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예화) 인터넷에 떠도는 ‘좋은 소식’, ‘나쁜 소식’, ‘환장할 소식’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소식이 좋은 소식이고, 어떤 소식이 나쁜 소식이고, 또 어떤 소식이 환장할 소식이겠습니까?
좋은 소식, 아이가 상을 타 왔다네!
나쁜 소식, 옆집 아이도 타 왔다네!
환장할 소식, 아이들 기 살린다고 전교생 다 주었다네!
좋은 소식, 살다 보니 남편이 처음으로 꽃을 가져왔네!
나쁜 소식, 그런데 국화꽃만 있네!
환장할 소식, 알고 보니 남편이 장례식장에 갔다가 아까워서 가지고 온 것이라네!
좋은 소식, 싼 가격에 성형수술을 했다네!
나쁜 소식, 수술이 시원찮아 다시 해야 한다네!
환장할 소식, 뉴스에 보니 그 의사가 돌팔이라 잡혀 갔다네!
좋은 소식, 남편이 진급했다네!
나쁜 소식, 새 비서가 엄청 이쁘다네!
환장할 소식, 근데 둘이 외국으로 출장 간다네!
좋은 소식, 친구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네!
나쁜 소식, 친구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다닌다네!
환장할 소식, 친구가 교회에 다니는데 그 교회가 신천집 집단의 교회라네!
(깨달음) 웃음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부분은 제가 추가로 만든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생각케 하는 이야기 같습니까?
친구나 아는 사람이 교회에 다니는 것보다 좋은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무작정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결코 좋은 소식일 수가 없죠.
그러나 환장할 소식은 그 친구나 아는 사람이 다니는 교회가 신천지나 구원파같은 이단 사이비 집단이라는 사실이죠.
(적용)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까?
뭐든 첫 단추를 꿰야 마지막 단추도 잘 꿸 수 있기 때문이죠.
신앙의 첫 단추를 꿰야 마지막 천국을 향한 죽음 너머의 단추도 잘 꿸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21년 한 해를 시작한 지도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송년주일을 맞이했습니다.
2021년 한 해 동안 여러분은 인생의 집을 잘 지어 오셨습니까?
2021년 1월 달에 비해 12월에 마지막에 더 나은 성과를 쌓아올리셨습니까?
어쩌면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바일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주 안에서 세워가는 ‘믿음의 집’ ‘신앙의 집’이지 않겠습니까?
그 집은 나무나 돌로 지은 집과 달리 불이 붙어도 타지 않고 오히려 더 빛이 나는 정금같은 집이기 때문이죠.
그 집은 아무리 영적인 세력들이 뒤흔들고 싶어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집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멋진 집을 잘 지었어도 불이 나거나 지진이 나서 무너져 내린다면 그 어찌 좋은 집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불이 나고 지진이 날지라도 결코 무너지지 않고 영원토록 빛나는 집이 바로 믿음의 집, 신앙의 집입니다.
그런 집을 세워가는 자는 훗날 저 영원한 천국에서 가장 빛난 그 집에 살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에베소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로마의 감옥 곧 자기 셋집의 가택연금 상태에서 보낸 편지입니다.
에베소교회는 A.D.53년, 그의 나이 53살에 3차 전도여행을 통해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그 당시 에베소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수리아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제국의 4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지중해 연안의 무역도시로서 인구 25만 명이 살고 있었고, 시리아와 인도와 이집트에서 각종 상인들이 몰려들었죠.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는 도시라, 상인들은 그 신전 앞에 절을 하며 자기 소원을 빌고 빌었습니다.
그로 인해 에베소 도시의 구리세공업자들은 그 여신상 모양을 한 작은 신상을 팔면서 막대한 수입을 올렸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에베소 도시에 바울이 들어가 브리스길라 부부의 동역 속에서 3년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중 2년은 티란노스의 스콜레 곧 두란노 상가를 빌려 낮잠 자는 시간 대에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그 와중에 2차 전도여행때 세운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코자 세 번에 걸쳐 방문했고 네 번에 걸쳐 편지를 써보냈죠.
