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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시편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시16:1-11)

by 똑똑이채널 2022.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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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에서는 하나님을 하느님 곧 중국에서 한자말로 번역된 천주(天主) 하늘의 주인, 하늘님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하느님’이라고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죠. 하나 밖에 없는 주님 곧 지존자요, 이 세계에 유일하신 분임을 고백하는 말이 하나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이 하느님이냐 하나님이냐, 하는 논쟁은 철부지 아이들이 ‘아부지’가 맞냐 ‘아버지’가 맞냐 하는 것과 똑같은 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각 개인의 고백 속에 담긴 하나님 상(像)이죠. 나는 과연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모시고 있느냐 하는 점 말입니다. 하나님을 온 하늘의 주관자요, 온 세계에 유일하신 신으로 모시고 사는지 말이죠. 그 하나님을 온전히 모시는 사람은 내가 머물고 있는 모든 곳의 주관자, 통치자가 곧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에 공간이 되시는 분입니다. 아이들이 아버지의 배 위에서 놀고, 그 배 위에서 다리로 하늘을 빙빙 날게 해 주는 그런 공간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의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1절에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하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공격과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게 진정한 피할 길이요, 진정한 공간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왕의 살해 위협을 피해 도망쳐 다녔던 곳이 실은 유대 광야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광야라기보다는 하나님이라는 공간 안에 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공간 안에서, 다윗은 자신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또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 한복판에서 다윗이 찬양을 멈추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공간을 피난처로 삼고, 참된 안식처럼 삼고 있었던 것 말입니다.

그것은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는 시편 90편 1절을 통해 이렇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광야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인물입니다. 6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해 250만 명은 족히 될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 40년간 광야에서 산 인물이 모세였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침내 그 광야의 끝자락, 다시 말해 요단강을 건너 바라보는 가나안 땅을 지척에 두고서, 모세는 느보산에서 그 가나안 땅을 바라만 볼 뿐 자기 사명은 그 지점에서 끝나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죠. 한 마디로 말해 그는 40평생을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광야를 맴돌았지만, 끝내는 그 광야에서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시편 90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충분한 공간이 되셨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하고 말이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살 수 없는 그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리지 않게 해 주셨고, 의복 또한 헤어지지 않도록 해 주셨고, 신발 또한 닳아지지 않도록 해 주셨고, 빈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친히 공급해 주시는 그 광야의 풍성한 식탁, 풍성한 공급을 모세가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죠. 그야말로 힘든 그 인생길의 광야가 실은 하나님의 풍성한 공간이 되어 주셨다는 믿음의 고백을 읊조렸던 것이죠.

실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광야 같은 인생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왠지 모를 허전함과 공허감이 밀려들기도 하고, 나 혼자 있는 것 같고, 희망이 끊어진 척박한 땅에 존재하는 것 같은 광야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광야 같은 인생 속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친히 먹이시고 입히시고 공급하시는 그 은혜를 베푸셨던 것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풍성한 식탁, 풍성한 공간으로 은총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더욱이 그 광야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미드바르’는 말씀을 칭하는 ‘다바르’에서 나온 파생어입니다. 삭막한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의복과 신발이 헤어지지 않도록 보살핌을 받았던 것, 그것으로 감격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어제 이야기 한 스핑크스의 수수께기는 인간의 외형적인 삶, 육적인 필요를 채우다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게 인간의 본분이 아님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 삶은 실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인간의 삶은 어떤 지향성 곧 어떤 방향성을 지니고 살아가느야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는 하나님께서 식탁을 베푸시는 것으로 만족하는 미드바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곧 다바르를 받아먹고 살아갈 때 그들에게 영원성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하신 말씀과 똑같습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4:3-4)

그런 광야를 참된 말씀의 공간으로 삼고, 그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는, 그 광야 속에서도 하나님의 훈계를 듣게 되는 것이죠. 본문 7절에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하나님은 훈계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를 바른 길로 이끄시고자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 것이죠.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4절에 나온 것처럼 다른 신곧 다른 배를 섬기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다는 사실이죠. 밤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심령에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교훈하지만 우리는 다른 신을 섬기느라, 다른 데 신경을 쓰고 관심을 기울이느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새들은 지저귀는데, 아침마다 새의 노래를 듣는 사람은 많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죠.
물론 그것도 문제지만, 우리의 기도도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대부분 나 자신의 필요한 욕구를 통보하는 수준에서 끝나버리기 때문에 말이죠. 가톨릭이나 다른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침묵의 기도를 통해 신의 음성을 듣고자 하지만 개신교의 기도는 대부분의 하나님께 내 요구만을 아뢰는 수준에서 끝나버리는 것, 그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부족한 모습이기는 마찬가지죠.
그런 뜻에서 우리의 기도는 내 요구를 하나님께 통보하고 아뢰었다면, 그 뒤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침묵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으로 침묵의 기도를 드리는가? 말씀을 통해 나를 비추고, 나를 점검할 때에만 내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죠.
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불평하고 원망했던 이유도 하나님의 음성, 곧 말씀을 듣는 훈련이 부족했던 까닭 아닙니까?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미래와 희망을 주시고자 하시는데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재앙만 주시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 역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침묵의 기도에 게을리 했던 데 있었죠.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따르는 자에게 ‘생명의 길’을 보이시는 분입니다. 10-11절에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사망이 아닌 생명의 길을 보여주시는 분임을 고백합니다. 베드로 사도도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설교를 통해 다윗이 말한 생명의 길을 설교했죠. 생명의 길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임을 역설(행2:31)했죠. 그 부활의 주님이 승천하신 뒤, 오늘날엔 성령님께서 친히 당신의 자녀들에게 생명의 공간 속에서 함께 하십니다. 내가 거하는 곳이 비록 광야와 같을지라도 그곳에 성령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자에게 주님께서 새롭고 산 길을 열어주실 줄 믿습니다.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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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나를 지켜 주옵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광야 한가운데 있을지라도 생명의 길을 보여주시는 주님을 붙잡고 살게 하시옵소서. 미드바르에서 다바르로, 곧 말씀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저희들은 어떤 광야도 능히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이 광야 같은 세상에 친히 함께 하시는 성령님과 동행하며 그 음성을 들으며 살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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