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친구 목사가 결혼을 했다. 뒤늦은 결혼은 아니고 재혼을 한 것이다. 그의 아내는 10년 전 혈액암으로 사별했다. 지금은 의술이 좋아 치료를 병행할 수 있는 병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고칠 수 없는 병이었다. 그의 아내와 사별한 후 홀로 두 자녀를 키워왔고 드디어 새로운 아내를 맞이한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나는 그의 아내가 누군지 잘 알고 있다. 둘은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다. 그런데 신학교를 다니던 그 친구는 갑자기 의정부로 올라가 동갑내기 그 친구와 살림을 차렸다. 그곳에 있는 일터에서 함께 일하면서 가정을 꾸린 것이다. 그런데 일터의 환경이 좋지 않았는지 자식들을 낳은 뒤에 친구의 아내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친구는 다시금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했다. 그때부터 못다 한 신학공부를 마쳤고 섬에 들어가 작은 교회를 섬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아픈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면역력이 떨어져 혈액암으로 발전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사별했고, 10년 가까이 그 홀로 두 자식을 키우며 돌본 것이다. 그 얼마나 힘든 삶이었을까?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욥기서의 마지막 장에 나오는 욥의 고백이다. 자신의 고난 앞에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았지만 드디어 욥에게 나타나 일깨워주셨다는 뜻이다. 사실 욥기서 1~3장은 욥의 믿음과 고난의 상황을 보여주고, 4~27장은 욥과 세 명의 친구가 세 차례에 걸쳐 변론하는 내용, 28~31장은 막간을 이용한 욥의 최후 변론, 32~37장은 엘리후의 중재, 그리고 38~42장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 회복의 은혜를 베푸시는 장면이 담겨 있다.
의롭게 살아온 욥은 자신이 왜 재산 잃고 자식들 죽고 자기 몸에 악창이 들끓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을 향해 세 친구가 나타나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정죄하고 비난했다. 그때마다 욥은 자기 의로움의 논리로 각각 항변했다. 그렇게 평행선을 달리고 있을 때 하나님의 대리자요 성령의 위로자인 엘리후가 나타나 그 상황을 중재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드디어 욥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찾아오셨다. 더욱이 땅과 하늘과 바다의 자연 생태계와 짐승의 이치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셨다. 그만큼 고난당하는 욥에게 즉각적으로 대답해 주신 게 아니었다. 자연 상태계와 피조계의 이치에 대해 질문하신 방식으로 찾아오신 것이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과 바다의 주관자이신데, 어찌 인간이 광대하신 하나님의 뜻을 자기 유한함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는 뜻이었다. 그만큼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욥의 수준에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걸 일깨워주고자 한 것이다. 욥이 아무리 의로울지라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 앞에서는 상대적이라는 사실도 알게 하신 것이다. 인간의 의로움마저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의 깊으신 뜻에 전적으로 내어맡기며 살기를 바라신 것이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고,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141쪽)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에 나오는 이야기다. 인간은 고통의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알 길이 없지만 그 고통을 통해 세상을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뜻이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깊이 성찰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게 하신다는 의미다.
그의 주장은 논리와 확신에 찬 기독교적인 변증이다. 그런데 그가 뒤늦게 결혼을 했다가 아내를 잃고 난 뒤에 출간된 〈헤아려 본 슬픔〉은 그 색깔이 다르다. 왠지 두려움과 원망과 슬픔이 가득 차 있다. 〈고통의 문제〉에서는 지적인 변증으로 가득 차 있다면 〈헤아려 본 슬픔〉에서는 감성적인 충격과 아픔이 묻어나 있다. 예전에 당당하던 루이스가 한없이 작고 초라해진 모습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루이스는 늦은 나이에 사귄 여자 친구가 암환자임을 알고 결혼을 했다. 치료하는 과정에서 완치되길 소망하며 기도했다. 도중에 호전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결혼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아내는 예정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때 무기력한 모습으로 지켜봐야 했던 루이스에게 얼마나 큰 상실과 슬픔이 밀려들었겠는가? 〈헤아려 본 슬픔〉에 그의 정돈되지 않는 생각의 파편들이 나부낀 이유가 그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처와 고통 속에서 루이스는 헤어나온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그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던 까닭일까? 아니다. 루이스는 그 고통과 아픔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의심하면서도 고군분투한 것이다. 고통에 대해 합리적인 논리의 답을 찾고자 한 게 아니라 묵묵히 그 삶을 수긍하며 살아갈 뿐이었다. 그 속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함께 한 것이었다. 욥에게 일깨워주신 하나님의 위로도, 내 친구를 향한 하나님의 격려도 그와 같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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