바울은 그렇게 고린도교회 문제를 해결코자 애를 썼지만 에베소교회를 세우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와 같은 주님의 부르심, 곧 에베소교회를 세우고자 할 때 주님께서 어떤 역사를 베풀어주셨습니까?
그곳에서 천막 만들 때 닦던 ‘천조각’과 앞치마 격으로 사용하던 ‘보자기’로 아픈 사람에게 얹었죠.
그러자 귀신이 떠나가고 병든 자가 고침 받는 놀라운 주님의 역사가 일어났죠.
그 일로 수 많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주님을 영접하여 주님의 제자가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울에게 화근이 되기도 했습니다.
에베소의 구리세공업자인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자기 소득이 끊길 걸 생각해 동업자들을 선동하고 난동을 피웠죠.
그 일로 바울은 더이상 그곳에서 머물 수 없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고린도로 건너가 3개월간 머문 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에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까지 와서 바울을 고발했죠.
그 일로 바울은 유대 당국에 체포당했고, 결국 로마에 끌려가 네로 황제의 판결을 받기까지 가택연금 상태에 처하게 되죠.
그때가 A.D.60년, 바울의 나이 60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2년간 가택연금상태에 처했는데 바울은 그때 자신을 찾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4개의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바로 그 중의 하나가 오늘 읽은 에베소서 말씀이요, 이 말씀은 2021년 신년주일에 나눈 말씀이기도 합니다.
(진술) 바울이 감옥과도 같은 자기 셋집에서 에베소서를 쓸 때 무엇을 강조해서 써 보냈다고 했습니까?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해서 썼고, 그렇게 부름받은 자들의 합당한 삶에 대해서 써 보냈죠.
바꿔 말하면 그들 개개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된 것은 전적인 주님의 선택하신 섭리였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잘나거나 능력이 있거나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믿음의 삶을 살라는 것이죠.
참된 믿음의 경주자로 살아가라는 권면입니다.
다시 말해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인생 집을 믿음의 집으로 세워가라는 뜻입니다.
(전개)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 12절과 16절은 무엇을 세우도록 하는 권면입니까?
본문 12절을 먼저 읽어보시겠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아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
본문 16절입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깨달음) 무슨 말씀입니까?
에베소교회가 주님의 은혜로 조금씩 성장할 때 그 교회에 사도와 선지자와 목사와 교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직분은 계급이 아니라 직책의 차이일 뿐 궁극적으로 그 직분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 몸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이죠.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손과 발과 온 몸이 서로서로 그리스도를 받드는 지체가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손 따로 발 따로, 몸 따로 머리 따로면 어떻게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그 당시 에베소교회 역시 지금의 중국에 있는 교회들처럼 가정 교회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사도도, 선지자도, 목사도, 교사도, 각 가정교회를 돌면서 성도들의 모임을 격려하고 세워주는 섬김의 역할을 다했던 것이죠.
그것은 바울도 마찬가지였죠.
처음 에베소에서 전도하고 3년간 에베소교회를 세울 때도 눈물과 기도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지 않았겠습니까?
그때 그 성도들이 스스로 머리가 되고자 했다면, 팔과 다리가 되긴 했지만 같은 마음 같은 뜻을 품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주님의 몸된 교회가 온전히 세워질 수 없었겠죠?
바울은 자신의 경험담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없는 그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해 사랑으로 주님의 몸을 세우도록 권면한 것입니다.
사랑 외에는 그 어떤 교회도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세워질 수 없기 때문이죠.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주님은 우리 서로가 지체가 되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으로 세워가길 원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2021년 한 해 동안 어떤 인생의 집을 지어왔느냐?”
“2021년 1월달 첫 신앙의 단추를 꿰어 온 이후에 송년주일인 오늘까지 믿음의 단추를 잘 꿰어 왔느냐?”
