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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미국 하버드대학교 마이클 샌델 교수가 쓴 『정의가 무엇인가』(Justice)라는 책이 우리 사회에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습니다. 출간 11개월 만에 100만권이나 팔리는 밀리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정의(正義)에 대해 목말라 있다는 반증이었죠. 사람들은 정의(正義)를 쉽게 생각할 것 같으면서도 정확하게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몰라서 혼란에 빠집니다. 특히 우리나라 정치 사회가 온갖 비리에 연루돼 있을 때가 많고, 인사청문회에 나오는 후보마다 법적인 비리와 부조리에 점철된 것이 드러나죠. 반칙과 편법을 저질러도 특권을 누리면서 사는 모습들 앞에 사회정의에 대해 갈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죄의 경중, 정의의 경중을 따진다면 오십보백보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28절의 말씀을 늘 새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하나님 앞에 정의롭고 깨끗한 심령은 한 사람도 없지만,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연약한 자들을 당신의 품으로 품으신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세상의 악한 자들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심성과 삶을 다시금 비춰보며, 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의 비결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37편은 이 세상에는 악인과 의인이 공존하면서 어지러운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정의를 저버린 악인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반대로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해야 할 의인의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시편 37편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지은 시입니다. 시를, 알파벳 순서라는 정형화된 틀 안에서 전개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히브리어 알파벳 첫 글자 ‘알렢’부터 마지막 글자인 ‘타브’까지 그 순서에 따라 시를 써내려간 이유는 무엇보다도 교육을 위함입니다. 그 중에서도 의인과 악인의 삶을 대조해 주는 것입니다. 시편 37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며, 의인의 길을 선택하라고 가르칩니다. 본문에 따르면,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 사람입니다. 21절에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또 의인의 입은 지혜로우며, 그 혀는 정의를 말한다고 고백합니다. 30절에 “의인의 입은 지혜로우며 그의 혀는 정의를 말하며.” 그리고 31절에서는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것이 곧 의인 곧 정의로운 길을 추구하는 자들의 마음과 행동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어떠한 자들입니까? 악인은 꾸었지만 갚지 아니하는 자들이고, 정의를 말하지만 정의의 법 곧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고 그렇게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는 자들을 살해하려고 기회를 엿보는 자들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14절에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그리고 21절 상반절에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또 32절에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하고 밝혀줍니다. 그만큼 악인들은 정직하고 정의롭게 사는 자들을 힘들게 하고, 오히려 그런 자들에게 꾸고 갚지 아니하고, 그리고 그런 의인들을 죽이려고 엿본다는 것입니다.
어제도 말씀을 드렸지만, 시편 37편은 노년의 다윗이 자기 인생을 반추하면서 젊은 사람들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권면하는 것 같은 내용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연장 선상에서 생각해 볼 때, 이 시편 37편의 내용을 익숙하게 들어온 아이들이 청년이 되었다면, 어떤 질문을 제기하겠습니까?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배우기를,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있고, 그 중에 의인의 길을 선택하라고 배웠는데, 이제 청년이 되고 사회인이 되어 세상을 마주하게 되면, 의인으로 살려고 하는데, 어려운 점들이 한 두 가지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않겠습니까? 세상은 힘이 있는 자들에 의해 돌아가고, 또 그들이 불의를 행하는데 그 밑에서 배워가는 청년의 입장에서 과연 그 구조와 사회의 단면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하는지, 현실의 높은 벽 때문에 좌절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는 점입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지만, 광주에 있는 교회에서 중고등부 학생들을 지도했는데, 그 교회 중학생이 커서 군 장교로 들어가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사이버대학의 법학과에 문을 두드렸고, 7년6개월 끝에 사법시험 3차에 합격해서, 사법계에 들어가 썩은 폐부를 도려낼 심정이었지만 처음 먹은 대로 지켜낼 수 있겠는가, 어쩌면 그런 것들이 형용모순 같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죠. 그 속에서 의로운 자들, 정의로운 자들, 공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모범답안이라는 게 과연 있기나 하겠는가, 하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이 사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입니다. 세상의 악한 자를 부러워하지도 말되, 그렇다고 그들이 취하는 길을 뒤쫓아 가려고도 하지 말되, 그 속에서 주님이 기뻐하신 길이 무엇인지 늘 분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 속에서 외톨박이 되거나 너무 외골수로 살아갈 게 아니라, 뱀처럼 지혜롭게 잘 살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속에서 추구하는 모양새는 너무나도 다양해서 어떤 정형화된 틀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추구하는 모습들 속에 의로움과 불의는 50보 100보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 큰 차이가 없는 이 세상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끝까지 추구해야 할 의로운 삶이란 무엇일까요? 죄와 불의로 얼룩져 있는 현실 속에서 매일매일 주님 앞에 무릎 꿇는 자, 바로 그것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의로운 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37편을 익숙하게 읊조리던 주일학교 아이가 훗날 청년이 되어 이 세상의 현실을 마주할 때면 한 가지 생겼던 질문, 의롭게 살고자 하는데, 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 그것은 더 많은 인생을 살면서 새롭게 터득해가야 할 삶의 지혜입니다.
그렇게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나이든 노년의 다윗이 시편37편을 통해 격려하는 게 무엇입니까? 그래도 의로운 길, 의인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의인의 걸음을 기뻐하시니, 비록 넘어질지라도 아주 엎드러지지는 않게 해 줄 것이다, 넘어질 즈음에 여호와께서 당신의 손으로 붙들어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여호와의 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며 살라는 것입니다. 악인이 끊임없이 의인을 살해하려고 하고, 의인이 위협받는 삶 속에 거할지라도, 여호와의 손을 붙잡고 의탁하는 자들을 친히 도와주신다는 고백입니다.
그 고백은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다윗이 지나온 인생 속에서 겪은 삶의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외로운 양치기 속에서도 곰과 사자의 발톱에서 양들을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길로 보호해 주셨고, 또 골리앗과 마주할 때 하나님의 손길로 그를 쓰러트리게 해 주셨고, 사울의 칼날을 피해 다닐 때에도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로 보호해 주셨음을, 다윗이 몸소 체험한 것 말입니다. 그렇기에 의로운 자들아, 세상의 악인들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고, 상대적인 박탈감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의 손, 전능하신 창조주의 손을 붙잡고 살도록 하라고, 다윗이 적극적으로 권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시편 37편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악한 자들이 호시탐탐 의로운 우리들을 해하려고 하고, 넘어뜨리려고 하고, 걸려 넘어지게 위협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살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그 속에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길, 구별된 삶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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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시편 37편을 익숙하게 읊조리며 자랐던 아이들이 청년이 되어 현실 속에서 의인의 삶을 선택하고 살아갈 때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더 괴롭고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이 한 두 가지가 아님을 압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낙심치 않을 수 있는 길, 비록 손해보고 빼앗기는 것 같은 절망 속에서도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여호와의 손, 전능하신 창조주의 손을 붙잡고 살아가는 까닭입니다. 오늘도 저희들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의 손’을 목도하게 하시고, 그 손에 용기를 얻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선택하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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