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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SundaySermon

마음을 새롭게(롬12:1-2)

by 똑똑이채널 2022.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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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논지)2022년 새 해가 밝은 지 벌써 한 주가 지나갔습니다.

2022년 새 해를 맞이해 저마다 소원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2022년 한 해 동안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죠.

가정도 그렇고 자녀들도 그렇고 사업과 일터에서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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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를 위해 필요한 게 있지 않겠습니까?

농부가 가을에 풍성한 소출을 거두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있죠.

이른 봄철에 밭을 갈고 논을 갈아야만 하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쟁기나 트랙터로 논밭을 갈아엎어야만 씨앗을 뿌릴 수 있기 때문이죠.

물론 논밭을 쟁기나 트랙터로 갈아 엎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죠.

그 논과 밭의 흙이 고운 흙이 되도록 한 번 더 잘게 부숴줘야 하죠.

그래야만 논에 심은 벼가 뿌리를 잘 내릴 수 있고, 밭에 뿌린 씨앗이 새싹이 잘 나올 수 있기 때문이죠.

 

바로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그 씨앗이 나고 새싹이 자랄 수 있는 법이죠.

물론 그것으로 모든 게 끝입니까?

그렇지 않죠.

새싹이 올라와 잘 자랄 수 있도록 거름도 주고 잡풀도 뽑아줘야 하는 것이죠.

 

(깨달음)이것은 신앙인에게도 해당되는 사항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의 열매를 맺고자 한다면 바로 그와 같은 영적 원리가 필요한 법이죠.

 

내 심령이 돌처럼 굳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심령에 심겨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 심령을 갈아 엎고 부드러운 흙과 같은 심령이 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고 자랄 수 있는 법이죠.

그때 비로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법입니다.

 

(적용) 그런 뜻에서 저와 여러분이 2022년 새 해를 맞아 먼저 무엇을 새롭게 해야 할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 심령의 밭을 갈아 엎는 것이 필요한 것이죠.

내 심령의 밭을 부드러운 흙처럼 잘게 부수고 갈아엎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품는 게 필요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심령에, 우리의 삶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시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로마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고린도에 3개월간 머물 때 써 보낸 편지라고 했습니다.

이 편지는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 써 보낸 편지였죠.

로마교회는 그렇다고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 전도해서 세워진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오순절날 성령님께서 강림하실 때 120명의 사람들이 세계 16개국에서 온 사람들과 방언으로 소통하는 일이 일어났죠.

그때의 방언이란 인간의 언어로 알아듣지 못하는 천사의 언어가 아니라 세계 16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다 알아듣는 인간의 언어였죠.

그때 성령님께서 베푸신 방언의 역사란 소통의 장을 넓히는 것, 다른 사람을 품고 이해하는 폭을 넓히는 것을 말한 것이죠.

바로 그날 로마에서 온 사람들이 성령님의 은총 안에서 복음을 소통하는 일이 일어났고, 바로 그들이 주님을 영접한 것이었죠.

 

그때 그들은 로마로 돌아가 로마에 사는 사람들 곧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그때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듯이 유대인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까닭에 로마교회의 성도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죠.

그만큼 그들이 교회를 이루고 있지만 유대 율법주의 곧 할례와 같은 의식을 중시하는 교회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폭동을 일으킨 일로 A.D.49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추방명령이 내려진 후는 달라졌죠.

그때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떠나야 했기 때문에 그 무렵의 로마교회는 대부분 이방인들이 주를 이루게 되죠.

이른바 로마교회의 무게 중심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넘어가는 추세 속에 있던 것이죠.

 

그렇다 하더라도 소수의 유대인들은 이전의 율법주의 색체를 놓지지 않았고, 할례와 같은 의식법을 강조했죠.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율법의 행위를 놓쳐서는 안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이방인들은 어떻겠습니까?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기 때문에 어떤 율법의 행위를 따르기보다 자유함을 원하지 않았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자생적으로 세워진 로마교회에 흐르는 전통이요 관습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런 로마교회를 향해 16장에 달하는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이죠.