“너와 함께 믿음의 첫 단추를 꿴 친구들 중에 지금은 신천지와 구원파 집단에 빠져버린 친구는 없느냐?”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울 때 주님의 몸된 지체로 섬기고 사랑으로 세우지 않았더냐?”
“그 사실을 알기에 지금 에베소에 남아 있는 교우들을 향해 서로가 주님의 지체가 되어 사랑으로 교회를 세우도록 권면하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2021년 한 해 동안 너는 어떤 인생의 집을 지어왔는지, 어떤 믿음의 집을 세워왔는지, 돌이켜봐야 하지 않겠느냐?”
“세상에 성공한 게 없다고 자괴감에 빠질 게 아니라, 네 사랑과 섬김으로 지체들을 세워왔다면 오히려 감사할 일이지 않겠느냐?”
“그런 섬김과 사랑으로 누군가 주님께 한 단계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다면 그보다 더 값진 상급이 어디에 있겠느냐?”
“이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력의 집들은 주님의 재림때에 다 불타 없어질 공력이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섬긴 그 공적은 결코 불타지 않을 금면류관이 될 테니 말이다.”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오른 손이 한 일 왼손이 모르게, 묵묵히 사랑하고 섬긴 수고로 누군가 믿음의 집이 바르게 세워진다면, 주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이지 않겠느냐?”
(찬양)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 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 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교만한 나의 마음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 둘 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며 서있네 어찌할 수 없는 이 맘을 주님께 맡긴 채로
(성화) 가택연금 상태에 처한 바울은 2년 뒤에 로마 황제 네로의 법정에서 무죄로 판명나 풀려났습니다.
그 후 디도를 데리고가서 크레타 섬의 담임목회자로 세웠고 또 디모데를 데리고 가서 에베소교회 담임목회자로 세웠죠.
그 뒤 바울은 다시금 에베소와 고린도와 그 위쪽 니고볼리 곧 지금의 알바니아에 들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A.D.67년, 67세에 나이에 집시법 위반으로 네로 황제의 체포령에 의해 붙잡혔고, 이듬해 메마르틴 지하 감옥에서 참수형 당했습니다.
바로 그 죽음 직전에 써 보낸 바울의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 후서 4장 6-8절을 통해 이렇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원해) ‘관제와 같이 내가 부음이 되고’라는 말은 번제를 드릴 때 포도주를 붓는 그 모습처럼 자기 자신의 인생을 주님께 부어드렸다는 뜻입니다.
그로 인해 그가 이 세상을 떠날 기약이 가까이 왔다는 것이죠.
그처럼 자기 자신의 목숨이 다하는 그 시점에 그가 고백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달려 갈 길 곧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위해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주실 면류관을 바라볼 터이니, 그 면류관은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깨달음) 바울의 그 마지막 편지는 디모데 개인에게 보낸 편지였지만 그 편지를 디모데만 읽어보겠습니까?
그렇지 않죠.
에베소에서 목회하던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편지를 에베소교회 지체들 모두에게 돌아가면서 읽어보도록 했을 것입니다.
왜요?
사도 바울이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무슨 인생의 집을 세우고자 했는지, 서로들 목표를 정하고자 함이지 않았겠습니까?
(적용)그것은 저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2021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송년주일인 이 때 나는 어떤 인생의 집, 어떤 믿음의 집을 세워왔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죠.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내 목숨을 거둬가시는 그 날, 바울처럼 의의 면류관을 받을 그 날을 기다릴 것인지 말입니다.
오직 그것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주님의 사랑으로 지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믿음으로 세울 때에 받는 상급인 줄 믿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것이죠.
(예화) 이동원 목사의 〈처음 복음〉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2013년 4월 16일 미국이 존경하는 복음가수 조지 베벌리쉐아 옹이 104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부인이 잠든 노스캐롤리아나 빌리 그레이엄 기념 도서관 내에 묻혔죠.
그의 평생 간직한 믿음의 고백은 그가 작곡하고 부른 복음성가처럼 〈주 예수 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였습니다.
