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예화)지난 주일 오후에 제 딸을 천안에 있는 대학교 기숙사에 데려다 주고 왔습니다.
그 동안 함께 지내던 딸을 떠나 보내는 마음이 괜히 울적했습니다.
나중에 시집 보낸다면 더더욱 울적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딸과 헤어지면서 그런 당부를 했죠.
“이제는 너 혼자 일어나야 하고 혼자 결단해야 한다”
“주일날 교회는 학교 앞에 있는 대학교회에 꼭 나가서 신앙생활을 잊지 말도록 해라.”
“룸메이트와 친하게 지내고 학교 선후배들에게도 잘 하도록 해라.”
“대학 4년을 마치고 나오는 날 산업기사 자격증과 전기기사 자격증을 따면 좋겠다.”
왜 그렇게 당부했겠습니까?
어디에서 살든지 간에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당부하고자 함이죠.
또 대학 4년을 공부하면서 두 가지 자격증을 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자격증을 가지고 목포시청이나 전남도청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도록 해 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미래를 생각해서 우리교회의 미래를 위한 밀알이 되도록 하는 것이죠.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깨달음)제가 70살이 되면 목회 현역에서 은퇴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과연 우리 교회의 미래를 세워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과 우리의 자녀들이지 않겠습니까?
저는 비록 은퇴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주님께서 부르실때까지 우리교회를 세워나가는 주역이 돼여야 하죠.
우리 김순라권사님도 그래서 성령에 충만하여 기도하는 모습의 본을 보이고 있는 게 너무 훌륭하죠.
또 다른 집사님들도 말없이 묵묵히 헌신하는 모습이 너무 귀한 모습이죠.
이 토대 위에 우리교회가 미래에도 세워질 수 있는 것은 다른 누군가 해 주는 게 아니죠.
우리가 기도하고 우리가 전도하고 우리가 세워가야 하고, 우리의 자녀들이 밀알이 돼야 하죠.
(적용)그만큼 제 딸에게는 대학 4년이라는 기간이 주어졌습니다.
저에게도 목회 18년의 기간이 주어졌습니다.
우리 각자는 주님께서 부르실 그 날까지 얼마의 기간이 주어졌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그 기간의 삶이 때로는 시험과 역풍이 몰아쳐오는 기간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을 회피하거나 도망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죠.
그 기간 동안 시험과 환란이 몰아쳐와도 그 과정을 통과하면 주님께서 축복의 문을 열어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사건입니다.
이때를 보통 30살로 추정하죠.
예수님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였고 자신이 목수일을 하며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마13:55)를 돌보며 살았죠.
그리고 30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역사를 받들고자 공생애 사역에 뛰어든 것이었죠.
이전까지는 어머니를 보필하며 동생들을 돌보는 가정의 맏이로서 역할에 충실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가정을 넘어 하나님나라의 일이라는 우주적인 역할에 충실한 예수님이셨습니다.
마치 부모의 품에 있던 자녀가 대학에 들어가거나 직장과 사회에 진출하는 것과 같은 격이죠.
(본문)그런데 이때 일어난 일을 본문 1절을 통해 다시 한번 살펴보시겠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깨달음)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곧 하나님나라의 일을 위해 대장정의 발길을 내딛는 그때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이죠.
왜 시험을 받으셔야 했을까요? 왜 시험을 받아들이셔야 했던 걸까요?
사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 전지전능한 하나님과 동등된 분 아닙니까?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때도 함께 하셨고,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실때도 함께 하신 분 아닙니까?
그렇다면 마귀 하나 쯤이야 단번에 물리칠 수 있는 분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이 이후에 군대 마귀도 말씀 한 마디로 물리치셨죠.
어디 그뿐입니까?
각색 병든 자도 고쳐주셨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토막으로 5천명을 먹인 기적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하필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셔야만 했을까요?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지녔지만 우리와 같은 인성을 지난 분(히4:13)으로 시험을 받을 수 있는 분임을 일깨워주기 위함이라는 사실이죠.
예수님께서도 배가 고프면 허기 지셨고 괴로운 일을 겪으면 힘들어했고, 고통스러울 땐 우셨습니다.
그런 인간의 연약함을 지닌 분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40일간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사건을 기록한 것이죠.
그리고 다른 다른 이유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시험받으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구약의 모세도 40일간 시내산에서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고, 이스라엘 백성도 광야 40년의 연단의 과정을 거친 것과 같은 격이죠.
이를테면 대학에 들어갔다고 해서 곧장 대학생활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리엔테이션을 거쳐야 하는 것과 같은 격이죠.