 

대체 바울이 무슨 목적으로 이 편지를 써 보냈겠습니까?

로마교회가 신생교회이긴 하지만 두 가지 상반된 전통과 관습이 치우친 것을 알고 있기에 바른 균형을 잡아주고자 써 보낸 것이죠.

이른바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는 것과 구원받은 이후에는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게 그것이죠.

 

구원은 율법의 행위나 의식을 통해 받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를 향해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로마교회의 유대인들 곧 율법주의에 그 심령이 굳어있는 자들을 향해서 써 보낸 것이죠.

그렇다면 구원받은 이후에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누구를 향해 한 말이겠습니까?

이방인들 곧 구원받은 이후에 자유와 방종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이방인들을 향해 써 보낸 것이죠.

 

그래서 로마서 1-11장까지는 이신칭의 곧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죠.

그리고 로마서 12-16장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후에는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치입니다.

 

그를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

로마교회 내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심령을 각각 갈아 엎어 흙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지니는 게 중요한 것이죠.

유대인들이 율법주의의 의식을 껴안은 채 그들의 심령이 굳어있다면 결코 그들의 심령에 복음의 씨앗이 자랄 수 없죠.

마찬가지로 자유와 방종만을 원하는 이방인들도 그들의 심령을 활짝 갈아엎고 부드러운 흙과 같은 심령이 돼야 복음의 씨가 자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법이죠.

 

(본문)그래서 오늘 본문 12장 2절에 두 번째로 권면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깨달음) 여기에서 말하는 ‘이 세대’란 어떤 세대를 말하는 것이었습니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로마의 황제를 신처럼 떠받드는 세대의 모습이죠.

그 시대의 돈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을 좇아 사는 세대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원성)그것은 오늘날도 다르지 않죠.

오늘날도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과 명예와 쾌락과 욕망을 좇아 아귀다툼을 벌이며 사는 세상과 같기 때문이죠.

 

그런 세상이 영원영원할 것 같지만 실은 1천년도 못 돼서 다 몰락하고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로마는 외부의 세력에 의해 멸망한 게 아니라 내부의 타락으로 인해 몰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돈과 명예와 쾌락과 욕망을 좇아 사는 삶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는 것이죠.

그것은 바울이 디모데후서 3장 1-5절을 통해 일깨워주는 말세의 모습과 같은 격입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 세상은 늘 말세를 향해 치닫고 있는 세상 아닙니까?

바울이 바라봤던 그 세대도 그 시대의 말세였기 때문이죠.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교만하고 비방하고 부모를 거역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구별된 삶도 살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로 인해 정도 없고, 원통함을 풀지 않고 모함하고 절제하지 못하며 사납고 선한 것을 좇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배신하고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는 삶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죠.

 

그렇게 하고서도 경건의 모양은 있어 보이는 것 같지만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을 갖추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 같지만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참된 주인으로 모시는 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지도 않고 자라지도 않는 종교인을 말하는 것이죠.

 

바로 그와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곧 그런 세대의 모습을 본받지 말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죠.

 

그런 삶에서 어떻게 해야 돌아설 수 있겠습니까?

돈과 명예와 쾌락을 좇아 사는 세대의 모습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원해) 바로 그것이 2절의 말씀처럼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만’ 돌아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하는 원문의 뉘앙스는 그것입니다.

“너희 마음과 생각하는 방식을 새롭게 함으로 계속해서 변화를 받으라”하는 뜻이죠.

 

여기에 ‘변화를 받아’로 번역된 헬라어 ‘메타모르포오’(μεταμορφόω)의 원형동사는 ‘모르페’(μορφή)입니다.

그 말은 외적인 변화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내적인 본질의 변화를 일컫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어릴 때와 늙을 때의 모습이 똑같은 외모를 지닐 수가 없죠.

얼굴이 주름이 생기고 쭈글쭈글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난 시간이 여성들은 네 단계 소녀-처녀-아줌마-할머니의 단계를 거친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줌마 이후 보톡스 아줌마로 변신하고 있다고 했죠.

