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젊은이가 있었다. 똑똑하고 성실해서 장래가 유망한 청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재에 휘말린 그는 전신화상을 입었다. 자기 인생이 송두리째 사라졌다고 생각한 그는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주위 사람들은 그가 정신적인 안정을 찾도록 수도원에 보냈다. 하지만 수도원 원장과 성격이 맞지 않았는지, 괴물처럼 변한 자신의 외모 때문인지, 수도원 원장과 주변 사람들은 그를 기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부터 그는 삐딱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그 청년이 잠자리에서 뒤척이다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났다. 그때 어느 방에서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 기도의 주인공은 수도원 원장이었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위해 그토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 수도원 원장의 방을 찾아갔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수도원 원장의 목소리에 흐느껴 울었다.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대를 환난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넉넉한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즉 무릇 그대의 상에는 기름진 것이 놓이리라"(욥36:15~16)
엘리후의 이야기다. 욥과 세 명의 친구가 나눈 대화 이후 나이 어린 그가 나선 것이다. 계속해서 욥이 자기 의로움을 주장하고 세 명의 친구가 욥을 정죄하는 상황이 되풀이되자 더이상 참지 못한 그가 끼어든 것이다. 욥기서 1~3장은 서론이고, 4~27장은 욥과 세 명의 친구 사이의 토론이고, 28~31장은 막간을 이용한 욥의 독백이라면, 32~37장은 엘리후가 나서서 중재한 이야기다.
사실 엘리후는 ‘람 가문’(the family of Ram)에 속한 부스족(Buzite)의 후예다. 람은 다윗의 선조(룻4:19~22)인데 엘리후는 유다 지파의 후손인 셈이다. 부스족은 나홀(창22:20~21) 곧 아브라함과 형제 사이다. 그만큼 엘리후는 아브라함과 혈족 관계에 있는 것이다. 더욱이 엘리후의 이름은 ‘그는 나의 하나님이다’는 뜻이고,그의 아버지 바라겔은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뜻이다. 그만큼 엘리후는 하나님 앞에 의로움을 주장하는 욥과 권선징악의 도덕률만 내세우는 세 친구 사이에 중재자로 나섰던 것이다.1)
과연 엘리후가 주장한 바가 무엇인가? 32장에선 자신에게 전능자의 숨결이 있어서 나이가 어릴지라도 의견을 낸다고, 33장에선 욥이 자기 의로움을 주장할수록 자기 고립만 겪는다고, 34장에선 인간은 조삼모사 변덕이 심하지만 하나님은 변치 않는 분이라고, 35장에선 인간의 그 어떤 의로움이나 악행에도 하나님은 영향받지 않는 분이라고, 36장에선 곤고한 상황에서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신치 말고 잠잠히 기다리라고, 37장에선 자연계의 현상들을 바라보며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각각 말한다.
그만큼 엘리후는 욥이 겪고 있는 상황이 세 친구의 주장처럼 ‘인과응보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욥을 향해 도덕률이나 교육적인 가르침을 일깨우고자 한 것도 아니다. 궁극적으로 그는 하나님께서 믿어주셨던 그 영광의 자리로 욥을 재차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다시금 인식하는 계기로 삼으라는 뜻이었다.
사실 욥은 세 친구와 논쟁에 휘말리면서 고난 초기에 ‘위로 향하고 있던 하나님의 시선’이 점차 ‘자기 내부의 문제’로 초점을 옮겨왔고 그로 인해 자신의 좁은 시각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다. 엘리후는 그런 어리석음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자연계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바라보도록 권면한 것이다. ‘위를 향한 시선’을 다시금 회복하도록 중재한 것이었다.
이런 점을 볼 때 엘리후는 하나님께서서 보낸 대리자로 볼 수 있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멜기세덱처럼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그분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처럼 말이다. 욥과 세 친구 사이에 갑자기 등장한 것도 그렇고, 이후에 하나님께서 욥의 세 친구는 정죄하지만 엘리후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이 없는 점, 그리고 그의 등장 이후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직접 찾아오신 점이 그렇다.
화상 때문에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던 그 청년은 어떻게 됐을까? 그토록 죽고 싶어 했던 그였지만 결코 그는 죽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그토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어찌 죽을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그는 살 소망을 품었다. 그 후 그는 흉측해진 자신의 외모와는 달리 마음과 태도만큼은 밝게 변화됐다. 그때부터 자기 삶을 담아 글을 쓰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위대한 작가로 변모했다.
사람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불가항력적인 고난이 찾아오면 처음엔 부정하고 분노한다. 그러다 주변 사람들의 위로와 권면에 힘입어 스스로 타협을 한다. 물론 그 속에서 대인기피증과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겪는 이들도 있다. 욥이 꼭 그런 상황이었다. 더욱이 욥은 자신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세 명의 친구 때문에 너무나도 괴로웠다. 바로 그때 수도원 원장처럼 욥을 향한 중보자인 엘리후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의 중보를 통해 욥은 다시금 하나님을 향한 시선에 눈을 뜨고 소망을 품게 된 것이다.
중보기도하는 분들이 하는 말이 있다. 자신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잘 들어주지 않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게 그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나를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다. 물론 기도를 하고 응답을 받는 것에 ‘효율’을 따지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중보기도는 많이 하면 할수록 좋은 것만은 사실이다. 수도원 원장의 중보기도를 통해 그 청년이 변화된 것처럼, 엘리후의 중보를 통해 욥이 변화된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엘리후와 같은 대리자로 삼아 그 누군가를 향한 중보자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1)https://raisedtowalk.org/bible-study/who-is-elihu-in-the-book-of-j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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