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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시편

여호와의 율법은(시19:1-14)

by 똑똑이채널 2022.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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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이 무엇일까요? 영성은 ‘지금 나와 함께 하는 주님에 대해 깨어있는 것’을 말합니다. 게리 토마스는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는 책을 통해 영성은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 맺는 방식 혹은 가까워지는 방식”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영성을 추구하는 방식은 획일적이지 않고, 각자의 영적 기질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거죠. 그는 영성을 추구하는 방식을 9가지로 구분했습니다. 그래서 각자에게 적합한 영성은 무엇인지, 더욱이 다른 영성의 기질도 포용할 수 있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는 첫 번째 영성으로 자연주의 영성을 꼽았습니다. 자연 곧 하늘과 별과 바다 등 대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성이죠. 두 번째 영성은 감각주의 영성 곧 촉각 미각 후각 등 오감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고 사랑하는 영성을 말합니다. 세번째는 전통주의 영성 곧 의식과 상징과 문양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고 사랑하는 영성을 말합니다. 네번째는 금욕주의 영성 곧 고독과 단순성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경배하는 영성을 말하죠. 다섯번째는 행동주의 영성 곧 세상의 참여와 대결을 통해 하나님을 섭리와 주권을 보여주는 영성을 이야기하죠. 여섯번째는 박애주의 영성 곧 이웃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걸 드러내는 영성을 언급합니다. 일곱 번째는 열정주의 영성 곧 신비와 축제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하는 영성을 말합니다. 여덟 번째는 묵상주의 영성 곧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모습 그대로 삶 속에 펼쳐보이는 영성을 말하죠. 마지막 아홉 번째는 지성주의 영성 곧 하나님에 대한 이성과 지성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성을 말하죠.

 

영성은 그렇듯 개인의 기질과 개인의 상황에 따라 변화되기 마련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기질을 복합적으로 지니는 것이 일반적인데, 만약 특정 부분에 대한 영성의 기질이 지나쳐 있다면 다른 부분들을 통합하는 통전적인 영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죠. 토마스가 분류한 예를 토대로 본문의 19편을 살펴보면, 1-6절은 자연주의 영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고, 7-11절은 지성주의 영성, 12-13절은 금욕주의 그리고 행동주의 영성을 보여주고 있고, 14절은 묵상주의 영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말한 자연주의 영성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본문에서 다윗은 하늘과 궁창과 날과 밤과 해를 보면서 이 모든 것 속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밤 하늘에 반짝 반짝이는 별빛을 통해 하나님의 은은한 사랑을 느끼는 것,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 유대 광야를 8년 동안 도망쳐 다녔는데, 그때마다 광야 위에 펼쳐진 그 별들을 보고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저 많은 별처럼 저 많은 눈동자처럼 나를 보시고, 감싸주시고, 눈여겨보고 계시겠구나, 하고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날씨가 뜨거울 때는 어떻겠습니까? 뜨거운 뙤약볕을 자신에게 허락하신 것은, 자신의 인생 사계 속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믿는 게 중요하죠. 이런 상황 속에서도 믿음으로 잘 통과하여 정금같은 신앙인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는 것이죠. 이것이 자연주의 영성입니다.

 

그리고 7-10절이 이와 같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이것이 지성주의 영성입니다. 지성이란 곧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죠. 과연 무엇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터득할 수 있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말씀 곧 여호와의 율법이죠.

그래서 언젠가 말씀을 드렸지만 시편 1편, 시편 19편, 그리고 시편 119편은 여호와의 율법을 강조하고 있는 ‘토라시’로 분류한다고 했죠. 여호와의 말씀을 근간으로 해야 가정도, 자녀들도, 일터와 사업장도 바르게 세워질 수 있다고 말이죠. 그래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하고 시편 119편 105절에서 밝혀주고 있었죠.

그런데 오늘 읽은 10절 “주의 말씀이 꿀과 송이꿀보다 달다”는 말씀도 실은 시편 119편 103절에서 비슷하게 나와 있는 구절입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그와 같은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단 말씀도 읽고 새기고 묵상할 때에만 우리의 심령과 인생 속에 살아 역사하는 법이죠.

그렇다면 왜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세 가지 이유가 있죠. 첫째로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해서, 둘째로 이단과 사이비로부터 우리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셋째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행실의 삶을 살기 위해서라고 말이죠. 말씀묵상의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지성주의 영성, 곧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더 많이 알아갈 수 있는 법이죠.

 

그리고 12-13절은 금욕주의 영성과 행동주의 영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자기 허물을 깨들을 수 있는 자, 숨은 허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 고의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 이 모든 것들이 실은 자기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시선을 갖출 때 가능한 것이죠. 그것이 곧 금욕주의 영성입니다.

그런데 금욕이라고 했을 때 무조건 뭔가를 끊는 것, 먹지 않고, 세상과 단절시키는 것만이 금욕주의 영성을 바르게 구현할 수 있는 게 아니죠. 금욕이란 세상의 욕망과 탐욕을 절제하고 끊는 것이지만, 그것을 더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공의와 정의에 대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데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금욕주의 영성과 행동주의 영성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게 된 것도 바로 그런 이치로 생각해 볼 수 있죠. 그것을 금욕주의 영성으로만 접근하기보다 행동주의 영성으로 접근하는 게 훨씬 더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금욕주의 영성은 무조건 따 먹지 말고 철저히 끊는 것에만 집중을 하는 것이라면, 행동주의 영성이란 보다 진리와 생명과 선을 좇도록 행동하면, 그 선악과의 유혹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는 점이죠.

 

마지막으로 14절을 통해 다윗이 그렇게 고백을 합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바란다는 것, 이것이 바로 묵상주의 영성입니다. 그런데 내 입의 말과 묵상을 기도로 해석한다면, 우리가 드리는 기도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제사요 곧 예배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 입의 말과 묵상”을 “내 입을 통해 나오는 모든 말과 내가 마음속으로 하는 모든 생각”으로 확대 해석한다면, 우리의 일상생활 자체가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죠. 이른바 그것이 로마서 12장 1절에서 밝히 말하는 ‘산 제사’가 되는 셈이죠.

그래서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예배의 준비는 집에서 출발하는 시점부터이고, 예배의 시작은 예배당 문턱을 넘어서면서부터이고, 예배의 진정한 완성은 예배당 문밖을 나서는 우리들의 삶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말이죠. 그만큼 우리는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를 구현하는 자들이 돼야 합니다. 그래야 보다 깊은 묵상주의 여성을 추구할 수 있고, 그래야 온전한 그리스도인임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에게 당신의 그리스도 되심을 말이나 구호가 아닌 예배와 삶의 생활화를 통해 드러내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그런 생활의 영성이 신실한 삶으로 드러나는 온전한 그리스인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야긴과 보아스

북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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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밤하늘의 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주의 율례와 법도를 통해 하나님의 속성을 더 깊이 알게 하시옵소서. 죄의 유혹에 대해 절제와 인내뿐만 아니라 보다 더 적극적으로 진리와 생명을 사랑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마음의 묵상과 입술의 고백이 곧 기도요 예배가 되게 하시며, 우리의 예배가 신실한 삶으로 연결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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