어찌됐든 어릴 때의 얼굴과 나이들어 늙을 때의 얼굴은 똑같은 외형을 지닐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변화를 받으라고 강조하는 것은 외형에 있는 게 아니라 본질의 변화를 꾀하라는 뜻입니다.

이른바 속 사람의 변화, 속 심령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죠.

그 심령의 속 사람이 변화되지 않으면 어찌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질 수 있고 자랄 수 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라고 말하는 것이죠.

여기에 ‘새롭게 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아나카이노시스’(ἀνακαίνωσις)는 ‘다시 태어남’(renovation)’을 뜻합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을 좇아 지옥을 향해 치닫던 인생이 주님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걸 말합니다.

인생의 집을 다른 것들로 치장한 채 살아왔다면, 엉뚱한 목적을 향해 살아왔다면 다시금 ‘리노베이션’하는 걸 말합니다.

 

(깨달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심령을 리노베이션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본질을 개혁하고 새롭게 변화시킬수 있겠습니까?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심령의 굳은 마음을 흙처럼 부드러운 심령으로 갈아 엎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을 품을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것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길이요, 그것이 우리의 본질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이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 주님은 우리 심령을 부드러운 흙처럼 갈아 엎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죠.

 

(주음성)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는 성령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너의 심령을 흙처럼 부드럽게 갈아 엎은 자이더냐?”

“아니면 너의 심령이 돌처럼 굳어있는 자이더냐?”

“흙처럼 부드러운 심령이라야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질 수 있고 싹이 나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지 않겠느냐?”

“말세를 향해 치닫고 있는 세대의 모습처럼 자기만을 사랑한다면, 돈과 명예와 쾌락만을 좇는다면 어찌 그 마음이 부드러운 심령이 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말씀이 심겨지지 않고 자라지 않는 이가 어찌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자일 수 있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네 본질이 주님안에서 리노베이션해야 하지 않겠느냐?”

“네 인생의 집이 거추장스런 세상 것들로 온갖 들어서 있다면 다 떼어내고 말씀으로 다시 지어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 네 외적인 집은 비록 력셔리한 집은 아닐지라도 네 인생의 집은 주님 보시기에 창찬받는 신앙인의 집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찬양) 손에 있는 부귀보다 주를 더 사랑하는가

이슬 같은 목숨보다 주를 더 사랑하는가

사랑의 빛 잃어가면 주님 만날 수 없어

헛된 영화 바라보면 사랑할 수도 없어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큰 물결이 뛰놀아도 주를 더 찬양하는가

큰 환난이 닥쳐와도 주를 더 찬양하는가

깊은 잠에 빠진 영혼 주님 만날 수 없어

근심 걱정 많은 자는 찬양할 수도 없어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하나님의 시간표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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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이동원 목사님의 〈내 영혼의 내비게이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라는 작품이 있죠.

가로 53cm 세로 77㎝의 모나리자가 웃고 있는 그림입니다.

오래 전 그곳에 가서 한 번 그 그림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 그림이 특이한 것은 어느 쪽에 제가 서 있어도 모나리자의 눈과 제 눈이 마주친다는 점이었죠.

 

그런데 모나리자 그림을 해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 여인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전통적인 것은 그것입니다.

그녀의 남편이 당대의 가장 유명한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초상화를 의뢰한 것에 대해 기쁨을 표한 미소’라는 것이죠.

또 하나의 설은 그것입니다.

가문의 대를 이을 잘생긴 둘째 아들의 출산한 그녀를 남편이 사랑스럽게 받아주기 때문에 웃는 ‘행복한 여인의 미소’라는 거죠.

 

그런데 프랑스의 미술 사학자요 미술 평론가인 다니엘 아라스(Daniel Arasse)는 다른 해석을 내 놓고 있습니다.

