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예화)성자(聖者)처럼 존경받는 나이 많은 한 수도사가 정원에서 흙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수도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조금은 교만한 젊은 수도사가 그에게 다가오죠.
경험 많은 수도사는 그 후배 수도사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자네, 이 단단한 흙 위에다 물을 좀 부어주겠나?”
그래서 젊은 수도사가 그 흙에다 물을 부었습니다.
그러자 물은 흙에서 스며들지 못하고 튕겨 나갔습니다.
그때 나이 많은 수도사가 그렇게 말을 했죠.
“오 이런, 물이 흙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는구먼. 그렇지?”
그러더니 나이 많은 수도사는 옆에 있는 망치를 들고 단단한 흙덩어리를 깨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흙을 모아놓고 젊은 수도사에게 다시 한번 물을 부어보라고 말을 하죠.
그러자 물은 잘 스며 들었고 부서진 흙을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광경을 보여주던 젊은 수도사에게 그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제야 흙 속에 물이 잘 스며드는구먼. 이제는 씨를 뿌릴 수 있겠어. 그 씨는 반드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거야.”
그때 그 젊은 수도사도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 나이든 수도사는 그에게 이렇게 말을 했죠.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우리가 깨어져야 하나님은 우리 심령에 물을 주실 수 있지. 그래야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을 수 있어. 수도사들은 이걸 ‘깨어짐의 영성’이라고 말한다네.”
(깨달음)어떻습니까? 수도사들만 그렇겠습니까?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께서 깨트려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금 빚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씨를 뿌릴 수 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적용)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40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고통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와 유월절 은혜로 그들을 해방시켜주셨죠.
6개월간에 걸친 애굽의 10가지 재앙을 통해 애굽의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 보내게 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지도하에 애굽을 빠져나와 홍해 앞에 섰죠.
그때 하나님께서 홍해를 마른 땅처럼 갈라주시는 기적을 통해 그들은 홍해를 건넜고 뒤쫓던 애굽 군사는 모두 빠져죽었죠.
그 후 신 광야에 당도했을 때 그들이 애굽의 고기를 그리워하자 하나님께서는 빈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해주셨죠.
그리고 르비딤에 도착했을 때는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하자 하나님께서 그 반석을 치게 하셔서 생수를 공급해주셨습니다.
드디어 출애굽한지 50일 되던 오순절 날에 그들이 시내광야에 당도했을 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언약을 체결했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아버지가 되는 언약식 말입니다.
그 언약의 증표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내산에 불러 40일에 걸쳐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 곧 언약의 계명들을 주셨죠.
그 십계명은 애굽에서 살던 삶의 방식과는 달리 오직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길을 좇아 살라는 생명의 지침서였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모든 게 끝이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과 언약식을 맺으면 저절로 애굽의 방식과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것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40년간 광야의 삶, 정확히 말하면 38년간의 광야생활을 거쳐야 했습니다.
왜 하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38년의 광야생활을 거치게 하셨습니까?
신명기 8장 2절에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깨달음)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자녀로 삼아주셨지만, 그들을 40년 광야생활로 인도하신 것은 그것이었죠.
그들의 심령을 낮추도록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40년 광야길을 통해 그들의 심령을 깨트려 온전히 하나님만 붙잡고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셨던 것이죠.
(적용)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방식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는 우리 심령의 흙을 깨트려 은혜의 물을 부어 열매맺게 하시는 분이시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심령을 깨트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붙잡고 살도록 광야길로 인도하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예수님께서는 30살까지 가정의 살림을 책임지는 맏형으로 사셨습니다.
어린 나이에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요셉을 대신해 목수 일을 하면서 어머니와 네 명의 동생을 책임지며 사셨죠.
이제 나이 30이 되어 가정을 떠나 하나님 나라의 공생애 사역에 자신의 생을 던져야 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에게 이끌려 광야로 나가 40일간 시험을 받았다고 지난 시간 살펴봤습니다.
바로 그것으로부터 사순절(四旬節)의 유래가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순절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는 절기요,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참회하는 절기라고 했죠.
부활절 전 40일 기간을 사순절로 지키는 이유가 바로 예수님께서 40일간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그 장면에서 찾고 있는 거죠.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셔야만 했습니까?