캐내다 출신의 젊은 음악도였던 그는 23세 되던 해 뉴욕시티 음악 오디션에 합격하여 라디오 전속가수로 채용됐습니다.
그때 그는 음악 방송 담당자에게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방송에서 찬송을 불러도 되겠느냐였습니다.
방송국에서는 합의된 노래만 부를 수 있다고 잘라 말했죠.
집에 돌아온 그는 한 참을 고민하다가 어머니와 상의했습니다.
그때 그의 어머니는 기도로 응답을 받자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피아노에 앉았는데, 피아노 건반 앞에 낯선 시 한 편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아들이 읽기를 희망하면서 갖다 놓은 ‘밀러 부인의 시’였습니다.
그 시를 읽는 순간 아들 조지는 눈물을 흘리며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인류 역사상 불멸의 찬송가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가 탄생되던 순간이었습니다.
주 예수 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로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그 찬양을 부른 후에 그는 방송국 계약을 거절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 그가 나가는 교회에서 그 찬양을 처음으로 불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 그는 성가를 마음껏 부를 수 있는 조건으로 시카고 방송국과 전속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송국에서 자기보다 열 살 아래의 젊은 전도자를 만나 전도 집회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죠.
그 전도자가 바로 빌리 그레이엄 전도자였습니다.
그 후 그는 빌리 그레이엄과 전 세계를 다니며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 앞에서 노래한 가수로 기네스북에 기재되었습니다.
그는 10여 차례에 걸친 그래미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11년 102살의 나이로 다시 음악상을 수상한 자리에서 그녀는 기립박수를 받으며 단상에 올라 수상 소감을 이야기했죠.
바로 이렇게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박수보다도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더 좋습니다.”
(깨달음)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온 인생인지 분명하게 일깨워준 고백 아닙니까?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떠날 기약이 가까이 올 때 자신이 세상에서 쌓아올린 명성의 탑보다 오직 주님만을 가장 귀한 분으로 여기며 찬양해 온 것이었습니다.
(내음성) 그렇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실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 인생의 목표도 이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오직 주님을 높이는 삶이 되게 해 주세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 제 인생의 목표가 되게 해 주세요.”
“그것보다 더 귀하고 그것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기 때문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예요.”
“그리하여 사도 바울처럼, 조지 베벌리쉐아처럼 주님께 귀한 면류관을 받는 저로 삼아주세요.”
“혹여 내 년에도 이 땅에서 눈을 뜨게 된다면, 이 세상 즐거움보다도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밀알로 살게 해 주세요.”
(찬양)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주 예수 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로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2021년 한 해를 마감하는 송년주일입니다.
이제 5일만 지나면 2021년 한 해도 저물어갑니다.
과연 2021년 한 해 동안 어떤 인생의 단추를 꿰 오셨습니까?
처음 1월에 결단한 믿음의 집, 신앙의 집을 지금껏 잘 세워오셨습니까?
이 땅에 자기 부와 귀와 명예와 권력을 세우고자 한 세상 사람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공적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불타 없어질 것들입니다.
오직 주님의 나라를 위해,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통로가 되고자 지체들을 사랑하고 섬긴 그 공적만 불타지 않을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한 바요, 죽음이 임박한 자신의 때를 바라보며 디모데에게 권면한 바이지 않겠습니까?
2021년 송년주일을 보내는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 속에 후회가 남는 부분이 있다면 주님 앞에 참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라도 내년에 이 땅에서 눈을 뜨게 된다면, 우리의 인생 목표를 주님 나라를 세우는데,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인 성도들을 섬기고 사랑하는데 우리의 온 힘을 쏟아붓도록 하십시다.
그때 우리를 천국으로 부르실 때 사도 바울이 고대했던 금 면류관을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씌워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줄 믿습니다.
그것은 환장할 소식이나 나쁜 소식도 아닌, 가장 기쁜 소식이요 가장 복된 소식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가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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