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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륙의 개척사는 크게 두 줄기로 이루어졌습니다. 첫째는 재물에 목적을 둔 버지니아(Virginia) 주에 세워진 버지니아 회사 중심의 개척사, 또 다른 하나는 신앙을 초점으로 한 메사츄세츠(Massachusetts) 주를 중심한 청교도들의 개척사였습니다. 처음 백인들은 북아메리카 식민지 개척 사업을 통하여 수입을 얻고자 1607년 4월26일 버지니아 주에 도착하여 제임스타운(James town)을 건설하고 ‘버지니아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들은 인디언들과 싸우며 풍족하고 기름진 땅에 담배 농사 밭을 만들었습니다. 손이 많이 가는 담배 농사를 위해 영국의 무직자와 부랑자들을 데려다가 농장주 밑에 인부로 썼습니다. 그런데 인력이 부족하자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다가 값없이 노동력을 착취했습니다. 그들은 영국에서 얻을 수 없었던 땅을 얻기 위해 빼앗고, 가질 수 없었던 돈을 갖기 위해 노예 매매도 자행했죠. 재물을 얻는 것에 목적을 두었기에 인디언들과 수없는 전투를 벌였고, 그들을 무참히 죽이고 짓밟았습니다.
그러나 버지니아 주의 백인들과는 다르게 매사츄세츠 주의 플리머스(plymouth)나 셀렘(Salem), 그리고 보스턴(Boston) 지역에 도착한 이민자들은 삶의 스타일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1620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온 청교도들이었습니다. 인디언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옥수수 재배법을 배워 자급자족했습니다. 미 대륙의 개척사를 써 내려가는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민 왔지만, 메사츄세츠 주를 중심으로 한 청교도들은 영국과의 관계를 끊고 빈손으로 기도하고 찬송하며 새 땅을 개척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미국 땅에 새로운 신앙과 교육 그리고 민주주의를 건설했던 것이죠.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그 참 뜻이 변질되 버리긴 했지만, 초창기에는 정말로 순전한 마음과 정직한 자세로 미 대륙을 개척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렇듯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무엇에 목적을 두고 사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삶의 기초를 무엇에 두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폭력과 타락문화를 이루게 되는가 하면, 반대로 아름답고 복된 세상을 건설하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의 9절 말씀에도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생명’(חיים, 하임)이란 ‘살아있는 것’, ‘영생’, ‘건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의 원천은 주님께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본문 말씀은 사람이 자신의 행복한 삶의 원천과 기초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느냐를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10절에 나오는 ‘주를 아는 자’, 또 ‘마음이 정직한 자’와 11절의 ‘교만한 자’, 그리고 ‘악인들’과 대조를 이루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아는 자, 마음이 정직한 자는 그 인생의 기초를 하나님께 두고 살지만, 교만한 자와 악인들은 그 인생의 기초를 자기 욕망에 두고 사는 큰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특별히 오늘 읽은 시편 36편은 다윗의 시편인데, 대분의 다윗의 시에는 ‘다윗의 시’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죠. 그런데 오늘 시편 36편의 표제어에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이라는 수식어가 그것이죠.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라고 붙어 있습니다. 시편에 있는 다윗의 여러 시들과 달리 오늘 본문의 시편과 시편 18편에만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두 시편에만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시편의 내용과 연관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윗만 주님의 종이 아니라 우리도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이죠.
종이 무엇입니까? NIV 영어성경은 종을 ‘servant’ ‘하인, 시중드는 사람’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종은 그 소유권이 주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종에 대한 모든 권한은 주인에게 있습니다. 종 기분대로 하고 말고, 살고 죽을 수 있는 게 아니죠. 하인이 하고 싶다고 하고, 하기 싫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특히 고대 시대의 종은 더 말할 것이 없었습니다. 종에게는 철저하게 주인의 결정과 처분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종에게 요구되는 것은 주인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주인의 명령에 대한 완전한 복종뿐입니다.
다윗이 바로 하나님께 대해 그렇게 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존재와 인생의 주인이심을 늘 기억하고 시인하며 주의 말씀을 삶의 우선수위에 두고 살았습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의 명령과 뜻을 듣고 순종하며 그 길을 걸어갔던 다윗입니다. 그것이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이유였습니다. 그러기에 주의 종 된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우리 존재와 삶의 주인이시고, 우리 삶의 원천이자 기초임을 언제나 기억하고 살아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본문 1-4절입니다.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악과 속임이라 그는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
1-4절은 악인의 특징을 밝혀줍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가볍게 우습게 아는 자압니다. 하나님보다 돈, 권력, 육체적인 힘을 더 겁내하고 두려워하며 그런 힘들 앞에서 비굴해지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악인은 진짜 무지하고 비겁한 자입니다. 왜냐하면 진짜 두려워해야할 존재가 누구인지 모른 채 스스로 멸망을 길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악인은 끊임없이 자기를 자랑합니다. 틈만 나면 자기 자랑입니다. 자랑할 것도 아닌데 자랑합니다. 실은 그것이 부끄러움인데도 부끄러움인 줄 모른 채 자기를 자랑합니다. 나중에 더 자랑할 것이 없으면 자기의 죄를 자랑합니다. 하나님만이 자랑이며, 참된 자랑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악과 무지는 서로 통합니다. 그리고 악인은 거짓과 악한 말을 일삼습니다. 자기 이익과 기분 따라 말을 내뱉습니다. 말을 함부로 합니다. 말에 절제가 없습니다. 정제되지 않은 말을 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악인들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자랑을 일삼으며, 말을 함부로 하는 이들도 많죠. 그만큼 교회가 변질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무력함, 업신여김 당함, 교회의 생명력의 상실이 여기에 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교회의 정화와 회복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 정화와 회복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참되게 섬기는 이들, 요한 계시록의 안디바와 같은 진실된 이들의 깨어 있음을 통해 정화와 회복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을 세상의 그 어떤 것과 바꾸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5절 이하는 구해주시는 하나님, 건지시는 하나님, 회복하시고 생명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시고, 그 인자하심이 하늘에 사무칠 정도요, 하늘을 덮고 하늘에 새겨질 정도입니다. 그 분의 인자하심은 사람에 대해 오래 참으시고, 심판을 미루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분이시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주시기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렇기에 아직 코끝에 숨이 있을 동안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빛을 보도록 원하시는 분이시죠. 바로 여기에 사람의 참된 기회와 희망이 있습니다. 새 생명을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들은 인생의 원천과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부정하고 무시하며 하나님을 우습게 알고, 악을 가볍게 여기던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요, 반대로 그 하나님 은혜 속에서 매일매일 살아가는 자들은 그 끝 날에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그분이 주신 은혜를 삶의 원천과 기초로 삼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https://www.bookpod.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1175
*사랑하시는 주님.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생명과 구원의 은총을 누리며 살게 하시옵소서. 인자하신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삶의 위로와 능력을 삼는 하루가 되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욕심과 탐욕을 삶의 원천이나 기초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 삶의 원천과 기초로 삼게 하시옵소서. 그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손길을 체험하게 하실 줄 믿사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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