성부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과 동등된 분으로, 천지의 창조주요 이 세상의 주관자이신 삼위일체 성자 하나님이신 말이죠.
이후 공생애 사역을 할 때 군대귀신도 쫓아내셨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토막으로 5천명을 먹이고도 남기신 분이죠.
심지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셨고, 죽은 나사로도 살려내신 분이 예수님이신데 말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은 우리와 같은 인성을 지닌 분임을 일깨워주고자 함이셨죠.
우리처럼 힘들면 쓰러지셨고, 고통스러우면 괴로워하셨고, 슬프면 울 수 밖에 없으신 예수님이셨죠.
그 연약한 인성을 지닌 분으로 공생애 사역할 때 매순간 하나님 아버지만 붙들며 살도록 시험의 과정을 거친 것이었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그곳이 어디로 나옵니까?
(본문)오늘 본문 1-2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원해)예수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곧 성령 안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곳은 ‘광야’였습니다.
우리말 ‘광야’는 헬라어로 ‘에르모스’(ἔρημος)입니다.
그 뜻은 장소에 있어서는 사막을 가리키는 말이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홀로’, ‘익숙하지 않게’하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르모스’라는 단어는 구약의 히브리어 ‘미드바르’(מִדְבָּר)와 같은 말입니다.
이는 ‘-로부터’ 곧 장소를 뜻하는 히브리어 ‘미(מ)’와 ‘말씀’을 뜻하는 ‘다바르’(דָּבַר)의 합성어입니다.
이것은 ‘성소’란 단어도 마찬가지죠.
‘성소’는 히브리어로 ‘미크다쉬’(מִקֹּדֶשׁ)입니다.
이 단어 역시 ‘장소’를 뜻하는 ‘미’(מִ)와 ‘거룩’을 뜻하는 ‘카도쉬’(קֹדֶשׁ)가 결합된 단어(시20:2)입니다.
그만큼 ‘미드바르’(מִדְבָּר) 곧 광야란 ‘다바르’(דָּבַר)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이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궁궐에 살던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부르신 이유도, 또 호렙산 광야로 부르신 이유도 바로 그것이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울을 찾아와 만나주신 이후에 그를 아라바 광야로 부르신 이유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모세를 광야로 부르신 것은 애굽의 힘과 능력과 자랑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도록 하기 위함이죠.
바울을 광야로 부르신 것은 이전에 율법교사와 바리새파라는 자기자랑과 자기애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신 것이죠.
뭔가 익숙한 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뭔가 사람들로부터 고독해지지 않으면 자기 심령을 비우지 못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바로 그런 과정을 거치도록 하나님께서 모세나 바울을 광야로 부르신 것이죠.
(깨달음)오늘 본문의 예수님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있는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굳이 광야로 내몰아 마귀에게 시험을 받게 하신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죠.
예수님 당신의 신성을 내려놓고 인성을 지닌 채로 겸손하게 하나님 아버지를 붙잡고 의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 말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깨트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에 온전히 내어 맡겼던 것입니다.
(주문)그렇다면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우리의 심령을 깨트리시는 은혜의 광야로 인도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이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의 음성을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왜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광야의 시험으로 이끄셨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40년 인생길로 인도하셨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왜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호렙 광야로 인도하셨는지 너는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왜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찾아와 만나주셨는지, 왜 그를 아라비아 광야로 이끄셨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심령을 낮고 낮은 상태로 빚으셔서 아버지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지 않았더냐?”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의 심령을 깨트려서 오직 하나님만 붙잡고 살도록 광야 40년간 인도하셨지 않느냐?”
“주님께서 모세를 광야로, 바울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도 오직 가난한 심령으로 빚으시고자 인도하신 것 아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때론 광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의 심령을 깨트려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지 않겠느냐?”
“때로는 굳은 흙과 같은 심령을 깨트려 부드러운 심령으로 빚으시고, 때로는 교만한 심령을 깨트려 모세처럼 사용치 않겠느냐?”
“그 완고한 바울을 깨트려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으시듯이 오늘 너를 새롭게 깨트려 하나님나라의 주역으로 삼지 않겠느냐?”
(찬양)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주 자비 강같이 흐르고 주 손길 치료하네
고통받는 자녀 품으시니 주밖에 없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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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지)본래 광야는 일교차가 심한 곳입니다.
