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가끔은 남한산성을 오르던 그때 일들이 떠오른다. 그 겨울철 눈보라를 뚫고 함께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땐 비늘 포대로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던 그분과의 추억 말이다. 나는 그때 30대 중반이었고 그분은 50대 후반이었다. 마천동 놀이터에서 전도하다가 만난 그분은 술에 취한 채 세상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그분과 함께 길동무처럼 둘이서 남한산성을 오르내리곤 했던 것이다.
물론 평상시에 그분은 점잖았다. 더욱이 그림에도 특출났고 시도 잘 썼다. 언젠가 윷놀이에 관한 시를 쓴 적이 있는데 나는 감탄하고 말았다. 너무나도 깊은 감동을 주는 시였기 때문이다. 그때 그의 시를 신춘문예에 보낼 수 있도록 내가 독려한 일도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젊은 시절 만화가로 살면서 겪은 힘든 일들 때문에 배운 술이 그때도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나는 본격적으로 알코올 중독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낮 12시까지 술을 마시다가 하숙집을 찾아가지 못할 때가 있었다. 하숙집은 이층집이었고 하숙생이 11명 정도 있었다. 너무 취한 상태라 엉금엉금 기어서 하숙집을 찾아가곤 했다. 그리고 하숙집으로 들어가서는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날마다 싸웠다. 집안을 온통 쑥대밭으로 뒤집어엎으면서 욕설과 폭력도 휘둘렀다.”
변정섭 목사의 〈나는 술의 제왕이었다〉에 나오는 이야기다. 청년 시절 술에 취해 술로 죽어가는 인생을 산 그의 모습을 고백한 것이다. 그러니 누군들 그를 만나면 혀를 내 두르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끝날 것 같은 그의 인생에 변화가 생겼다. 하나님께서 한 청년을 보내 그가 믿음의 길로 들어서도록 했고 자신처럼 벼랑 끝엔 내몰린 부랑자들을 품고 섬기는 목회자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 그의 아내는 눈물로 그를 기다렸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욥11:7-9)
욥의 세 번째 친구 곧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을 공박하면서 한 말이다. ‘나아마’란 지역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다만 칠십인역(LXX)은 소발이 ‘미네안의 왕’(king of the Mineans)으로 묘사하고 있다.1) 어쩌면 남부 아라비아 ‘마온’(삿10:12)의 족장이지 않나 생각해 볼 수 있다. 소발은 그가 욥에게 하는 말을 통해 볼 때 욥의 세 친구 중에 가장 성급하고 독단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소발이 욥을 향해 하는 말이 무엇인가? 소발은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게 여김을 받겠느냐’ 하면서 욥에게 회개를 촉구한다. 그런데 그가 하는 이야기 중에 백미와도 같은 고백이 있다. 하나님의 오묘하심에 대해 말하는 게 그것이다.
‘오묘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을 말하는 걸까?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99세의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낳게 하시겠다고 말씀하면서 밝힌 ‘전능자 하나님’(창17:1)을 가리키는 말이다. 히브리어로 ‘샤다이’(שַׁדַּי, almighty)다.1) 또한 오묘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완벽하심’을 칭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만물을 다 ‘이루신 일’(תַּכְלִית, perfection, 창2:1)을 가리키는 말이다.3)
그만큼 오묘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지전능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광대하신 지혜를 어느 인간이 측량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를 어느 인간이 감히 흉내 낼 수 있을까? 그분의 전지전능하심은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사55:8∼9) 그 어떤 인간도 따라 할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겠는가? 때로 하나님의 자녀에게 닥쳐오는 고난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미래와 희망(렘29:11)을 열어주실 수 있는 분이니 말이다. 그만큼 욥처럼 지금의 상황이 암울한 처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 희망의 길을 열어가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오묘하신 섭리가 그와 같다.
그것은 요셉만 생각해도 환히 알 수 있다. 요셉은 17살의 나이에 노예로 팔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다. 사람들은 그런 요셉을 두고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말할지 모른다. 감옥에 갇힌 요셉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묘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을 통해 요셉의 인생을 빚고 계셨다. 결국 13년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로 회복시켜 주셨다. 욥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소발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말과 행실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거다. 그는 하나님의 오묘하심에 대해 서는 잘 알고 있지만 오묘하신 하나님의 뜻을 욥에게 적용치 않은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욥을 다루시는조차 기다리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그만큼 그는 자기 경험과 티끌 같은 지식으로 욥을 정죄하고 비판할 뿐이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그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었다.
크리스천인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오묘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신실하신 분이라고, 인생의 목자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 위대한 고백을 쏟아내긴 하지만 길거리에 술취한 이들을 보면 손쉽게 판단해버리지 않나 싶다. 그만큼 오묘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도 그것만은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이들도 저마다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그들에게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얼마든지 새롭게 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그러니 저마다의 아픔을 안고 있는 이들에게 가장 좋은 게 무엇일까? 묵묵히 기다려주는 것이다. 그 속에서 오묘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는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1)https://biblehub.com/topical/z/zophar.htm
2)https://www.blueletterbible.org/lexicon/h7706/kjv/wlc/0-1/
3)https://www.studylight.org/lexicons/eng/hebrew/361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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