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평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권을 가진 나라의 한 국민으로서 국가의 보호 아래 살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문제들이 내재돼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힘들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는 물론이요 6·25전쟁을 경험한 세대들이 그렇습니다. 그들로부터 생생한 증언을 들은 자녀들과 후손들은 그 시절에 비해 얼마나 감사한 마음으로 살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권이 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 할 판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주권이 있고, 국가의 보호가 있고, 또 마음껏 날개를 펼 수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부족한 것 하나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인내가 아닐까 싶습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시대에는 그 고통과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붙잡고 인내하며 살았는데, 요즘은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자살도 먹고 살기 힘든 빈민 국가가 아니라 부유한 국가에서 더 많이 일어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인 우리에게 고난과 역경이 닥쳐올 때 어떤 자세가 필요합니까? ‘왜 이런 어려움을 주십니까?’라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하는 게 아니라 ‘나를 더 성숙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태도죠. 그런 인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아름답고 선한 새 길을 열어주시기 때문이죠.
영화 ‘덕혜 옹주’를 본 적이 있는데, 덕혜 옹주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였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우리 나라의 자주권을 회복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서, 일본 황실과 우리나라의 친일파 세력들이 손을 잡고 덕혜 옹주를 일본으로 보내버리죠. 그런데 나중에 일본이 항복하고 우리나라에 광복이 찾아와 다시금 우리나라 땅을 밟을려고 하는데, 그때는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 요직에 있는 자들이 덕혜 옹주의 입국을 거부해버리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런 위치에 있다면, 과연 하나님께 어떻게 호소하며 기도드리겠습니까? 마치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호소드리는 것처럼, 원수와 같은 나라 백성들을 처단해 달라고 기도드리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다윗도 그런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시편 35편은 다윗의 시인데, 다윗이 고난 가운데 지은 다른 시들처럼 구절구절마다 다윗의 고뇌가 깊이 묻어나 있습니다.
다윗은 그 무엇보다도 원수들의 악행을 인하여 괴로워했습니다. 원수들이 다윗에게 행했던 악행을 이 시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3절에 “자신을 쫓는 자들”, 4절에 “자기 생명을 빼앗아 가려고 하는 자들”, 또 4절에 “자기 생명을 상해하려는 자들”을 밝힙니다. 그들이 7절 고백처럼 “함정을 파서 생명을 해하려고 하죠.” 또 15절에서는 “자신이 넘어질 때 기뻐하고 대적자들이 모여 자신을 치며 찢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16절에서는 “자신을 향해 이를 갈고” 20절에서는 “거짓말로 모략하고”, 21절에서는 “거짓 증언을 합니다”. 이런 원수들의 악행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12절에서 언급하는 고백과 같습니다. ‘자신의 선을 악으로 갚는다’는 것이 그것이죠.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받는 일은 살아가면서 흔히 겪는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잘 대해 주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나를 공격할 때 그것을 견디기란 쉽지 않습니다. 13절과 14절의 표현처럼, 상대가 병들었을 때 내 가족처럼 내가 극진히 간호해 주고, 또 상대가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해 줬는데, 그 사람이 어느 날 나를 향해 선 칼을 들고 공격하듯 내게 비수를 꽂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이 그런 원수들, 선을 악으로 갚으려는 그 원수들을 향해, 하나님께 너무 억울하다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저주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수치를 당하게 해 달라고, 또 낭패를 당하게 해 달라고, 4절과 26절에서 각각 호소하고 있습니다. 또 5절에서는 그들이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해 달라고”, 6절에서는 그들의 “길을 어둡게 하여 미끄러지게 해 달라고”, 8절에서는 “그가 숨긴 그물에 자기가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어떻습니까? 충분히 공감이 가는 호소의 기도이지 않습니까? 다윗이 왜 하나님께 그렇게 호소하는 것입니까? 자신이 악을 악으로 갚으면 될 것을 말입니다. 그들처럼 상대의 면전에 옥을 하고 소리지르며 싸우면 될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는 게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수치만 더 당할 뿐이니, 하나님께 호소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를 향해 대항하거나 대적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내용이 더 많이 나옵니다. 1절에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2절에 “도우소서”, 3절에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5절에 “그들을 몰아내소서”(5절), 6절에 “그들을 뒤쫓게 하소서” 또 17절에 “구원하시며... 건지소서”, 22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23절에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 24절에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그들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이와 같은 다윗의 호소, 다윗의 간구를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게 무엇입니까?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가 그를 향해 맞서고 대적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지만 다윗처럼 우리의 도움이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게 최우선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평화의 시대이고 인권이 보호되는 시대인 것 같아도 여전히 세상은 악한 자들과 함께 손을 맞잡고 흘러가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세상의 방법들을 다 동원하면서도, 전능하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호소하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속에 해답이 있다는 것을 다윗이 깨달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또 하나 깨닫는 게 있습니다. 다윗의 훌륭한 점이 그런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기도한 점도 없잖아 있지만, 더더욱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점입니다. 9절에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다윗은 원수들이 자기 생명을 해하려고 하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찬양하며 기뻐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도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어찌 찬양하고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10절에도 그는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또 18절에서도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8절에서는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점은 절망 가운데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의지했다는 점입니다. 만약에 다윗이 절망 중에 원수를 욕하고 저주하는 기도만 했다거나 자신을 건져달라는 기도만 했다면 다윗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위대함은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고 찬양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진면교사로 남아 있는 다윗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쓴 옥중서신의 하나인 에베소서 6장 20절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 일(복음전파)을 위하여 쇠사슬에 매인(즉, 감옥에 갇힌 것)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복음전파)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일이었기 때문이죠. 그 선한 일을 태평스럽고 평화로울 때 감당했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투옥된 상황 속에서 현재의 고난 속에서 인내하며 그 일을 감당했다는 점입니다. 그런 여견 속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감사하고 찬송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기도로 승화시켜갔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취할 자세가 바로 그런 점들이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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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저희에게 평화의 시대를 주심도 감사하고 고난의 때를 주심도 감사드립니다. 고난이 저희의 신앙에 유익된 것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고난 중에도 오직 구원의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고 찬양하는 자세도 잊지 않게 하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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