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일까요? 이런 질문은 철학자들만 하는 게 아닙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질문을 던져 봄직 하죠. 나라는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하고 말이죠.
그런 질문에 대해 대표적인 정의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Homo sapience)이라는 것이죠. 동물과 구분되는 이성, 생각하는 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는 인간의 자율성도 없을 것이고, 그것이 없다면 모든 세계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힘도 지니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죠. 그래서 희랍철학 곧 그리스 철학에서는 인간의 이성을 가장 최고로 생각하고, 대신에 계시에 근거한 성경을 가장 진부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죠. 그 후에 독일철학자들도 성경 말씀을 아주 진부한 것으로 소외시켜 버렸죠. 이유인 즉 인간의 이성보다 하나님의 계시를 최고로 여기는, 바꿔 말해 하나님께 순응하며 살아야 할 인간은 온전치 못한 인간으로 봤기 때문이죠. 그래서 희랍철학과 독일철학자들 특별히 니체 같은 인간은 ‘신은 죽었다’고 말할 정도로, 인간 이성을 최고로 높이 샀던 인물이죠. 물론 그 이성조차도, 그들의 철학조차도 하나님의 계시와 동떨어진 게 아님을 소크라테스나 플라톤도 역설한 바 있습니다. 바꿔 말해 인간의 이성이 어느날 하늘로부터 뚝 떨어진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연관성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인간의 이성이나 과학적 지식조차도 하나님의 계시 곧 하나님의 말씀과 결코 무관치 않다는 점이죠.
두 번째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점이죠. 한자로 ‘人間’은 홀로 서 있는 나무 같은 존재가 아니라,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 ‘사이에’ 있는 존재가 참된 인간이라는 점이죠. 홀로서 독불장군처럼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죠. 그 사실을 일찍이 깨우쳤던 가톨릭계의 구도자 구상 시인은 그런 시를 남긴 바 있죠. “나는 홀로다. 너와는 넘지 못할 담벽이 있고 너와는 건너지 못할 강이 있고 너와는 헤아릴 바 없는 거리가 있다. 나는 더불어다. 나의 옷에 너희의 일손이 담겨 있고 나의 먹이에 너희의 땀이 배어 있고 나의 거처에 너희의 정성이 스며 있다. 이렇듯 나는 홀로서 또한 더불어서 산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의 삶에 그 평형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내가 입는 옷도, 내가 신고 다니는 신발도, 내 거처도 누군가 땀을 흘린 결과물들을 껴안고 살아가는 더불어 살아야 할 존재, 사회적인 존재인 것이죠.
세 번째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프랑스의 철학자 알버트 까뮈(Albert Camus)는 〈시지프의 신화〉란 책에서 인간을 그렇게 정의내린 바 있죠. 인간은 “무의미하고 기계적인 일상을 삶을 살아가는 부조리함의 존재”라고 말이죠. 일평생 가치 없는 노동으로 지옥에서 산꼭대기로 큰 돌을 밀어 오리며 삶을 깎아먹는 존재라고 말이죠.
그렇다면 성경에서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오늘 읽은 시편8편 4~5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사람’이란 단어가 먼저 등장합니다. 히브리어로 ‘에노스’를 가리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이란 뜻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처음 나오는 단어인데,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나서 다른 씨인, 셋의 아들을 낳고서 ‘에노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비로소 자기 한계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한계를 인식하고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는 뜻이죠. 두 번째 나오는 단어가 ‘인자’입니다. 히브리어로 ‘아담’입니다. 아담이란 히브리어로 흙을 가리키는 ‘아다마’에서 온 단어죠. ‘부서지기 쉬운 유한한 존재’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 흙으로 인간을 만든 것이죠.
그런 흙으로 지은 ‘아담’ 곧 ‘아다마’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또 창세기 2:7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 곧 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숨결이 히브리어로 ‘루아흐’ 곧 하나님의 영, 또 다른 철학적인 말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뜻하는 말입니다. 바꿔 말해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없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단순한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존재요,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들, 하나님과 관계성을 지닌 자들, 하나님의 말씀으로 호흡하며 살려고 하는 자들은 진정한 인간이죠.
그런 인간을 향해 5절에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라고 나오는데, 여기에 각주 1)을 보면 ‘하나님’이 아니라 실은 천사입니다. 천사란 영적인 존재이기에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죠. 그런 면에서 인간보다 월등할 수 있지만, 그러나 천사에게도 역할과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1장 14절에 보면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하고 말씀하죠. 천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겨야 할 존재라는 점이죠. 그렇기에 천사보다 조금 못한다고 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해도 육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천국에 입성하면 우리도 천사처럼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더욱더 하나님과의 관계성, 말씀을 좇아 사는 관계성, 하나님과 기도하는 관계성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아다마, 흙으로 지음 받았지만 하나님의 루아흐 곧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자녀들의 모습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무엇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을 단절시켰는가? ‘죄’입니다. ‘아다마’ 곧 흙으로 지음받은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단절을 가져오려다가 죄를 범했고, 급기야 더더욱 에노스 곧 유한한 죽음의 한계를 지닌 존재가 되어 버렸죠. 놀랍게도 그런 죄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인간이 실은 〈시지프의 신화〉에 나오는 허무주의에 빠진 인간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맺고 살아가는 인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내세와 천국에 대한 소망, 현실 세계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고, 인도하심을 받기 때문에 어려움 가운데서도 소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죠. 하지만 죄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짐승처럼 살아가는 자들은 이 땅을 끝으로 여기기 때문에 내세와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이, 허무와 허영 안에서만 살게 되는 것이죠. 그것보다 더 비참한 인생이 어디에 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읽은 시편 8편에서도 그런 인간, 하나님과 관계성을 지닌 자녀들이 고백하는 내용을 1절과 9절에서 똑같이 읊조리고 있습니다. 이른바 교차대구법에 걸맞는 특징의 시처럼, 1절과 마지막 절에서 똑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9절에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하나님께서 지으신 온 우주 만물을 바라보며 찬양하는 고백의 시를 써내려간 다윗입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의 계시에서 떠난 이성적인 인간이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니죠. 이 고백은 위로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배제한 채 아래로 수평적인 사회적인 동물만을 내세운 인간이 할 수 있는 고백도 아닙니다. 이 고백은 이 세상을 끝으로만 여기는 허무주의에 빠져 있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고백도 아니죠. 오직 위로 창조주 하나님과 아래로 그 하나님의 뜻을 받들며 사랑하며 살아야 할 인간의 존재성을 아는 사람만 고백할 수 있는 것이죠.
영국의 저명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박사’를 아실 것입니다. 그의 뇌는 세계적으로 천재지만 그의 사지는 불구이지 않습니까? 그는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인간의 뇌는 부품이 고장 나면 작동을 멈추는 컴퓨터와 같아서 고장 난 컴퓨터를 위한 천국이나 사후세계는 없다”하고 말이죠. 아무리 똑똑한 천재라 할지라도 그만큼 내세와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는 허영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내세와 천국에 대한 소망을 품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로 살 수 있기 바랍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창조된 저희들임을 믿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놓치지 않고, 어떤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받는 저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천사들이 돕는 은혜를 덧입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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