목초지가 없기 때문에 생존에 적합한 공간이 아닙니다.
더욱이 예측할 수 없는 사막의 모래바람과 맹수와 전갈이 득실거리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모세도 바울도 그리고 수많은 사막의 교부들조차 그곳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심령을 깨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빚으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살고자 한 것입니다.
(원해2)그래서 광야를 칭하는 히브리어 ‘미드바르’는 ‘말씀’을 뜻하는 ‘다바르’에서 파생된 단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뜻하는 다바르에서 ‘미드바르’ 외에 또 다른 단어들이 파생되고 있습니다.
우선은 ‘다바르’가 ‘드비르’(דְּבִיר, 시28:2)가 되면 ‘지성소’(holy oracle)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지성소가 나아가는 은혜를 덧입게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예배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 앞에 자기 심령을 깨트리고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지성소로 나아가는 은혜를 덧입게 해 주신다는 뜻가 같은 것이죠.
‘말씀’을 뜻하는 ‘다바르’에서 또 다른 단어가 파생하는데 그것이 ‘디베르’(דִּבֵּר, 사5:17)입니다.
‘디베르’란 ‘목초지’ 곧 ‘목장’(pasture)을 뜻하는 말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서도 말씀을 붙잡고 살 때 그 인생이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와 같은 목초지 인생이 된다는 뜻이죠.
그런데 ‘말씀’을 뜻하는 ‘다바르’에서 가장 좋지 않는 뜻의 단어 하나가 파생합니다.
그 단어가 바로 ‘데베르’(דֶּבֶר, 신28:21)입니다.
'데베르'란 패스트와 같은 ‘역병’ 곧 ‘전염병’을 뜻하는 말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살 때,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진 삶을 살 때, 그 인생은 전염병에 걸릴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가나안을 향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할 때 뱀에 물리고 전염병에 휩쌓인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영적인 가나안 땅인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말고 온전히 순종하여 살라는 뜻이었죠.
(깨달음)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받는 동안 광야로 나가셨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순종하고자, 그곳 광야로 나간 것입니다.
오직 그 광야에서 자기 목수의 기술도 내려놓고 세상에 의지하는 것을 깨트린 채 하나님의 말씀만 붙잡고자 말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가까이 하실 때,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고자 할 때, 그곳이 목초지였고, 그곳이 지성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귀에게 시험받는 동안 천사들이 수종들었다고 본문 11절에서 밝혀주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죠.
(예화) 65세라고 하면 요즘은 늙은 나이라고 할 수 없겠죠.
그러나 1950년대만 해도 65세는 은퇴하고 인생 퇴장을 선언해야 할 나이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켄터키주에서 65세가 되던 해에 새로운 인생을 향한 도전을 결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호주머니 속에는 105달러짜리 수표와 고물 자동차가 재산의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생을 그렇게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유일한 재주는 맛있는 닭고기를 요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까닭에 그는 흰색 정장 양복을 차려입고 닭고기 레시피와 양념통을 들고 곳곳의 식당 주인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자신의 닭고기 레시피를 채택해 준다면, 그리고 그 닭고기 요리를 팔게 된다면, 자기에게 5센트만 달라는 조건으로 말이죠.
그러자 식당 주인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면서 그를 쫓아내 버렸습니다.
그렇게 그는 1,009명의 식당 주인들을 만날 때마다 모두 거절당하고 쫓겨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1,010번째로 만난 식당 주인은 그의 레시피대로 요리를 만들어 보겠다고 하면서, 그의 조건을 수락했습니다.
그때 그의 감격이 얼마나 컸을지 우리는 능히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2년 내에 5개의 식당이 그의 조건을 수락했습니다.
그리고 11년 만인 1963년에는 식당 600곳이 그의 조건을 모두 수락하게 되죠.
그래서 시작된 프랜차이즈 사업이 바로 그 유명한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입니다.
그의 본명은 바로 ‘할랜드 샌더스’(Harland Sanders)입니다.
칠천팔기의 도전정신 속에 숱한 난관을 뚫고 나간 그는 1976년 전 세계에서 두번째로 존경받는 사업가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1980년에는 전 세계의 14,000여 개 매장을 거느렸고, 약 8만 4천 달러를 보유한 자산가가 되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세계 20만 마일을 여행하면서 KFC 사업을 건설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90세에 천국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니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부러워했겠습니까?