공무원 시험이나 취직 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곧장 직장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 수습기간을 거치죠.
아무리 하나님나라의 일을 한다고 해도 앞으로 헤쳐가야 할 일을 위해 40일간 시험받으신 것이었죠.
그것은 그만큼 예수님 홀로 사역하는 게 아니라 늘 성부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죠.
앞으로 펼쳐나갈 사역을 삼위일체 하나님과 늘 함께 생각하며 하나님나라를 받들도록 하는 것 말이죠.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할때마다 한적한 곳에 나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렸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죠.
(적용)중요한 것은 본문의 예수님께서 40일 시험받은 이 기간을 통해 사순절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사순절(四旬節)이란 부활절 전 40일기간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난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인 답게 살지 못하는 삶을 참회하는 절기죠.
사순절의 유래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깨닫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하나님나라의 일을 받들고자 하지만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나라를 받드는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시험받을 수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화)이것은 수요일날 살펴본 말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에베소에서 드로아 항구로 이동해 배를 태고 에게해를 건너 마게도냐로 건너갔죠.
마게도냐란 지금의 유럽대륙을 말하는 것이죠.
그곳 마게도냐는 바울이 6년전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베뢰아 교회, 그리고 아테네를 거쳐 아가야 지역인 고린도교회를 세웠죠.
바로 그곳을 차례로 거치면서 고린도교회까지 내려간 것이었죠.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들린 것은 에베소에 있을 때 고린도교회의 문제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죠.
바울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의 파벌문제, 음행의 문제, 제사음식의 문제, 은사 문제들 말이죠.
그걸 해결코자 에베소에서 두 번에 걸쳐 직접 방문했고, 네 번에 걸쳐 편지를 썼죠.
그런데 디모데를 보내서 해결코자 했지만 해결치 못했고 디도를 보냈는데 해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건너간 것입니다.
바울이 그곳 고린도에서 3개월간 머물 때 대접을 받고자 한 게 아니라 그 교회 성도들을 믿음으로 섬겼습니다.
더욱이 그곳 고린도에서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 로마서를 써 보냈죠.
그리고 이제 고린도를 떠나 곧장 안디옥교회로 돌아오고자 했죠.
그를 위해 고린도의 외항인 겐그레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울을 쥐도새도 모르게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탄 배에 함께 타서 그 바울을 바다에 빠져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있었던 것이죠.
대체 그 사실을 누가 바울에게 알려줬겠습니까?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그 누구도 바울에게 그 사실을 알려준 게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주님의 방법으로 주님의 사람을 동원해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를 알게 해 주신 것이죠.
그렇다면 얼마나 감사하고 기뻐할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에게 놓인 것은 이제 뱃길이 아니라 육로로 이동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더 큰 시험일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에서 육로로 빌립보까지 이동하는 거리는 600km입니다.
목포에서 서울까지가 300km라고 하니 두 배는 더 걸리는 거리죠.
당시 50대 후반의 나이라면 요즘 나이로 치면 그야말로 초로의 늙은 노구를 지닌 바울의 육신이죠.
그런데 바울은 그런 어려움과 고난을 이겨내며 600km가 넘는 그 길을 마다하지 않고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을 맞이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2차 전도여행 때 드로아 인근에서 복음을 영접하고 선교대열에 합류해 빌립보교회를 세운 이후에그곳에 남겨둔 의사 누가가 그였죠.
그때부터 누가는 바울이 로마에서 참수형 당하기까지 지근거리에서 바울의 육신을 돌본 사람이었죠.
바울은 간질이라고도 하고 안질이라고도 하는 육신의 질병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누가는 바울의 주치의가 된 것이었습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해 주는 것 같습니까?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더 넓은 로마를 향해 하나님나라를 받들고자 떠나려는 길목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을 죽이려는 시험과 음모와 환란을 맞이한 것 아닙니까?
마치 본문의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받들고자 공생애 사역을 위해 나가려고 하는데, 그때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붙여주셔서 그 시험과 음모를 이겨냈고, 600km가 넘는 길을 마다하지 않고 나아갔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준비하신 의사 누가를 만나 그의 남은 일생에 주치의가 되게 해 주셨다는 사실이죠.
(적용)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40일 시험을 받으셨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도우심속에 능히 이겨내고 이후 가는 곳마다 승리하셨습니다.
고난의 문이 축복의 문으로 열린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죠.
