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어느 집사님 집에 가서 추모예배를 드렸다. 돌아가신 시어머님의 2주기 추모예배였다. 1년 전에는 집안 어른들과 형제들 사이에서 제사를 드렸는데 이번에는 새롭게 영적인 물꼬를 튼 것이다. 물론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남편과 집안 어른들 그리고 여러 형제를 설득하는 게 만만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어른은 새로운 것을 싫어한다. 이전에 해온 일들이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사뿐만 아니라 회사 일도 그렇고 일상의 다반사가 그렇다. 그런 과정에서 아랫 사람이 새로운 길을 연다는 것은 크나큰 모험이 아닐 수 없다. 때로는 눈물을 삼키지 않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어른이나 윗사람에게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일까? 관습처럼 행한 일들이 올바른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는지 한 번쯤 재고해 보는 것이다.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무작정 아래 사람이 따라주길 바라는 것은 올바른 처사가 아니다. 그런데도 계속 몰아세운다면 아래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신뢰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갑자기 너를 엄습하며 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욥22:10~12)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욥에게 세 번째로 하는 말이다. 이전과 달리 너무나 거칠고 과격하게 비난하는 말이다. 홍수가 덮는다는 말은 곧 죽음이 덮쳐온다는 말이다. 왜 이렇게까지 욥을 향해 거칠게 몰아붙이는 걸까?
사실 욥과 세 명의 친구가 나눈 대화는 욥기서 4~27장까지 계속된다. 첫 번째 대화는 4~14장까지 이어졌고 두 번째 대화는 15~21장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세 번째 대화는 22~27장까지 진행된다. 바로 이 세 번째 대화의 첫 번째 토론자로 나선 엘리바스가 욥을 향해 그토록 거칠게 공박한 것이다.
왜 그토록 욥을 몰아세운 걸까? 사실 처음 그가 욥에게 말할 때만 해도 점잖은 어른이 어린 아이에게 말하듯 타이르는 어조였다. 두 번째 대화에서는 좀 더 강경한 어조로 욥을 정죄하고 비난했다. 하지만 지금의 세 번째 대화를 통해서는 아예 죽게 될 것이라고 저주를 퍼붓는 모습이다.
그는 그럴듯한 이유를 들먹이면서 말한다. 욥이 이유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거나 헐벗은 자의 옷을 벗겼다고 말이다. 욥이 목마른 자나 주린 자에게 인색하게 대했다면서 말이다. 욥이 자기 권세를 이용해 부당하게 재물도 긁어모았다면서 말이다. 욥이 고아나 과부를 괴롭혔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욥은 전혀 그렇게 살지 않았다.
그런데도 왜 욥을 그런 행악자로 취급한 걸까? 엘리바스는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자기 소신을 굽히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욥에게 말하면 말할수록 점점 강경한 어조로 몰아붙인 것이다. 그만큼 사람은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히면 옳고 그름을 분별치 못하게 된다. 자기 합리화를 위해 왜곡된 사실도 선한 일로 해석하기도 하고 옳은 일도 그릇된 관점으로 단정해 버린다.
문제는 엘리바스의 그런 관점이 하나님에 대한 관점마저 왜곡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욥이 당한 고난을 인과응보의 관점으로 판단했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런 관점만 지닌 것이었다. 하나님은 선한 자에게 상급을 주시고 악한 자를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말이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셨다면 어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제물 삼으셨겠는가? 불의한 자를 모두 심판하셨다면 어찌 주님께 돌아온 자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 ‘숨어 계신 하나님’은 악한 자들이 주님께 돌아오도록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고 의롭게 사는 자들에게 당신이 정하신 날에 상급을 주시는 분이시다.
욥의 세 친구 중에 엘리바스는 가장 나이 많은 연장자요 연륜이 깊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그 연륜으로 욥을 품지 못했다. 오히려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혀 욥을 정죄하고 비난했고 죽음의 공포로 몰아세운 것이다. 문제는 그의 단면을 크리스천인 우리도 닮을 수 있다는 점이다. 나보다 아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해 나의 신념을 몰아붙이려는 것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새로운 물꼬를 튼 집사님은 정말로 지혜로운 분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잘 섬긴다 해도 자기 의에 사로잡힌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1주기 제사 때도 직접 참여치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번 2주기 추모예배 때 그 집안 어른들과 여러 형제들이 참여치 않았을 것이다. 집안 어른들과 여러 형제를 눈물로 품은 집사님의 삶에 숨어계신 하나님께서 귀한 상급을 베풀어주실 것이다. 그 집사님처럼 지금도 신실하게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귀한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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