그의 부와 명성은 물론이고 그의 신앙심까지도 모두가 우러러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의 청장년 시절은 무척이나 교만한 사람이었다고 그 스스로 회고합니다.
미국에 불어닥친 경제불황을 겪으면서 그의 사업은 위축되었고, 경영하던 식당도 화재로 전소되자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로 인해 유일한 희망이던 아들마저 잃게 되었고 아내도 그의 곁을 떠나자 정신적인 공황까지 겪게 된 그였죠.
환갑이 넘은 그 나이 무렵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국가에서 주는 사회보장기금을 받아 살아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배당 앞에 앉아 찬양을 부르는,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한 여인의 찬양 소리가 그의 귓전을 때렸습니다.
성령님께서 그의 심령을 깨트리시고 그의 심령을 빚으시기 시작한 찬송가 382장의 노래였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어려워 낙심 될 때에 주 너를 지키리 위험한 일을 당할 때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60세가 넘은 샌더스는 그 찬송을 듣고 하염없이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난 날 교만하게 살아온 삶을 회개하고, 자신의 심령을 깨트려 겸손하게 빚으시는 말씀 앞에 온전히 낮추며 살기로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양념통을 들고 다시 일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때가 그의 나이 65세의 일이었고, 그때 주님의 말씀으로 재기하여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어떻습니까?
젊은 시절 식당 사업을 시작한 그를 하나님께서는 근 20년 넘게 인생 광야로 부르신 것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를 깨트리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금 그 영혼을 빚으시고자 말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믿으면서도 말씀을 떠나 있을 때는 그의 삶이 ‘다바르’가 아닌 ‘데베르’ 역병의 삶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그 심령을 빚어 말씀을 가까이 하게 하실 때는 그 삶이 ‘디베르’ 목초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내음성)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이런 기도를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일이 잘 풀리거나 승승장구나 높이 올라갈 때 예배와 말씀을 저버리는 일이 없게 해 주세요.”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더욱더 예배를 가까이 하고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하여 제 삶이 푸른 목초지가 되게 해주세요.”
“예수님께서 맞이하신 광야처럼 제 인생에 예기치 않는 광야가 펼쳐질 때 낙심하거나 절망치 않고 그곳을 드비르 말씀의 성소로 삼게 해 주세요.”
“제 인생에 교만을 꺾어 하나님의 심령으로 빚으시고자 ‘데베르’ 역병의 환경이 찾아올 때 그때 ‘다바르’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귀울이며 말씀으로 제 심령을 빚어주세요.”
“샌더스의 교만을 깨트리고자 광야의 역병 속에서 그의 심령을 말씀으로 겸손하게 빚으셔서 새로운 도전의 길을 열어주신 주님, 저에게도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제 인생의 광야서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겸손히 제 마음을 쏟으며 제 삶의 환경을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의 디베르로 빚어주시옵소서.”
“주님 말씀하시면 제가 나아가고, 주님 말씀이 없이는 어떤 것도 제 욕심대로 하지 않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사용해 주시옵소서.”
(찬양)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 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 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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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에 같이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언약백성,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말씀으로 빚으시고 말씀으로 새롭게 세우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몰아 겸손하게 빚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몰아 낮추게 하셨고, 모세와 바울을 광야로 이끌어 광야의 말씀으로 그 자아를 깨트리게 하셨습니다.
그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의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그 광야의 말씀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그 이후에 공생애 사역을 승리하며 나아가셨습니다.
그 광야의 말씀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가나안 땅에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 광야의 말씀안에서 모세도 바울도 모두 주님의 온전한 도구로 새롭게 쓰임받을 수 있었습니다.
젊은시절 20년 넘게 교만한 샌더스도 60대 초반에 광야의 말씀으로 그 심령을 깨트릴 때 기꺼이 순종하여 세계적인 기업가로 세워주시는 은혜를 덧입었습니다.
사순절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한 오늘 주님께서 우리 심령에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각자 새길 수 있지 않았습니까?
내 마음을 깨트려 주님의 그릇으로 사용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우리 함께 주님 앞에 고백의 기도, 결단의 기도를 드리도록 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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