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월요일 오후면 입암산을 올라간다. 지난 월요일에도 올라갔다. 건강관리 차원에서다. 집에서 걷기 시작해 유달경기장을 지나 백년로를 거쳐 이로동 행정복지센터 맞은편 산길로 올라갔다. 물론 입암산 정상까지 올라간 것은 아니었고 그 둘레길을 돌았다. 그 끝머리 지점인 갓바위터널 윗길에서 갓바위 쪽으로 내려가 해안길을 따라 목포문화예술회관을 거쳐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이었다.
한 시간 반가량 걸리는 그 길목에 내 딸이 동행했다. 운동을 너무 좋아한 딸은 본래 체육학과에 가길 원했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지도한다는 게 힘들고 교사 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너무 어렵다면서 나는 말렸었다. 그 과정에서 딸은 천안에 있는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에너지 신소재학과에 들어간 것이다. 이과 계통 중에서 그나마 취업률이 제일 좋다는 이유였다.
“새벽 1시까지 아르바이트 하는 것 힘들지 않아? 그 돈 모아서 뭐 할건데?”
“뭐 토요일과 주일만 하는 거라 괜찮아. 나 운전면허증 딸 거야.”
“네가 열심히 하니까 동생들한테도 본이 돼서 좋은 것 같아.”
“당근이지. 내가 맏딸이잖아. 그래서 더 할 게 없나 알아보고 있어.”
“다른 아르바이트를 또 한다고?”
“그래. 지난 번에 학원에 갔는데, 원장님이 학생들 수학 지도가 어떻겠냐고 내게 물어보던데.”
“거기서도 아르바이트 하면 좋겠다. 힘들게 일해도 하나님께 십일조는 꼭 드려야 해.”
“아니, 운전면허증 따는데 부족할 것 같은데?”
“작은 것 하나도 하나님께 드리면서 의탁하면 하나님께서 예쁘게 보지 않으실까?”
“알겠어.”
“혹시 부족하면 나한테 말해. 내가 보태줄게.”
입암산 중턱 의자에 앉아 딸과 나눈 대화였다. 딸이 토요일과 주일날 밤 8시부터 새벽 1시까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쉽지 않지만 그래도 하나님께 의탁하라고 당부한 것이다. 대학 생활과 앞으로의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지만 아르바이트하는 사소한 일부터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이었다. 그 말이 딸아이에게 어떤 명제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실제로 마주하는 날이 오기를 바랐다.
“나의 호흡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숨결이 아직도 내 코에 있느니라”(욥27:3)
욥이 수아 사람 빌닷의 말에 답변한 내용이다. 자신이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고 하나님의 숨결도 자기 안에 있다고 말이다. 사실 욥이 세 친구와 함께 나눈 첫 번째 대화는 4~14장까지 이어졌고, 두 번째 대화는 15~21장까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대화가 22~27장까지 진행된 것이다. 이 대화를 통해 욥은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해 밝힌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고, 무소부재하신 분이시다. 그것은 소위 하나님의 존재성에 관한 논점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다른 차원에서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인자하시고, 신실하시다고 하는 게 그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격적인 속성을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성은 신학적으로 ‘초월성’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속성은 ‘내재성’이라고 칭한다.
욥의 세 친구는 여태껏 욥을 공박할 때 하나님의 초월성만 부각시켰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분으로 온 세상의 심판자란 사실이다. 그만큼 하나님의 명제만 들이댄 격이었다. 그래서 엘리바스는 종교적인 잣대로, 빌닷은 현실적인 잣대로, 소발은 원칙적인 잣대로 욥을 정죄했다. 그만큼 그들은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해서 논박을 펼친 것이었다.
그러니 욥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욥이 위로받고 싶은 부분은 하나님의 명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이었으니 말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인자하시고 신실하신 분이라고 말이다. 욥이 듣고 싶어했던 바가 하나님의 내재성이었는데, 그 친구들은 무턱대고 하나님의 초월성만 읊어댄 것이었다.
마이클 프로스트·앨런 허쉬의 〈새로운 교회가 온다〉에서는 헬라적 사고와 히브리적 사고를 구별해서 정의한다. 헬라적 사고는 사변적인데 반해 히브리적 사고는 구체적이라고 말이다. 헬라적 사고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사유와 직관을 추구하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히브리적 사고는 역사적이고 실천적이기에 인격적인 하나님을 드러내 준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으로 생각한다면 욥의 세 친구는 헬레니즘 사고를 추구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욥에 대한 애환이나 애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오로지 인과응보격으로 하나님의 공의만 이야기해댄 것이었다. 힘들어하는 욥을 향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던 이유가 그것이다. 어찌 거기에 인간적인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욥은 친구들의 똑똑한 공박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숨결’을 놓치지 않은 것이었다. 친구들이 비록 자신을 조롱하고 정죄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의 숨결’로 표현한 것이며, 하나님의 들숨과 날숨(요20:22)을 통해 깊은 사귐 속에 거하고자 한 것이었다.
입암산 둘레길을 한바퀴 돌고 집에 돌아왔을 때 학원 원장이 딸에게 연락을 해왔다. 내일이라도 당장 학원에 와서 학생들을 지도해 보라고 말이다. 시급도 일반 시급보다 우대해 준다고 한다. 그로부터 며칠 더 지나서는 하당에 있는 음식점 한 곳에서도 딸에게 면접 제의가 들어왔다. 거기도 된다면 더 열심히 할 거라고 딸은 다짐한다.
딸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면 몸이 성할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아직 젊다면서 이것저것 부딪혀 보려는 딸이 대견스럽다. 그런 딸에게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해서만 이야기 한다면 나도 욥의 세 친구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의 내재성에 관해서도 더 많이 말해 주고 격려해줘야 할 것 같다.
가족처럼 허물이 없는 사이라 해도 누군가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면 하나님의 초월성만 들이대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과정을 헤쳐나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내재성으로 격려하는 게 올바른 처사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숨결로 욥을 품었듯이 지금도 당신의 자녀들을 품고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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