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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시편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시13:1-6)

by 똑똑이채널 2022.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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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은 총 150편으로 엮여 있는데, 150편은 다섯 권으로 나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모세오경에 따라 그렇게 분류해 놓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읽어나가고 있는 제1편부터 41편까지가 제1권에 해당하는 시편들입니다. 그 다섯 권의 시편 중에 다윗이 쓴 시라고 표제가 붙어 있는 게 73개나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표제가 붙어 있는 않는 작자미상의 시가 50편이나 되는데 그 중의 일부도 다윗이 쓴 시로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됐든 다윗이 쓴 시로 알려진 73개의 시편들 중에 46개가 고난의 시에 해당되고, 46개 시 중에서 27개의 시가 제1권에 포함돼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시편 제 1권의 시들 중에 절반 이상이 고난의 시라는 뜻이죠.

 

왜 다윗은 그렇게 고난의 시를 많이 썼을까요? 다윗의 인생에는 왜 그런 고난이 많았던 걸까요? 왜 그토록 많은 대적자들이 있었던 걸까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고난과 원수들을 만났던 걸까요?

다윗의 시를 보면, 다윗이 실의에 빠진 상태와 죽을지도 모를 상황에서 불안하여 탄식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도대체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기에 원수들이 그렇게 많았던 것일까요? 다윗은 선한 자였고 반대로 상대가 나쁜 자들이었기에 원수가 그렇게 많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다윗에게 문제가 있어서 원수들이 생긴 것일까요? 이를테면 화합할 수 있는 데도 감정적으로 상대를 대했기 때문에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원수 맺는 것은 육체의 일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원수 맺는 것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이라고, 다시 말해 육체의 소욕을 가진 자에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원수나 대적을 많이 두고 살아가는 사람을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죠.

 

그렇다면 다윗은 왜 그렇게 원수가 많았던 걸까요? 다윗이 육체의 일을 행하는 삶을 살았기에 그랬던 것일까요? 물론 다윗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편에 기록된 다윗의 시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다윗은 너무 처참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그가 써 내려간 고난의 시들, 1권 가운데서 절반이 넘는 시들이 다 고난을 읊조리고 있는데, 왜 그렇게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것일까요? 여기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죠. ‘그 원수가 어떻게 생겼느냐?’, ‘그 원수의 정체가 무엇이냐?’하는 점입니다. 내가 힘쓰고 애써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면 원수가 사라지게 되고, 또 인생도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죠. 그런데 모든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만들면서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이 과연 의의 길을 걷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히려 의의 길이 아니라 비열한 삶을 살아가는 일일 수도 있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적당히 타협하고 비위를 맞추며 승승장구하는 삶을 사는 경우가 그렇기 때문이죠. 반대로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하는 속담처럼, 자신이 의로운 길을 걷겠다고 고집하는 것 때문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고 조롱을 받는 사람도 있죠. 혼자 의로운 척, 혼자 잘난 척, 혼자 깨끗한 척 한다면서 말이죠.

어떻게 보면 다윗은 후자의 경우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무엘 선지자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내색하지 않고 골리앗을 쓰러트리는 의로운 사명을 다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사울을 죽인 자는 천 천이요, 다윗을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하는 창화하는 소리가 울러 퍼졌죠. 그만큼 블레셋의 칼날로부터 이스라엘을 지켜낸 다윗의 공로로 인정하고 찬사를 보낸 것이었죠. 그런데 그런 의로운 공적을 이끈 다윗을 주변 인물들, 심지어 다윗의 형제들조차 시기하고 질투하는 모습이었고, 사울 왕도 다윗을 눈여겨보기 시작했죠. 그렇게 의로운 공적을 세운 다윗에게 주변의 대적들이 생겼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죠.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 다녔는데, 두 번씩이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다윗은 기름 부은 왕을 죽이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 칼을 내려놓았죠. 그런데 사울은 자기 목숨을 살려 준 다윗을 이제는 내 버려두는가? 아니죠. 호시탐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더 기세등등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좇아다닌 것을 우리는 다 읽어보았습니다.

그토록 다윗이 의의 길을 걷고자 하는데도 악한 자들, 대적자들이 다윗을 괴롭히고 공격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다윗이 겪은 고난은 다윗이 악행을 자행해서 생긴 게 아니라, 선하고 의로운 길을 걷는 그 길목 속에서 마주한 일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왕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죠. 그가 왕권을 누리고 있는데, 큰 실수를 범하여 집안이 휘몰아치는 폭풍을 맞이할 때, 그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예루살렘 궁으로 진격해 오지 않았습니까? 그때 다윗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기드론 골짜기로 도망을 가는데, 그때 사울 집안의 시므이라는 자가 다윗을 향해 “비루한 자여 비루한 자여 피를 흘린 자여 가거라 가거라.”(삼하16:7)하고 조롱하는 일을 겪었죠. 그때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저 자를 당장 쳐 죽이도록 허락해 달라고 다윗에게 간청하는데, 다윗은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명령하죠. 하나님께서 그의 입술을 통해 나를 책망하고 계신다면서 말이죠. 그 정도로 다윗은 고난을 겪는 가운데서도 의로운 길을 걸었던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는 다윗의 화려한 면만 보려고 하지만, 실상은 그에게도 고난으로 점철된 어두운 면이 없지 않았다는 것, 우리가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어야 하죠. 신앙인들에게도, 주일날 딱 한 번 예배드리고 자기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는 신앙인들이 아니라, 인생의 전반을 하나님께 드리며 말씀과 기도로 매일의 삶을 묵상하며 살아가는 자들도 고난으로 점철된 면들이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중요한 것은 다윗이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했다는 점이죠. 성숙한 신앙인들도 그런 관점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오늘 1절과 2절에서도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하고 탄식하고 부르짖는 기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에 어느 때라는 표현이 4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만큼 왜 숨어 계시나고, 왜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이냐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죠. 내가 번민하고 신음하는데 언제 이것이 끝날지 모르겠다고, 또 원수들이 자기를 애워싸는데 언제까지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탄식합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을 언제까지 살아야 하는 것인지, 하나님께 울부짖는 모습이죠.

3절에서는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내가 기다리다 못해 죽을 지경입니다, 하고 탄식하면서, 응답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내게 이런 삶이 지속되면 나를 조롱하는 이들이 더 기뻐 날뛸 것입니다, 하는 고백이죠.

 

그렇다면 그런 탄식으로만 다윗의 기도가 끝나버리는가? 아니죠. 이미 다윗이 쓴 몇 편의 시를 볼 때마다 느낀 것은 비록 절망과 낙담의 시를 써 내려가기 시작하지만, 그 끝 부분에서는 대부분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시로 끝맺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확신하며,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을 내다보는 것으로 그 시를 끝맺는 것일까요? 절망과 낙담의 상황 속에 자기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고, 끝끝내 그 속에서 자신을 건져주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셨기 때문이죠.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게 바로 그것입니다. 내 상황이 이전보다 훨씬 좋아지는 게 없을지라도,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지니는 것 말이죠.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면, 그것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고 극복해 나갈 수 있죠. 반대로 내가 일이 잘 풀리고 형통케 되고 다른 악한 자들 앞에서 잘 나가는 것 같은데,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내가 못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영적으로는 더 곤핍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죠. 그렇기에 어떤 상황이든지, 그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지닐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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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실의에 빠져 나오지 못하는 자들에게 소망이 되시는 아버지를 볼 수 있는 눈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의 길을 걸어가면서 겪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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