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은 시편은 마치 다윗이 친구들 간의 대화 형식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1절에서 시인은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하고 읊조리기 때문이죠 마치 다윗이 위기 상황을 맞이해 몸을 숨기려는데, 그 친구들이 산으로 도망하라고 조언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2절에서는 “악인이 화를 당기고, 쏘려 하는도다”하고 그 위기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른바 다윗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이고, 그 틈 사이에서 다윗의 친구들, 다윗을 아는 자들, 다윗을 아끼는 자들이 산으로 피하라고 조언하는 모습입니다.
성경에서 ‘산’은 보통 전쟁이나 위기 앞에서 ‘피난처’로 찾는 곳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다윗의 친구들도 현실적인 도피처를 찾아 떠나라는 말과 같습니다. 어찌보면 지극히 현실적인 제안이고, 실제적인 방편 같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도 좋지만, 실제적인 방편의 피할 길을 찾아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다윗에게 그런 조언을 하겠습니까? 다윗이 오직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고 있는 그 모습이 친구들, 아끼는 이들, 그를 아는 자들이 보기에 안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도 좋지만,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라면서,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나서야 한다는 것 말이죠.
그러나 다윗은 세상의 산과 같은 피난처보다 하나님을 더 우선순위로 삼는 자였죠. 시편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종종 요새, 산성, 피할 바위, 구원의 뿔, 반석 등으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그만큼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한 다윗의 모습이죠. 그런 고백들은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의 보호를 철저하게 확신하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표현입니다.
이런 다윗의 태도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을 아끼는 사람들 이었고, 누구보다 다윗을 염려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오히려 다윗이 어리석게 보였죠.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을 신뢰하라’는 그런 조언이었죠.
그것은 마치 하나님보다 이방의 세력들을 의지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도 같은 격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애굽을 의지하고, 또 바빌론과 결탁하고, 심지어 앗수르와 손을 잡으려는 지난 날의 모든 모습들이 그것이었죠. 그러나 그런 이방 세력들은 이스라엘에게 방패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사슬의 멍에일 뿐이었습니다. 그 까닭에 하나님께서 탄식하시는 모습이 수차례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4절부터는 반전을 가져옵니다. 그토록 다윗을 아끼고, 염려하는 사람들조차 다윗이 어리석다고, 현실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제발 현실적으로 안전한 곳에 피하라고, 그러니 산으로 도망치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4절 이후부터는 뭔가 확신에 찬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에서 모든 인생을 감찰하시고 살피시는데, 내가 산으로 향한들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는다면 그곳이 과연 안전한 피난처이겠느냐. 그것은 마치 개미 한 마리가 인간의 발등상 아래에서 허우적거리며 숨을 곳을 피해다니는 것과 똑같은 격이지 않겠느냐. 그럴 바에는 모든 인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더 절실히 매달리는 게 낫겠다는 고백이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요,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하나님 앞에 대적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고 힘들게 하는 악인들을 분명코 심판하실 것이란, 확신에 찬 고백입니다. 아무리 악인들의 세력이 강하고, 강력한 힘을 갖췄을지라도, 그들은 분명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담대하게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다윗의 위기가 실은 사울의 칼날을 피해 광야로 도망치던 8년간의 모습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계속 피할 곳으로 찾아 다니는데, 유대 광야로만 계속 도피하다보니까,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제발 높은 산 꼭대기로 숨어들어가야 안전하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죠. 그게 현실적인 지혜와 지식의 방편이라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비록 그가 현실적인 지략가일지라도 그 어떤 곳에 있든지 하나님의 신뢰를 받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내가 지혜롭게 행동하고 움직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보호하심,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헛것임을 다윗은 알기 때문이죠.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탁하다가, 어려움에 빠질 수 있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의탁하는 자들을 도우신다는 것을 자기 삶으로 경험한 다윗이었죠. 반대로 악인의 삶은 바람에 나는 겨처럼 언젠가 심판을 당한다는 것을 봐왔기 때문에, 다윗이 더더욱 하나님을 의탁해야 한다고 강하게 역설하고 있는 고백이죠.
그것이 대 반전을 가져오는 고백이라면, 6-7절은 더욱더 강력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몰아붙이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에게 불과 유황과 바람을 보낼 것이다, 확실하게 심판하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반면에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의 얼굴을 볼 것이다, 그의 신원을 회복시켜 줄 것이라고 읊조리는 것이죠.
이 고백을 듣고 있으면, 다윗의 어떤 상황이 눈에 떠오릅니까? 다윗은 계속 사울의 칼날을 피해 다녔죠. 사울의 3천명 특공대의 창과 칼과 화살을 피해 다녀야 했죠. 그때마다 얼마나 힘들고 고달팠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절호의 기회가 두 번이나 찾아왔죠. 엔게디 광야의 동굴에서(삼상24), 그리고 십 광야(삼상26)였죠. 그것은 누가 봐도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허락하신 기회로 해석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하들조차도 사울의 목을 단번에 베어버리라고 충언을 고했죠. 하지만 다윗은 그때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공의 앞에 세웠습니다. 세상에 약삭빠른 자였다면 다윗은 금방 사울을 쳐 죽였겠지만, 하나님의 공의에 내 맡기며 산 다윗은 그 순간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며 하나님의 뜻을 좇았던 것이죠.
놀랍게도 그때 사울을 살려줬는데, 사울은 그 뒤에 또다시 다윗을 추격하면서 죽이려 들었죠. 그야말로 사울은 세상의 현실대처에 능한 자, 세상에 취할 수 있는 모든 방편을 거머쥐고 살아가는 자, 그에 반해 다윗은 피난길 속의 어리석은 자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 세상의 약삭빠른 사울은 어떻게 됩니까?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적의 화살을 맞고, 그리고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결하지 않습니까? 반대로 다윗은 어떻게 됩니까? 8년 동안 유대 광야 지역을 도망쳐 다녔던 까닭에, 사울이 죽고 난 뒤 유다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는 방법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우리의 가정과 자녀들과 직장과 사업장도, 이런 하나님의 은총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높아지고, 우리가 승승장구하려는 세상의 방법도 찾고 두드리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그 놀라운 손길을 경험하는 은총을 받는 것 말입니다. 그 길은 다윗처럼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피난처 되심을 항상 기억하게 하옵소서. 그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이는 길일지라도, 우리 자신을 진리와 생명의 말씀으로 세울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의탁할 때, 주님께서 더 확실하고 더 놀라운 은총의 길을 열어주실 줄 믿사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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