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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시편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시6:1~10)

by 똑똑이채널 2022.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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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서를 우리가 읽어봤지만, 욥은 인생의 깊은 좌절감과 절망감을 겪은 인물이지 않습니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지속되고,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하염없이 비명을 지르는, 그런 모습을 충분히 연상할 수 있죠. 저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불면증에 시달린 시간들을 3-4개월 넘게 지속한 적이 있었습니다. 뜬 눈으로 밤을 꼬박 새우고, 그리고 낮에는 헤롱헤롱 했던 적이었죠. 하루가 얼마나 길던지, 그야말로 괴로운 날들이었죠. 물론 저와는 다른 더 처참한 고통, 생의 목숨을 끊고 싶은 처절한 고통에 직면하신 분들도 이 땅에는 많을 것입니다. 육체의 고통과 심령의 고통으로, 그로 인해 신경까지 쇠약해지는 고통 말이죠.

 

오늘 읽은 시편 6편은 어쩌면 병상에 있는 자들의 노래일 수 있고, 마음의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이 탄식하며 부르는 기도의 시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고통이 너무 극심하면 실은 찬송도, 또 기도도 할 수가 없는 법이죠. 그저 하루하루 숨을 쉬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여길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 가운데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우리 주님은 내가 고통당할 때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아픔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정신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으며, 주님께 탄식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법이죠.

본문 1절에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크나큰 고통 속에 힘없이 낮은 목소리로 부르는 주님의 이름입니다. 그 소리는 간절하다 못해 애절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책망하지말라고 또 징계하지말라고 탄식합니다. 비록 자신이 그런 고통에 처해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모습이죠. 다만, 주님의 책망과 징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를 참아달라고 호소하는 모습입니다.

 

2절에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다윗은 자신의 질병으로 수척한 상태가 되었다고, 뼈가 떨릴 정도로 인생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고, 고통과 시련 가운데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의 갈등으로 인해 더욱 처절한 고통을 겪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마치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 뒤에는 애굽 군대가 좇아오는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다윗도 마찬가지죠. 8년 넘게 사울의 칼날을 피해 다녔는데, 유대 광야를 비롯해 모압 땅까지 숨어들어갔지만, 하나님께서 또 다시 유대 헤렛 수풀로 나가라고 했지만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사울이 추격해 오지 않았습니까? 그때 다윗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모세와 다윗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상태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 뿐이죠. 이것이 실은 우리 자신이 취해야 할 자세이기도 합니다.

 

3절에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 까지니이까 시편에서 영혼간절히 도움이 필요한 인간 자신을 의미합니다. 고통 속에서 시편의 기자는 자신의 인생 전체가 떨리며 존재가 소멸되는 느낌을 받는 것이죠.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끝날 것 같지 않은 하나님의 침묵이죠. 이는 욥기서를 통해 내내 생각해 본 바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참을 수 없는 육체와 마음의 고통을 더욱 더 힘들게 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침묵 기간이 얼마나 길어질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하는 게 그것입니다. ‘주여 어느 때 까지니이까이 같은 고통의 질문은 허공을 메아리치는 듯 마음속으로 울부짖습니다.

 

그래서 4절에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고통 가운데 시인은 주님께서 돌아오시길 간절히 구합니다. 이제 주님의 분노와 진노를 거두시며,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다윗은 그동안 이루었던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면서 주님께 용서를 구하는 게 아닙니다. 아무 공로 없으니,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모습이죠.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구원해 주시길 호소할 뿐입니다. 그의 간구는 몹시 간절합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 앞에서 간구하기 때문입니다.

 

5절에 사망 중에서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다는 것은 주께 나와 예배드릴 수 없고 찬양을 드릴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의 사망은 선과 악의 구별이 아닌 죽은 자는 절대 하나님께 나와 찬양을 드리는데 동참할 수 없다고 여겨왔습니다.

스올무덤을 가리킵니다. ‘무덤’, 사망앞에서는 하나님께 나아와 찬양 드릴 수 없고, 감사할 수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다윗이 그만큼 죽음 앞에서 안타까워하는 부분은 주님과의 영원한 단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죽음 앞에서 주님을 찬양할 수 없고, 주님께 감사할 수 없음을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6절에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뛰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자신에게 내려진 고난과 고통으로 기력을 완전히 잃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 고통을 과장되게 표현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어떻게 보면 제 3자가 보기에 다윗의 표현이 엄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표현이 더 과장되어도 자신의 고통을 다 표현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상태입니다. 다윗은 단순히 병 때문만이 아닌 자신의 원수로 말미암아 건강이 극도로 쇠약해 졌습니다. 사람이 몸이 아플 때 원수에게서 적대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 고통을 몇 배나 더하게 됩니다. 이미 욥의 친구들이 자신을 정죄하는 그 모습 속에서 충분히 살펴 본 바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8절 이후부터 분위기가 다른 고백을 합니다. 뭔가 확신에 찬 모습을 고백합니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 고통받는 시인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제 버리지도 않으시고 떠나지도 않으시며, 곁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이 사실 이것 하나만으로 인간은 자신이 가진 모든 고난과 고통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울음소리를, 그의 신음 소리마저 놓치지 않으시며 듣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제 9절을 통해 확신에 찬 마음으로 이렇게 외칩니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그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끝내는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욥이 고통의 터널을 지나 폭풍 가운데 현현하신 주님을 뵌 것과 똑같은 것이죠. 귀로 대하여 듣게 하였던 주님을 눈으로 뵌다고 고백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최후에는 결국 자신에게 주어질 주님의 승리에 승전가를 부르며 기자는 마지막 소절을 이렇게 부릅니다. 10절에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하나님을 찾는 자,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어떠한 고난과 역경 가운데에서도 이처럼 마지막 승전가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 그 하나님, 다윗의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실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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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우리에게 어떤 역경과 고난이 온다 할지라도 우리의 시선은 늘 하나님께 향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조롱하는 원수의 노래에 우리는 다만 주님을 더 크게 더 높이 찬양하게 하옵소서. 오늘 하루도 우리의 연약함을 돌보시며, 우리는 모두 오직 주의 은혜만을 사모하며 찬양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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