그녀의 얼굴에 짧게 스치는 미소는 인생의 덧없음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여인의 왼쪽 어깨너머에 작은 다리(bridge) 하나를 그려 넣었는데, 다리가 있다는 것은 강물이 흐른다는 뜻이겠죠.

더욱이 그 강물이 흐르는 풍경은 사람이 하나도 살지 않는 태고적 원시의 풍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모나리자의 미소는 태고적부터 흘러나온 ‘영원한 시간에서의 덧없는 찰나의 미소’라는 뜻입니다.

 

(깨달음)모나리자의 웃는 그 웃음을 통해 크리스천인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대를 본받아 사는 많은 사람들은 허무한 실존을 위해 살지만 크리스천은 영원한 실존을 위해 사는 자들이라는 것이죠.

허무한 실존을 좇아 사는 사람들은 시간의 덧없음을 생각하지 못한 채 이 세대의 쾌락과 욕망만을 전부로 여기는 것이죠.

하지만 영원한 실존을 좇아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심령 속에 영생의 열매를 맺고자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때에만 비로소 모나리자의 그림이 우리에게 진면목의 그림으로 다가올 수 있는 그림이 되는 것이죠.

그 사실을 내다보고 영원을 사모하며 사는 자만 인생의 참된 그림을 리노베이션 하며 그려나갈 수 있는 법이죠.

(예화2)고든 맥도날드가 쓴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이란 책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뉩니다.

한 부류는 ‘충동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고 다른 부류는 ‘소명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루하루를 자기 본능대로 자기 감정대로만 살려고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죠.

그러다가 일을 그르치게 되고, 남에게 상처를 주고 또 남에게 상처를 받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깨달음) 하지만 소명에 이끌린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이 세대를 본받아 사는 사람들, 종교인의 영 속에 갇혀 모양만 흉내 내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산다는 것이죠.

그 무엇보다도 잠시 잠깐 후면 사라질 이 세상이 것을 붙잡고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가치를 붙잡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쉽게 일을 그르치는 법도 없고,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또 상처를 받을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일을 그르친다고해도 남을 탓하거나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게 아니라 오직 화평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같은 사람이 바로 흙과 같이 부드러운 심령의 소유자요,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뿌리는 자요 영생의 열매를 거두는 자라는 뜻입니다.

(내음성)그렇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께 드릴 때 어떤 기도를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가 모나리자의 그림 속 주인공처럼 찰나의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하며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이 세대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쾌락과 욕망의 화려한 집보다 인생의 참된 집을 리노베이션 하며 살게 해 주세요.”

“그것은 제 심령의 밭을 흙처럼 부드러럽게 갈아 엎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예요.”

“제 심령의 밭을 흙처럼 곱게 갈아엎게 하셔서 말씀의 씨를 품고 자라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세요.”

“그 길은 충동에 이끌린 삶이 아니라 사명에 이끌린 삶을 살때에만 가능한 줄 믿어요.”

“주님 2022년 제게 부여하신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제 심령에 은혜를 부어주세요.”

“2022년 한 해 동안 많은 열매를 거두게 하시되 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는 새생명의 열매도 맺게 해 주세요.”

“오직 제 심령에 굳은 마음을 제거해 주시고 옥토 같은 심령으로 변화되 주님의 말씀이 자라고 역사하게 해 주세요.”

 

(찬양)언제 다시 주 오실지 아는 이가 있는가

신랑으로 오실 주님 맞을 준비되었는가

기름 없는 등불 들면 주님 만날 수 없어

재림 나팔 소리 나면 예비할 수도 없어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유한한 이 세상 너머 영생의 나라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찰나와 같은 세대의 모습을 본받아 살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오직 영생의 나라를 위해 영원한 열매를 맺는 삶을 추구하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첫 단계는 오직 우리 심령을 흙처럼 부드럽게 갈아엎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우리 심령에 심을 수 있고 싹이 나고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를 위해 일시적인 찰나를 좇는 충동적인 삶이 아니라 영생의 천국을 바라보는 소명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를 위해 종교인의 모습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는 주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와 같은 은혜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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