고린도에서 안디옥교회로 돌아오는 길에 바울을 죽이려는 자객들이 있었지만 그걸 피해 600km를 걸어올 때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주치의를 만나게 해 주셨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사순절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와 고난을 묵상하고 각자에게 다가오는 시험들을 통과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네 자녀가 부모의 품을 떠나 드넓은 세상으로 발을 내딛을 때 부모인 네가 얼마나 걱정스럽고 안타까워했느냐?”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당신의 자녀가 하나님나라를 일구고자 세상을 향해 발길을 내딛을 때 얼마나 걱정하고 염려하겠느냐?”
“그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고 온갖 음모와 모략과 사단의 세력들이 역사하는 곳이지 않더냐?”
“대학생활이든 직장생활이든 그 어떤 생활이든 그곳은 하나님나라와 사탄의 세력들이 충돌하는 곳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일수록 예수님을 바라보며 온갖 음모와 모략과 시험을 이겨내야 하지 않겠느냐?”
“광야에서 사단에서 40일간 시험을 받으신 에수님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이겨냈듯이 말이다.”
“바울도 고린도에서 배타고 안디옥교회로 갈 때 유대인들이 죽일 음모를 알고 600km를 걸어갈 때 남은 일생의 주치의 누가를 만나게 해 주셨듯이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비록 인생의 삶이 네 계획대로 되지 않고 때로는 시험과 환란과 뒤틀림으로 막히는 것 같아도 낙심하지 말도록 해라.”
“부모 품을 떠나 드넓은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을 때도 세상은 너를 놔두지 않고 흔들어댈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라.”
“이 세상은 하나님나라와 마귀의 세력이 충돌하는 곳이니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을 붙잡고 사는 길이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40일간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연약함이 있었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시험을 이겨냈듯이 말이다.”
“바울도 자객의 음모와 살해 위협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겨냈고 600km를 걷는 그 과정도 인내하며 이겨냈듯이 말이다.”
“그러니 지금 너에게 다가오는 고난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축복의 문을 열어주시려는 과정임을 믿고 더욱 믿음으로 이겨내길 원한다.”
(찬양)너 시험을 당해 죄짓지 말고 너 용기를 다해 곧 물리치라
너 시험을 이겨 새 힘을 얻고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네 친구를 삼가 잘 선택하고 너 언행을 삼가 늘 조심하라
너 열심을 다해 늘 충성하고 온 정성을 다해 주 봉사하라
[후렴]우리 구주의 힘과 그의 위로를 빌라 주님 네 편에 서서 항상 도우시리(새찬송가 342장)
(예화)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할 때 빼 놓지 않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이 바로 그 사람이죠.
다윗은 19살 때 이스라엘 나라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런 그가 육척장신 골리앗을 쓰러트렸을 때, 그 이후 사울 왕의 사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했죠.
자신의 최정예부타 3천명을 동원해 다윗을 붙잡아 오도록 했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다윗은 그때부터 도망자 삶을 살았죠.
그 기간이 얼마 동안이었습니까?
무려 8년이 넘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이스라엘의 경내는 물론 유대 광야로 도망쳤고, 이후 블레셋에 들어갔다가 미친 침을 하면서 목숨을 건졌죠.
그 후에 또 유대 광야를 전전긍긍하다가 증조외할머니의 땅 모압으로 숨어들어갔죠.
그곳에서 쉼을 얻으면 될텐데 하나님께서는 선지를 보내 또 다시 유대 수풀로 다윗과 그 일행을 불러냈죠.
그리고 마지막 지점인 유대 광야 옆 블레셋의 시글락 지역에 들어가 있을 때, 그때 사울 왕이 블레셋과 전투를 벌이다 죽었죠.
더 이상 도망자 신세를 살 필요가 없던 다윗은 그때 비로소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고, 7년이 지났을 때 모든 이스라엘 지파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 8년간의 기간은 다윗에게 처절한 몸부림의 기간이 아니었겠습니까?
그 기간을 어찌 대학 4년의 기간에 외롭고 고독한 기간에 빗댈 수 있겠습니까?
그 기간을 어찌 취업을 준비하고 시험을 준비하는 그 기간의 어려운 과정에 빗댈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시험과 시련의 과정을 통과해야만 그 이후의 축복의 문이 열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기간의 시험과 시련과 고난을 통과해야만 축복의 문이 열렸을때도 교만하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살지 않겠습니까?
(깨달음)바로 그를 위해 다윗에게 8년간의 도망자 삶, 그 고난과 고통의 세월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었죠.
