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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시편

어리석은 자는(시14:1-7)

by 똑똑이채널 2022.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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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편은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실상, 그 중에서도 어리석은 자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기에서 어리석은 자의 특징이 무엇인지 밝혀주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 곧 미련한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자죠.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부패하여 행실이 가증하고 선을 행치 않는 자들이죠. 종합해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이 썩고, 병들어, 온갖 죄를 도모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거짓과 음란과 욕심과 폭력과 교만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악행이고, 그런 것들을 자행하는 자들이 실은 어리석은 자들이라는 것이죠.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어리석은 자, 하나님의 기준에서 어리석은 자이죠.

그렇다면 세상의 기준에서 어리석은 자는 어떤 자입니까? 좀 지능이 떨어져 보이고, 남보다 행동이 굼뜨고, 자기 손해만 보는 자들을 어리석은 자로 생각하죠. 오른뺨을 치면 왼 뺨을 돌려대는 자,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는 자, 겉 옷을 달라고 하면 속 옷까지 내 주는 자, 그런 자가 세상의 기준에서는 어리석은 자로 치부되겠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하나님 나라에서 존귀한 자로 칭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시편에서, 아니 성경 전체를 통해, 가장 어리석은 자가 누구라고 칭합니까?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죠.그 마음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지 않는 자가 진정으로 어리석은 자입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지 않는 자,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전혀 없는 자, 그런 자는 짐승과 똑같은 인간입니다. 짐승처럼 사는 자는 자기 배만 채우고, 자기 탐욕만 채우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부정해 버리죠.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마음과 행위는 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마음 속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신데도,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라며, 자기 힘과 자기 능력과 자기 지식만 최고로 여기며 살기 때문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한 번이라도 깊이 경험한 자들은 결코 그 하나님의 존재성을 부정하거나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더더욱 만나고자 더 찾고 더 두드리며 간구하는 자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사야 556-7절이 이렇게 말하고 있죠.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깊이 경험한 자들은 물론이요,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들까지도,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주문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제 다윗은 4-6절을 통해 이렇게 읊조리고 있습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죄악에 매여 있는 자의 특징은 영적으로 어둡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없고, 죄가 죄인 줄 모르고, 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주님의 사람들을 조롱하고 핍박하죠. 교회를 우습게 알고, 또 교회를 사유화하려고 하죠. 이 모든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데서 나오는 악한 결과들이죠. 그리고 그 결국은 내면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마침내는 영혼의 상실로 귀결됩니다. 참된 미래가 없는 인생으로 그치는 것 말이죠.

 

그러나 가난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떻게 합니까? 자기 힘과 자기 능력과 자기 지식으로는 그 어떤 것과 완벽하게 행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에,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기 인생을 의탁하며 전적으로 맡기며 살지 않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가 하나님을 믿고 의탁하기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도 그런 자의 피난처가 되어 주심은 당연한 일이죠.

그리스도인이 죄악을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며 합당한 신앙적인 태도입니다. 나아가 보다 더 적극적이고 진보된 신앙적 태도는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견고히 신뢰하면서, 타락한 세상 속에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것이죠. 단순히 나 혼자만의 안전과 편안함만을 누리고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게 아니라, 나와 더불어 사는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일굴 수 있도록 하는 자입니다. 곧 민족과 열방과 세계를 향해 주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 자 말이죠.

 

이제 본문 7절에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이 고백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 포로를 연상시키는 말씀입니다. B.C.722년에 북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했고, B.C.586년에 남유다마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했는데, 그들이 1,2,3차에 걸쳐 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고, 3차 침공때 성전과 성벽도 모두 허물어트렸죠.

그런데 그 영원할 것 같던 바벨론 제국도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했고,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이 칙령을 내려 모든 유다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무너진 성전을 재건토록 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제1, 2, 3차에 걸쳐 포로귀환이 이뤄졌고, 그로 인해 무너진 성전과 성벽도 완벽하게 재건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죠.

그렇게 해서 모든 게 제자리를 찾는 시점이 B.C.430년 어간의 일이었는데, 다윗이 이스라엘 왕국을 통치한 시점은 B.C.1000년 경의 일인데, 과연 다윗이 600년 뒤의 일을 알고서 이 시를 기록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의 역사적 관점이라면 결코 600년 뒤를 내다볼 수 없는 일이지만, 메시아적 관점, 곧 모든 역사적인 사건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론적인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충분히 600년 뒤의 일도 내다볼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더욱이 다윗이 집권하기 전에 블레셋에 의해 이스라엘이 압제를 받았던 것도 알고 있고, 그 전에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7년간 점령하여 새 터전을 마련한 일도 알고 있고, 애굽에 의해 400년간 종살이하다가 해방된 일도 다윗이 역대 전승들을 통해 다 듣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과거의 역사를 알고 있던 다윗이라면 미래에 하나님께서 어떤 역사를 펼쳐주실지, 능히 내다보며 이 시를 쓸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받는 것이 시온으로부터 나온다, 그 시온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시대에는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이고, 그 뒤 헬라제국으로부터 해방이고, 또 로마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이지만, 그 모든 시대의 해방이 육적인 해방이라면, 영적인 영원한 해방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나 이 세상의 어리석은 자들은 그런 영적인 해방은 전혀 신경쓰지 않죠. 오직 육적인 해방, 육적인 안일과 평안함만 좇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에 비해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직 이 세상 너머의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는 자로서,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진정한 피난처요 산성이신 하나님을 붙잡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의 삶이죠. 그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취할 자세입니다. 주님은 런 자를 통해 이 세상을 치유하고 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도구로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

 

 

야긴과 보아스

북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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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지만, 진정 지혜로운 자, 진정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과 함께 하는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심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오늘도 저희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 우리의 인생을 의탁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말씀을 저희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은혜의 현장으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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