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하게 되면 두 부류로 갈라지게 됩니다. 한 부류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을 원망하고 신앙상태도 후퇴하는 경우죠. 다른 부류는 알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끝까지 머리를 조아리며 하나님의 은총을 갈망하는 부류, 그래서 끝내는 하나님께서 더 선한 길로 응답하심을 체험하는 경우죠.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 부류에 해당하십니까?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신앙인이라면 후자에 속할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실은 그 모습을 우리가 이미 살펴 본 적이 있습니다. 욥기서를 읽을 때, 그 욥의 모습이 그것이엇죠. 욥이 고난의 터널을 통과할 때 처음에는 그래도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며, 주께 복을 받았은즉 화를 받는 것도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하며 꿋꿋하게 믿음을 지킨 욥이었죠.
하지만 점차 그 고난의 터널도 길어지고, 주위 친구들과 나이 어린 사람들조차 욥을 향해 비난하고 공박하는 처지에 당하자, 그 시선이 점차 땅 바닥에 내려앉는듯한 모습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던진 질문이 그것이었죠. ‘왜 내가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어찌하여 의로운 내가 이런 고통의 상황에 직면해야 하는가? 어찌하여 하나님은 이런 상황 속에서 나를 구원해 주시는 은총의 손길을 베풀어주지 않으시는가?’하는 점들 말이죠.
그러나 그렇게 침묵하시고, 숨어계시는 듯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정하신 때에 친히 폭풍 가운데,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도록, 그 폭풍 가운데 친히 나타나셨죠. 그때 욥은 그 위대한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까? 욥기서 42장 5절의 고백이 그것이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전에는 주님에 대해 귀로 듣는 신앙의 상태 속에 머물러 내 멋대로 평가하고 재단했지만, 이제는 주님을 직접 만나고 체험하는 귀한 신앙 속에 거하게 됐다는 고백이죠. 그런 성숙한 신앙인은 어느 한 때의 점과 같은 상태로는 일굴 수 없고, 꾸준한 선과 같은 상태 속에 거할 때에만 보다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내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왜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지, 어찌하여 응답치 않으시는지 라고 원망하고 탄식하는 것보다 묵묵히 하나님께 그 은혜를 갈망하고 더 겸손히 간구하고 의탁하는 믿음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이죠. 그것이 보다 성숙한 신앙인로 자라가는 길이기 때문이죠.
오늘 읽은 시편 10편도 그런 고난 가운데 있는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를 엿보게 합니다. 그래서 1절의 첫 부분도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하고 탄식하는 모습이죠. ‘왜 멀리 계시며’ ‘어찌하여 숨어계십니까’하고 울부짖는 모습이죠.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신앙인들도 이런 상황 앞에 하나님께 그런 질문을 드린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왜’라는 질문 말입니다.
“하나님! 나는 착하게 살려고 하는데 왜 자꾸 뜻하지 않는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 세상에 악과 부조리가 이렇게도 기승을 부리는데 어찌하여 침묵만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하나님! 어찌하여 악한 사람이 그렇게도 승승장구하며 멋진 삶을 살아가는데 왜 방관만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하나님, 어찌하여 선한 사람이 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통받는데 내버려두시는 것입니까?”
본문의 다윗도 그렇고 고통당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왠지 기세가 등등하고, 안하무인이고, 교만하며,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을 왜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보고만 계시는지 말입니다. 그런 의문을 표할 때가 있다는 것이죠. 정말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면 불의한 사람을 그냥 놔둘 게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로 심판하시도록 해야 한다고 말이죠.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모습 가운데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누구의 비난이나 헐뜯음에도 그 존귀함이 조금도 손상되는 분이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완전하시고 온전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들 가운데 그 어떤 인간이 하나님께 험담을 할지라도, 결코 그 명예나 성품이 훼손당할 리 없다는 것이죠. 시간이 지나면,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그 결과가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언젠가는 그렇게 죄를 범한 인간, 악인의 형통함에 대해 분명코 죄 값을 무르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불의나 죄와 함께 하지 않는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에 대해 회개하기를 요청하신 것이죠. 회개하지 않은 죄는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죄를 싫어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지만, 때로는 즉각적인 심판을 행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좀 더 참아주시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주님이시죠. 집나간 둘째 아들이 이제나 저제나 돌아올까, 동구 밖에 나가 서성이면서 기다리듯이 말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즉각적인 심판을 원하시는 분이셨다면, 감히 그 어떤 인간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어쩌면 노아의 홍수 심판 때 모두가 심판당하고 말았겠죠.
하지만 하나님은 길이 참으시고, 인애가 풍성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실수와 허물 앞에 돌아오기를 기다려주시는 분입니다. 더욱이 참된 크리스천에게는 기다려 줄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통해 깨우치고 돌아설 수 있도록 몇 차례 말씀도 하시고, 상황과 사건을 통해 체험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죠. 그만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다윗도, 악인을 그냥 놔두시는 하나님에 대해 ‘어찌하여’하고 탄식하는 기도로 시작했지만, 14절 이후에 그가 고백하는 내용이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절까지만 해도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여전히 침묵하시고,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향해 탄식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이제 14절부터는 다른 어조로 고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주님께서는 보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 받는 자를 돌보시는 분이라고, 영원무궁하신 분이라고, 또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라고, 그리고 약한 자를 돌보시는 분이라고 당당하게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어찌하여?’ 라는 의문으로 탄식하는 기도로 시작했지만, 나중에 갈수록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임을 고백한 모습이죠. 마치 욥의 탄식과 갈등과 번민 이후에,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보고, 자기 눈으로 주님의 위대하신 역사를 손수 보게 된다는 고백과 똑같는 내용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어떤 신앙의 단계 속에 있든지 간에, 주님께 대해 귀로 들었던 부분보다 더 구체적으로 역하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눈 뜰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백 마디 말로 듣는 것보다 한 번이라도 깊이 주님을 살아계심, 주님의 사랑하심에 대해 체험한 자는 그 성숙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을 테니 말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살아계심에 눈을 뜰 수 있는 하루가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루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주님의 의도하심을 갈파하지 못한 채 의심했던 일들이 많습니다. 유한한 내 판단으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헤아리지 못한 채 탄식한 적도 많습니다. 그러나 욥과 다윗처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눈뜨게 하셔서, 매일매일 주님의 사랑하심을 목격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성숙한 신앙인들로 발돋움하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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