다윗에게 허락한 8년간의 고난은 앞으로 다가올 영광을 위한 예비의 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원성)그래서 로마서 8장 18절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깨달음)고난과 역경이 찾아올 때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현재의 고난은 앞으로 다가올 영광의 관문이라는 사실이죠.
예수님께서 맞이한 40일간의 시험도 앞으로 사역할 하나님나라를 위한 승리의 발판이 되게 하신 것이었죠.
바울이 맞이한 음모와 600km의 거리는 남은 인생의 주치의를 만날 축복의 발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화)한국 교회사 초기에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활동을 한 분 중에 팬윅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후에 우리나라 이름으로 편위익으로 개명을 한 선교사죠.
언더우드나 아펜젤러처럼 잘 알려진 분은 아니지만 굉장히 훌륭한 선교사님이셨죠.
그분은 남의 터 위에 집을 짓지 않겠다는 신조를 가지고 시골에 들어가서 조용히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특별히 원산 지역을 중심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그 팬윅 선교사의 일화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그가 원산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의 집에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고 있는데, 밖에서 그걸 싫어하는 청년들이 와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죠.
“서양 악귀 물러가라! 여자를 도둑질해가는 놈은 물러가라! 아이들 유괴해가는 놈은 물러가라!”
초기에 전도할 때 여자들과 아이들이 잘 믿고 교회에 나오니까, 동네 청년들이 그렇게 비난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교사는 그런 비난의 소리에 전혀 동요하지 않고 웃으면서 평상시 처럼 얘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팬윅 선교사가 머물고 있던 집주인이 물었죠.
“당신은 화도 안 납니까? 동네 사람들이 당신더러 서양 악귀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때 팬윅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서양 악귀가 아니라 편위익이에요. 저 사람들이 뭐라 하든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나는 괜찮습니다.”
그러자 그 집주인은 그 선교사의 태도를 보고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깨달음)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대학생활이든, 사회초년병 생활이든, 직장생활이든, 인간관계의 삶이든, 내가 입으로 전도를 하지 않을지라도, 삶으로 주님의 자녀인 것을 드러내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한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시험과 환란과 때로는 모함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나라와 마귀의 세력이 영적 전쟁을 벌이는 세상이기 때문이죠.
그때 우리가 시험받을 때, 환란과 역경과 고난과 모함이 찾아올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40일 시험을 받으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이겨낸 것처럼,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위익 선교사가 온갖 시험과 구박과 모함을 받는 상황에서도 웃으면서 이겨냈듯이 그런 믿음의 주역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것이 사순절을 맞이하여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인 답게 사는 길을 뒤따르는 것인 줄 믿습니다.
(내음성)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가 대학생활을 하고 사회초년병생활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인간관계를 맺을 때 시험과 환란이 없을 수가 없네요.”
“그때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누구를 의지해야 할지 일깨워주시니 감사드려요.”
“40일간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그 시험을 이기긴 주님을 붙잡고 살게 해 주세요.”
“편위익 선교사도 온갖 미움과 구박과 모함을 받았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한 것처럼 저도 저도 고난의 상황에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겨내게 해 주세요.”
“내게 다가오는 환경과 고난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축복의 문을 열어주기 위한 과정임을 믿고 온전히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해 주세요.”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과하셨을 때 부활의 영광을 맞이한 것처럼 나에게 닥쳐오는 십자가의 고난을 묵묵히 짊어지고 이겨내게 해 주세요.”
(찬양)잘 이기는 자는 상 받으리니 너 낙심치 말고 늘 전진하라
네 구세주 예수 힘주시리니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후렴]우리 구주의 힘과 그의 위로를 빌라 주님 네 편에 서서 항상 도우시리(새찬송가 342장)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만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또 겸손하게 우리를 빚으시고자 시험과 고난을 허락하시는 아버지입니다.
그때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오직 십자가를 짊어지신 주님, 광야에서 40일간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 시험과 고난을 이겨내길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대학생활을 하는 자녀들도, 취험과 시험을 준비하는 자녀들도, 사회초년병의 삶을 살고, 인간관계를 엮어나가는 그 모든 삶이 실은 시험과 역경의 삶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현재의 고난은 장차 다가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매순간 생각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 40일의 시험을 통과하셨을 때 공생애 3년의 삶이 승리의 삶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으로 만 왕의 왕으로 승천하셨습니다.
사순절 첫주를 맞이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는 각자의 삶을 참회하는 절기로 삼도록 하십시다.
이런 참회의 절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닥쳐오는 온갖 시험과 고난도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믿음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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