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스위스의 내과의사이며 정신의학자인 폴 투루니에(Paul Tournier)는 사람에게는 숨길 수 없는 세 가지 회색 감정이 있다고 했습니다. 공허감과 죄책감과 불안감이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죄책감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다면 정신병의 75%는 당장 낫게 된다고도 말했습니다.
조선왕조의 7대 세조가 된 수양대군은 조카 단종에게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그는 문종이 죽고 어린 조카 단종이 왕 위에 오르자 그 왕권을 빼앗기 위하여 1453년 ‘계유정란’을 일으켰고, 수많은 정적들을 죽이고 또 유배로 보냈고, 어린 왕까지도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냈다가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하지만 왕권을 찬탈한 수양대군은 자기 악행에 대한 가책을 느끼며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밤마다 제대로 잠도 못 이루고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한번은 낮잠을 자는데 단종의 모친 현덕왕후의 혼백이 꿈에 나타나 야단을 쳤습니다. “너는 참으로 악독하고 표독하구나. 내 아들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도 그래도 부족하여 벽지인 영월로 내쫓더니 이제는 목숨까지 끊으려 하는구나. 네가 나와 무슨 원한이 그리 심하기에 이처럼 악착스러우냐? 이제 내가 네 자식을 살려두지 않겠다.” 그러면서 목을 졸라매자 세조는 몸부림치다가 손길을 뿌리쳤습니다. “지독한 놈! 그래도 살고는 싶은 게로구나!” 그러면서 침을 뱉자 깜짝 놀라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후부터 침이 튀긴 곳마다 종기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결국 온 몸에 번져 괴로움을 겪으며 말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순서를 어기며 왕위를 이어받았으며...백성들의 원성을 살 실책을 많이 저질렀도다.”하며 회한(悔恨)에 빠졌습니다. 그처럼 사람은 죄를 짓고 또 죄를 숨기고는 편안하게 살 수가 없는 법이죠. 아무도 모른다 할지라도 자기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심적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책감은 결국에는 정신적인 질병과 육체적인 질병을 유발하게 만듭니다.
오늘 읽은 시편 32편은 죄악으로 인해 심한 정신적인 갈등과 육체적인 괴로움을 받던 다윗이 결국 하나님 앞에 죄를 토설하고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자 얼마나 좋은지, 또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책감에서 해방을 받은 기쁨이 얼마나 좋은지를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사죄의 기쁨과 행복감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간증하는 형식으로 읊조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에는 ‘다윗의 마스길’이라는 표제 곧 머리말이 붙어 있습니다. ‘마스길’이란 뜻은 교훈 혹은 교육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른바 다윗의 교훈이란 뜻이죠. 무슨 교훈을 남기는 사건이 그 배후에 있었을까요? 짐작하셨겠지만 다윗이 밧세바 사건을 저지른 후 깊은 회개를 하는 내용이 시편 51편에 기록돼 있는데, 그 죄를 고백한 이후에 자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신 그 교훈을 전해주고 있는 ‘마스길’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으로 하나님께 죄를 지은 후, 그 죄로 인해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겠습니까? 그것을 몸소 겪은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교훈하겠습니까? 나와 같은 무거운 죄를 짓지 말라고, 정말로 고통스런 나날을 맞이하게 된다며, 그런 반면교사의 교훈을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다윗은 죄를 범했지만 눈물로 침상을 적실 정도로 죄를 회개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죄악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수양대군이 불면증에 시달렸던 그런 고통을 다윗도 겪었겠지만, 그 죄 용서함을 받은 이후에는 너무나도 평안한 밤들을 맞이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사죄의 은총도 다윗이 함께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놓칠 수 없습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끔찍한 죄를 지은 자라 하더라도 그 죄를 회개하면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평안을 주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을 경험한 다윗입니다. 그렇기에 정말로 큰 죄를 지었을 때, 그때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진면교사로서 일깨워주는 시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1편에 ‘복 있는 자’가 나오고 있습니다. 복 있는 자는 사실 시편 1편에서 이미 나와 있는 내용이었죠. “복있는 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하고 말이죠. 그런데 오늘 시편 32편에서 또 다시 “복 있는 자”를 언급합니다. 