셨습니까?

그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죽는 사람들이 많았죠.

그로 인해 여기저기 통곡소리가 들리고 하나님께 원망한 게 잘못된 것임을 회개하기 시작하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구리뱀을 장대에 만들어 쳐다보게 하죠.

그때 그 구리뱀을 쳐다본 자들은 ‘다시 살아났고’ 구리뱀을 쳐다보지 않는 자는 죽게 되었죠.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까?

구리뱀 자체에 신통방통 살아나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게 아니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쳐다보는 자들은 다시 살아났고, 불순종하여 쳐다보지 않는 자들은 죽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 14-15절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원은 예수님을 쳐다보는자, 곧 예수님에게 영생이 있음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가 구원받는 것이죠.

 

(적용)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자기 힘과 자기 능력만 믿고 사는 자들은 절대로 예수님을 구주로 쳐다보지 않죠.

하지만 자기 부족함과 자기 연약함을 아는 자들은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쳐다보고 예수님을 갈망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요1:12)는 것이죠.

그만큼 예수님을 생명으로 바라보는 자만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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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나실인 정결례를 행하는 이들과 함께 하고 그 비용도 내줬죠.

바울은 그 일에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있었지만 그 자유를 남을 위해 절제하며 함께 동참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의 난동으로 인해 바울은 그 자리에서 유대인들에게 둘려쌓여 폭행을 당했죠.

그러자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루시아 천부장이 군대를 공원해 바울에게 쇠고랑을 채우게 했죠.

바울이란 자가 전에 자객 4천명을 데리고 로마에 대항하려는 괴수로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바울에게 쇠고랑을 채워서 끌고 가려고 하는데 도리어 그 유대인들이 더욱 심한 폭행을 가하자 바울이 쓰러졌죠.

그때 로마 군사들이 바울을 들고 안토니아 요새로 가는데 바울은 천부장에게 허락을 받아 유대 군중들에게 히브리 말로 복음을 전했죠.

 

왜 하필 히브리 말인가?

자신을 조롱하고 폭행하고 끌고가던 그 유대 군중들이 히브리 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깨달음)그래서 주일날에도 살펴봤듯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 드리는 길은 남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삶에 있다고 했죠.

예배당에서 박수치고 손을 들고 찬양하는 모습도 거룩해보이지만 그러나 삶 속에서 배려하고 공감하는 삶이 없다면 결코 하나님께서 영광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하늘들’ 곧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곳 속에 함께 계신 주님이시죠.

들꽃 한 송이 속에서, 바닷가 모래알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여름철 뙤약볕에서 검게 그을린 얼굴로 일하는 농부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적용)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도 마태복음 25장에서 달란트 비유를 통해 그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25:40)하고 말이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25:45)하고 말씀한 이유가 그것이죠.

 

그만큼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은 온 하늘들에 계신 하나님, 이 땅에 작은 자 하나에도 하나님께 함께 하심을 바라보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작고 보잘 것 없을지라도 남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으시는 것이죠.

바울이 자신을 조롱하고 모욕을 주고 심지어 폭행을 가한 그 유대인들을 향해 히브리 말로 주님의 복음을 전한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주님의 마음가 자세로 타인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살 수 있길 바랍니다.

 

(전개)오늘 본문은 바울이 유대인들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마음과 자세로 히브리 말로 복음을 전한 내용이 나와 있죠.

본문 1-3절은 바울이 길리기아 다소에서 출생해, 이른 나이에 예루살렘에 유학 와서 율법교육을 받은 걸 이야기하죠.

본문 4-5절은 그 율법을 수학한 자답게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데 앞장선 이야기를 하죠.

본문 6-11절은 다메섹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 가는 길목에 빛되신 예수님을 만난 장면을 말합니다.

그리고 본문 12-13절은 바울이 주님을 만난 이후에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다메섹의 주님의 제자 아니니아의 안수에 의해 두 눈을 뜬 사실을 간증하는 내용이죠.

 

(깨달음)왜 바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고 핍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율법의 열심히 하나님의 의로움을 이루는 길인 줄 알고, 더하여 유대 사회의 최고의결구인 산헤드린 의원이 되는 꿈 때문이었죠.

그 때문에 예수 믿는 자들을 감옥에 쳐 넣고 죽이는데 앞장섰던 것이죠.

 

그런데 그런 바울이 다메섹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고 그 길을 갈 때 그때 주님께서 빛으로 찾아오셨죠.

그때의 빛은 정오의 태양빛보다 더 밝은 빛이었습니다.

