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이란 부활주일 전 주일이며, 고난주간의 첫째 주일입니다. 이날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온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하며 맞이한 데서 그 유래를 찾습니다.
종려나무는 우리나라의 대추와 비슷한 열매가 매달리기 때문에 보통 대추야자나무라고 불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다음 수르 협곡을 지나 마라의 쓴물을 지나 엘림에 이르렀을 때 그 종려나무 70그루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만큼 풍족한 것을 뜻하는 의미로 쓰였던 종려나무입니다. 뿐만 아니라 레위기 23장 40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각종 실과와 함께 그 종려나무 가지를 취해서 하나님 앞에 즐거워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만큼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다는 것은 ‘기쁨의 날’을 맞이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명기 34장 3절에는 여리고를 향해 종려나무의 성읍이라고 칭할 정도로, 여리고가 종려나무가 많았음을 알려줍니다. 또한 사사기 4장 5절에서는 종려나무 가지 아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사사 드보라에게 재판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시편 92편 12절에서는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하고 말씀합니다.
이상과 같은 말씀을 종합해 볼 때 예수님께서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온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환호한 것은 주님이 공의의 왕으로, 구원의 왕으로, 승리의 왕으로 입성하는 그 모습 앞에 모두가 환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토록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열렬히 환영했던 그들은 이로부터 닷새 뒤에 맥없이 포로로 끌려가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 모두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군중들로 돌변한다는 사실이죠. 참된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고서, 자신들의 욕망에 이끌려 주님을 환호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들과 같아서는 안된단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는 그렇게 열광하는 대중, 군중심리에 이끌린 군중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본문 1절이 이와 같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른바 ‘두 제자’가 있습니다. 이 두 제자는 주님의 부탁을 받아, 밧바게의 맞으면 마을로 가서 어린 나귀를 끌고 온 제자입니다. 지극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제자들입니다.
물론 그들 두 제자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다고 해도, 그 나귀의 주인이 자기 나귀를 풀어주지 않으면 도저히 그 나귀를 끌고 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문에 등장하는 세 번째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나귀의 주인입니다. 본문 3절에서 그 나귀의 주인이 어떤 자세를 취할지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그 나귀가 나귀 새끼들과 함께 있을 것인데, 그것을 풀어 끌고 오려고 할 때 그 주인이 물을 것이고, 그러면 너희들은 ‘주님이 쓰시겠다’고 답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가 즉시 보낼 것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의 말씀대로 그 나귀 주인은 그 즉시 나귀를 보내주었고, 그 나귀를 타고 주님은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상과 같은 말씀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캐치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그 때에 본문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첫 번째 부류는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의 제자, 그리고 자기 나귀를 풀어서 주님께 내어드린 나귀 주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들은 철저히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이들은 ‘왜요?’하고 그 이유를 묻지도 않았던 자들입니다. 그저 주님께서 가라고 했을 때 나귀가 있는 곳으로 갔고, 또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했을 때 기꺼이 자기 재산과 같은 나귀를 주님께 내어드렸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바로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하실 때 기꺼이 순종하는 믿음 말입니다. 왜요? 하고 따지거나, 내 생각과 주님의 말씀을 저울질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때로는 내 상식을 뛰어넘어도 철저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들 말입니다. 그렇게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의탁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감람나무 가지를 꺾어서 열광적으로 환호한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주님을 환호했던 것은 주님을 있는 그대로 믿고 따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주님을 환호했던 것은 자신들의 욕심, 자신들의 욕망, 이제 주님이 자신들의 바람대로 로마를 전복시키고 유대민족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줄, 그런 메시아로 예수님을 바라봤기 때문에 모두가 환호하고 열광했던 것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그들이 얼마나 열광적으로 환영했는지, 본문은 ‘온 성이 소동했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소동하다’는 헬라어 단어 ‘세이오’(σείω)는 ‘지축이 흔들릴 정도’(to shake, cause to tremble)로 열광하는 모습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정말로 주님의 뜻하심을 믿고, 주님이 걸어가고자 하는 그 길을 알고서, 환호한 것은 아닙니다. 오직 자신들의 욕망을 대변해 줄 선지자로 예수님을 환호했을 뿐입니다. 이른바 그들의 믿음은 주님을 거래의 대상으로 좇은 것이지, 결코 온전한 믿음의 대상 곧 신뢰의 대상으로 주님을 믿고 환호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 믿음이었기 때문에 이로부터 닷새 뒤에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자들로 돌변했던 것입니다.
바꿔 말해, 오늘 우리의 믿음은 혹시 이들과 다른지, 아니면 이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어떤 경우에도 본문의 군중들처럼 계산된 믿음, 거대의 대상으로 주님을 좇는 믿음이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할 때, 아무런 거래도 없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 즉석에서 자기 나귀 새끼를 내어줬던 그 나귀 주인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미국의 전 대통령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월터리드 육군 병원에서 세상을 떠날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그 분을 방문하게 되었다고 하죠. 의사는 면회 시간을 30분 정도 주었는데,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이런 저런 말로 위로하고 이제 시간이 되어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나가려고 할 때였습니다. 그때 아이젠하위 대통령은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손을 잡고 ‘좀 더 있다 가시지요?’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신중하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확신이 없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제 마지막 부탁입니다.” 그때 빌리그래함 목사님은 그 순간 기독교 근본교리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자기 의로 서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잘한 일도 있고, 못한 일도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 우리가 무슨 일을 잘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십자가의 은혜, 그 은혜를 감사한 마음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증해 주시고,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그 이야기 끝에, 한 참을 기도하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때서야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합니다. “빌리, 감사하오. 나는 이제 준비가 되었소.” 그리고 이내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비로소 그때서야 주님을 믿는 게 무엇인지 진정으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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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주님.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그분 곁에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참되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자들, 그러나 주님을 거래의 대상으로 이용하려 했던 자들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어떤 수준인지, 종려주일 새벽에 바른 믿음의 눈을 뜨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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