그가 과연 어떤 자입니까? “허물을 용서 받고, 마음에 간사함이 없이 여호와께 정죄 당하지 않는 자”, 바로 그런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앞에 죄에 대해 책망 받을 일이 없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 그렇게 완벽하게,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연약한 존재요,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살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 인간이기에, 어찌 죄를 짓지 않고 완벽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죄를 짓고서도 아무렇지도 않는 양심 속에 살아가는 자, 죄로 인해 신음하며 뼈가 쇠하여 지는 고통을 겪는 중에도 아무렇지도 않는 모습으로 감추면서 살아가는 자죠. 그러면서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신이 완전하고 거룩하다고 자부하는 회칠한 무덤처럼 살아가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간이죠.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죠. 그런 자일수록 자기 내면에 불안이 더욱더 가중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분들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자백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면, 그의 양심은 더욱더 무뎌지고 굳어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5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들이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죄를 범했을 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시인하고 간절히 용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입을 통해 더럽고 처참한 죄악들을 하나씩 고백할 때마다 그것이 고통스럽겠지만 그 시간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만날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작은 죄악 하나라도 하나님께 숨김없이 기도하며 죄에 대한 용서를 비는 것이죠.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내 죄를 고백하면 어떤 은총을 맞이하게 됩니까? 하나님께 죄를 고백한 이후의 상태는 마치 홍수가 범람하여 거친 물결이 위협한다 해도 결코 두렵지 않는 평안함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것을 6절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님께서 나의 피난처가 되시고,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는데, 어찌 그 죄책을 물으실 수 있겠으며, 어찌 불면증이 계속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총을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그 속에서 참된 평강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 1장 9절에서는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의 모든 죄를 자백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해 주시는데, 사탄이 우리 속에서 속삭일 수 있죠. 어떻게 감히 네가 죄를 용서받는다고 할 수 있느냐? 네가 무슨 의로운 일을 했다고 말이야, 하고 속삭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럴만한 일을 해서 용서해주시는 분이 아니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죄를 위해 당신의 독생자까지 십자가에 재물 삼아 주실 정도로, 우리를 품어주시기 때문에, 우리를 무한대로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시죠. 그런 은총 때문에 우리는 매 순간 크고 작은 죄를 범할지라도 그 분 앞에 용서를 구하며 나아갈 수 있는 것이고, 그 분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고 품어주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중요한 메시지가 무엇이겠습니까? 6절 고백처럼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 세상의 어떤 경로를 통해 죄를 범할지라도 그 속에 주저앉기보다 하나님께 더 머리를 들이밀며 고백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코자 할 때, 그 마음과 모습을 가장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이라는 점입니다. 그때 비로소 마음속에 평강을 누리며 살게 하실 것입니다.
https://www.bookpod.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1175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가 어떤 죄악을 범할지라도, 그로 인해 불면증에 시달려도, 그 모든 죄악을 주님께 다 고함으로 용서받고 평강을 누리길 원합니다. 설령 그런 죄를 범치 않았을지라도 주님의 자녀답게 주님을 만날 기회를 더욱더 얻어서 주님과 깊이 있는 교제를 펼쳐나가게 하시옵소서.
728x90
반응형
LIST
'새벽묵상DewSermon > 시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시34:1-22) (0) | 2022.04.07 |
---|---|
여호와를 찬송하라(시33:1-22) (0) | 2022.04.06 |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시31:1-24) (0) | 2022.04.04 |
슬픔이 변하여 춤이(시30:1-12) (0) | 2022.04.04 |
여호와의 소리가(시29:1-11) (0) | 2022.04.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