자연계의 빛을 뛰어넘는 진리와 생명의 빛으로 바울에게 둘러 비춘 것이었습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60:19-20)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인데, 그 말씀 그대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그 빛으로 바울을 비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땅의 상대적인 태양빛은 진리와 생명의 빛이신 주님의 빛 앞에 어둠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눈을 뜨고 있는 바울일지라도 그 빛에 압도되어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진리와 생명의 빛이신 주님께 눈을 뜨지 못하면 율법을 좇아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는데 그 일들이 어둠 속에 거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죠.

하지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진리와 생명의 빛이신 주님 안에 거하면 어둠을 이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생명과 진리의 빛으로 바울을 둘러비친 주님께서 바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다메섹에 들어가면 너에게 일러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동행한 체포조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는데, 주님께서 예비한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만나게 되죠.

그때 그 아니니아른 주님의 제자가 뭐라고 말합니까?

 

(본문)본문 1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원해)여기서 ‘다시 보라’하는 말과 ‘쳐다보았다’하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 블레포’(ἀναβλέπω)로 같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아나블레포’는 합성어로 ‘아나’는 ‘다시’를 뜻하는 접두사이지만 ‘위’를 뜻하는 전치사죠.

주님께서 보낸 아나니아라는 제자는 바울에게 안수하면서 ‘위를 쳐다보라’, ‘위를 바라보라’하고 말한 것이었죠.

 

(깨달음)그렇다면 아니니아는 왜 위를 보라고 했던 것일까?

위의 누구를 보라는 의미이겠습니까?

살아계신 주님, 부활하신 주님, 생명과 진리의 주관자이신 주님을 바라보라는 뜻이죠.

 

여태껏 두 눈을 뜨고 살면서 생명과 진리의 반대편에 살아왔지만 이제는 주님 안에서 새 눈을 뜨라는 것이죠.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장대에 매달린 구리뱀을 쳐다보는 자는 살아나게 된 것과 같은 이치죠.

네 힘과 네 능력을 믿고 율법의 열심가운데 살아왔지만 이제는 진리와 생명이신 주님을 바라봐야 참 생명을 얻고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죠.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도 하늘을 바라보며 영적인 눈을 뜨고 사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 은혜를 베푸시는 거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광야에 불뱀에 물려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구리뱀을 쳐다보면 살 수 있는 은혜를 베풀지 않았더냐?”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셨지만 그 속에서도 불평과 불순종으로 죽음을 맞이한 어리석은 백성이 있지 않았더냐?”

주님께서는 바울에게도 그런 구원의 은혜를 베풀고자 위를 쳐다보도록 한 것 아니더냐?”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꿰뚫고 부활하셔서 들림받은 것처럼 인자를 쳐다보고 바라보는 자는 구원을 얻도록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주님께서 너에게 구원을 베푸신 방법도 그와 똑같지 않더냐?”

주님께서 너에게 찾아와주기 전까지, 네가 진리와 생명에 눈을 뜨기 전까지는 너도 이 세상의 것만 눈을 뜨고 산 것 말이다.”

그런 너에게 주님께서는 영생의 나라가 있음을 알게 하시려 주님께서 너에게 생명의 진리의 빛을 비춰주신 것 아니더녀?”

비록 바울처럼 태양빛보다 더 밝은 빛으로 너를 감싸진 않았을지라도 너에게 생명의 깨달음이라는 빛을 안겨주신 것 말이다.”

그러니 너도 바울처럼 앞으로 남은 인생을 오직 하나님나라를 향해 두 눈을 뜨고 사는 자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네게 힘이 있고 능력이 있을지라도 겸손하게 주님의 주권을 모시고 주님께 영광돌리는 자로 말이다.”

그것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는 것이 곧 주님께 영광돌리며 사는 길이지 않겠느냐?”

바울이 자신을 조롱하고 폭행을 가한 유대인들에게서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고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듯이 말이다.”

 

(찬양)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

 

 

야긴과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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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불평과 원망으로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의 구리뱀을 만들어 쳐다보는 자느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죄와 사망으로 죽어가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는 자는 영생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였던 바울에게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빛으로 찾아와서 만나주셨습니다.

두 눈을 떴으나 볼 수 없었던 그에게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의 안수로 다시 보게 해 주셨죠.

그때 아나니아니는 ‘다시 보라’ 곧 ‘위를 보라’고, 오직 생명과 진리이신 주님만을 바라보고 살라고 일깨워줬습니다.

 

오늘 주님 안에서 영생을 얻게 된 저와 여러분들도 이땅에 살지만 오직 주님을 바라보면서 살게 하십니다.

이 땅의 가장 작고 연약한 자들 속에도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저와 여러분들도 바울처럼 이 땅에 살아도 하늘나라를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살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가 충만하게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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