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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쌀쌀함이 많이 지나갔는데 여름철이 되면 금방 날씨가 더워지겠죠. 한 밤 중에 잠을 못 들 정도로 더울 때도 있겠고요. 그렇게 더운 이유는 오존층 곧 지구 온난화 때문이라고 말을 하죠. 주된 요인이 아마존의 밀림 숲이 사라지고 있는 까닭이고, 북극의 빙하가 녹기 때문이죠. 그래서 세계적으로 탄소배출 절감을 하고 있고, 친환경차를 개발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죠.
작년엔가 교회 벽에다 담쟁이를 심은 적이 있습니다. 담쟁이가 벽을 타고 올라가면 좀 더 시원해지지 않을까 싶은 까닭이었습니다. 그래서 담쟁이를 잘라다 옮겨심었는데 하루도 못 가서 죽어버렸습니다. 지열 때문에 말라버린 것이었죠. 그때 그 담쟁이들이 얼마나 억울하게 생각했을까 싶습니다. 이럴 거면 왜 나를 잘라서 여기에서 심으려고 했냐고 말이죠.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아마존의 밀림이 사라져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분명히 모진 풍파를 견디고 긴 시간 속에서 자라온 숲일 텐데, 그 숲들이 한 순간에 베임을 당하고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 쓰러진 나무들과 그 나무들에 깃든 시간을 저들이 회복시킬 수 있을까, 라는 회의감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때 잘려진 나무들이 마치 지구의 몸인 것처럼 억울하고 분한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아마도 나무가 말을 할 줄 안다면 억울하고 분한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표현했을까요?
억울해 하는 아이의 눈빛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아이가 다섯〉이라는 가족드라마를 아이들과 종종 보는데, 거기에 한 아이가 친구 집에 놀러왔는데, 마침 그때 친구의 물품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때 그 집의 할머니가 그 친구 짓이라고 소리를 치고 난리를 피웠는데, 그때 아이는 ‘제가 안 가져갔어요.’하고 억울해 하는 눈빛을 보냈습니다. 대항할 힘이 없어 글썽이는 그 아이의 눈, 얼마나 분노가 들끓었을까요? 모름지기 어른이라면 아이가 흘리는 억울한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어야 성숙한 어른이 돼야 하죠. 그래야 아이가 자라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를 품을 수 있죠.
오늘 본문을 통해 다윗이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기도라고 말하죠. 다윗이 기도를 드리는데, 악인에게서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죠. 분명 잘못한 게 없는데도 억울한 누명을 씌워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처럼, 자신을 찢으려 하는 자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무고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 텐데, 그런데도 다윗은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악인의 악함에 몰두하고 보복하려고 하기보다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먼저 집중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1절에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정직함, 곧 하나님과 기도자 사이의 정직함이 진정한 기도의 근본입니다. 다윗은 진심을 감추고 좋은 사람인 양 굴지 않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정직해서 어쩌면 용감해 보이죠. 억울함을 이야기하고, 분노를 터뜨리고, 때론 원망도 하지만, 그럼에도 다윗은 가장 큰 어른과 같은 하나님 앞에 어린 아이처럼 자기 억울함을 정직하게 호소하고 간구하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기도 역시 정직한 기도를 드려야 함이 마땅합니다. 내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필요한 대로, 또 원망한 일이 있으면 원망한 대로, 가식 없이 진실되고 정직하게 하나님 아버지께, 마치 어린 아이가 어른에게 요청하듯이, 우리의 기도가 어린 아이의 기도가 돼야 할 필요가 있죠.
2절에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 기도는 자신의 눈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눈을 믿는 것임을 일깨워줍니다. 다윗은 주님의 눈으로, 다시 말해 자기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공평하게 판단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결백조차도 자기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에 의해 다루어지는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최종 판단을 하나님께 내어맡기는 기도죠.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게 무엇입니까? 기도자는 자신의 옮음보다 하나님의 옮음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기도자는 자기 보기에 좋은 길을 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길을 구하는 자입니다. 나의 옳음 나의 판단, 내 시선보다 주님의 옳음과 주님의 판단과 주님의 시선에 내가 다뤄지고 컨트롤 될 수 있도록 하는 게 진정한 기도입니다.
어디 기도만 그렇습니까? 믿음 역시 다뤄지는 것이죠. 믿음은 순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때의 순종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자 주어진 상황에 대한 순종이죠. 그 순종을 위해 믿음의 용기가 필요하죠. 그 용기를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시선을 견지하게 되면 내 삶이 하나님의 의해 다뤄지는 것이죠. 그것이 모두 믿음으로 연결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나의 믿음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뤄지고 있는가? 진정으로 내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다뤄지고 있다면, 내 삶은 신실하게 변화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믿음은 신실함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시선을 견지하고, 하나님에 의해 다뤄지도록 하면, 신실한 기도가 안 될 수가 없겠죠. 신실한 자의 기도는 자기 시선으로 자기 욕망을 통보하는 수준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자기 욕망은 침묵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끊임없이 듣는 훈련을 행하는 자이죠. 다윗이 그래서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공평하게 판단해 달라고 호소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죠. 자기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말입니다.
본문 13절에 “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악이야말로 하나님의 손에 의해 다루어져야 하는 것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죠. 인간이 악을 다루려고 하는 순간 악의 수하로 전락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시편 37편을 보면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시37:7-9) 악과 싸우는 것이 비록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지만, 그러나 악을 대항하기 위해 악을 택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선으로 악을 갚는 경우보다 악으로 악을 갚는 경우가 이 세상에 훨씬 더 많기 때문이죠. 그래서 악의 최종 심판은 내 손, 내 판단에 맡기기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맡기라는, 다윗의 고백입니다.
그렇죠. 만약 다윗이 악의 판단 악의 심판을 자기 시선, 자기만족에 두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씩이나 있었는데, 그때 처단해 버렸겠죠. 요셉도 악의 심판을 자기 자신에게 두었다면 자기 형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왔을 때 모조리 처단해 버렸겠죠.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자신을 향해 조롱하고 비난하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자기 관점, 자기 판단으로 그들의 악을 심판고자 했다면 그 전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던 그대로 당장이라도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마26:53)서 그들을 멸하도록 명령하셨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도, 요셉도, 그리고 예수님도 자기 판단, 자기 관점으로 악을 판단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 내어 맡겼죠.
그래서 본문 15절에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기도자의 진정한 만족, 곧 다윗의 진정한 만족은 영원하신 하나님에게서 찾았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내 손에 들린 눈에 보이는 선물과 같은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고 만족스런 결과가 당장 없어도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하며 감사하는 기도자의 자세죠. 그것이 다윗이 드린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이 땅에서 억울함과 분노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었죠. 그런 기도를 드렸기에 사무엘상 22장 2절에서 읽은 바 있듯이, 다윗에게 아둘람 굴로 도망치는 자들 곧 환난당한 모든 자, 빚진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몰려들었던 것이죠. 다윗은 그런 그들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었죠.
오늘 저와 여러분도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는 기도자, 성숙한 기도자들이 될 수 있길 축복합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의 기도가 내 만족, 내 시선만 채우는 어린 아이와 같은 기도는 아니었는지요. 우리의 시선과 판단을 하나님께 두며 기도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런 기도로 더 연약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품고 사랑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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