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서 친구 맺은 어느 분의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 대충 그런 이야기다. 동네 시장 난전에서 오랫동안 다니던 나물 가게가 있는데, 처음 터를 잡을 때부터 지금까지 20년 넘게 그 가게를 다녔다고 한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나물 파는 아주머니도 어느덧 50대 중반에서 칠순이 훌쩍 넘은 연세가 됐단다.
그런데 그도 나이를 먹어가서인지 언제부턴가 그 아주머니의 나물보다는 늙고 야윈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가게에 들릴 때도 건강은 괜찮은지 물어보곤 했단다. 그런데 작년부터는 그 아주머니가 가게를 쉬는 날이 종종 있었단다.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장사하던 아주머니가 가끔씩 눈에 안 보이던 날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짐작하기를 아무래도 그 할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그렇겠구나 하고 생각을 했단다.
그 후로 몇 달 동안 아주머니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그 옆에 장사하는 분에게 여쭤봤더니 암투병 중이라는 대답을 듣게 되었단다. 그런데 그 뒤에 그 아주머니가 다시금 장사하러 나왔다고 한다. 그는 뛸 듯이 기뻤단다. 그러면서 그 아주머니는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는 다 나았으니 치료만 잘 받으면 된다고 말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주머니는 시장에서 영영 볼 수가 없게 되었단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그때 그가 할머니를 떠올리며 생각한 게 뭐였을까? 사실 그 아주머니 곧 그 할머니가 50년 넘게 채소를 판 곳은 천장만 있을 뿐 여름과 겨울의 더위와 추위를 온몸으로 견뎌야 하는 시장 귀퉁이의 난전이었단다. 그래도 자식들 배를 곯리지 않고 입히고 가르쳐 결혼까지 시켰다고 자랑하던 아주머니였단다. 부모로서 책임을 다했고 먹고 살만한데도 투병 중에 나물 장사를 놓지 않는 이유가 뭐였을까? 돈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들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픈 까닭이라고 그는 생각했단다. 그가 할머니를 이해한 게 그것이다.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3-7)
욥의 두 번째 친구 ‘수아 사람 빌닷’이 욥에게 한 말이다. 20대 초반에 신학을 공부하던 내가 즐겨 외우던 말씀 구절이 여기에 들어 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라” 그 얼마나 외우기 좋고 듣기 좋은 구절인가? 크리스천 사업가들도 무척이나 좋아하는 구절이라 사업장 간판에 다들 걸어놓기도 한다.
그런데 수아 출신 빌닷이 욥에게 행한 권고는 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나온 말이다. ‘수아’(שׁוּחַ)는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의 소생(창25:2)인데, ‘빌닷’(בִּלְדַּד)이란 이름은 ‘혼란스러운 사랑’(confusing love)을 뜻한다. 1) 70인 역(LXX)은 빌닷이 수아 족속의 폭군으로 형제지간인 미디안 족속과 함께 거주했을 것으로 본다. 그만큼 빌닷은 아브라함과 혈족이었지만 아라비아를 떠돌던 족속의 후예답게 ‘사막의 지혜’를 추종한 자였다.
‘사막의 지혜’란 오늘날로 치면 이슬람의 신비주의자 ‘루미’(Muhammad Rūmī)의 지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공자의 〈논어〉나 노자의 〈도덕경〉을 꿰뚫고 있는 옛 현자들의 지혜에 빗댈 수 있다. 그런 빌닷이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한다 해도 지극히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첫 번째 사람 엘리바스가 발언한 부분에 대해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항변하자 두 번째로 나선 빌닷이 서슴치 않고 인과응보식 관점으로 욥을 공박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물론 빌닷의 논조가 틀린 건 아니다. 그가 말한 대로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고, 그분 앞에 자기 죄를 고백하면 용서해주시는 분이시고, 그런 관계회복이 처음에는 쉽지 않지만 점차 깊어지면 창대케 되는 은총을 덧입게 되기 때문이다. 악인은 심판을 받고 의인은 끝내 복을 받는 것도 그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공의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긍휼 곧 인간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공의로우신 분이지만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 공의보다 긍휼을 앞세우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앞세우지 않았다면 어찌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셨겠는가? 당신의 공의로움만 주장했다면 어느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었겠는가?
그처럼 빌닷이 사막의 지혜를 지녔다 해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욥을 품지는 못했다. 그러니 욥을 향해 ‘네가 회개하고 돌아서는 그 시작들이 미약하지만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될 것이다’하고 다그친다 한들 어떻겠는가? 그의 권고가 고통 당하고 있는 욥에게 어찌 사랑스런 권면으로 다가왔겠는가? 오히려 욥의 가슴만 후벼 파는 꼴이었다.
크리스천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언제나 함께 가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무신론적 인본주의에 빠지게 되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과격한 근본주의자로 전락할 수 있다. 힘들어하는 욥을 공박하는 빌닷의 말보다 시장 난전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아주머니를 바라보던 그 친구의 마음이 훨씬 깊게 다가오는 이유가 그것이다. 사람에 대한 긍휼,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또 하나의 마음이다.
1)https://www.blueletterbible.org/lexicon/h1085/kjv/wlc/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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