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예화) 어떤 목사님이 두바이에 가서 집회를 인도하는데 쿠웨이트에 참석한 집사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쿠웨이트에서 친구처럼 지내고 있는 쿠웨이트 현지인을 알고 있는데 그는 이슬람의 알라신을 믿는 이였습니다.
그 집사님은 너무나도 신실한 그 쿠웨이트 친구에게 허물없는 질문을 했습니다.
“너는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면서 율법을 행하고 있는데 힘들지 않느냐?”
“힘들기도 하고, 때로는 피하고 싶을 때가 많아”
“그런데도 왜 억지로 그렇게 사느냐?”
“천국에 이를 수 있도록, 혹 신의 은택을 입을 수 있을까 해서 그렇지.”
“그럼 넌 그렇게 사는데 훗날 죽으면 어디로 갈 것 같아?”
“나는 분명히 지옥으로 갈 거야.”
그때 그 집사님은 쿠웨이트 현지 친구에게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인데?”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아무리 율법을 행하더라도 자신이 짓는 죄가 더 많기 때문이지”하고 대답을 하더라는 거죠.
(깨달음) 신실한 이슬람 신자의 그 답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바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러주신 구원자가가 우리에게는 있지만 그들에게는 없는 전혀 없다는 점이 그것이죠.
우리는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러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죄와 허물이 있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구원자가 없기 때문에 무서운 율법만 존재할 뿐 천국의 확신이 없이 죄인만 양산될 뿐입니다.
그것이 참된 구원의 종교인 예수 그리스도의 기독교와 율법만 난무한 이슬람 종교의 가장 큰 차이 아니겠습니까?
(적용)우리 주님은 지금도 죄와 허물에 빠져 있는 죄인들을 찾아와 구원해 주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것이 이 땅에 구원의 주님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경배하는 성탄절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우리는 대림절 4주간을 맞이해 누가복음 2장 1-20절까지 차례로 살펴봤습니다.
바로 그 부분과 겹치는 말씀이 오늘 성탄절 날에 살펴볼 말씀이기도 합니다.
본래 2천 년 전 갈릴의 서북쪽에 위치한 나사렛은 가난한 달동네였습니다.
그곳에 살던 요셉과 마리아도 가난하기 짝이 없었는데 둘은 한 동네 사람으로서 정혼한 사이였죠.
그때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먼저 찾아와 “아기를 낳을 것이고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전달해줬습니다.
마리아는 “나는 처녀로서 사내를 알지 못했는데 어떻게 홀로 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입니까?”하고 말했죠.
그러자 천사 가브리엘은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사촌 엘리사벳도 잉태한지 6개월이 되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능력이 너를 덮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때서야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당시에 처녀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녀는 돌팔매질을 당해 죽임 당해야 하는 유대인의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두렵고 불안한 마리아는 정혼한 사이인 요셉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을 수가 없었겠죠.
그때 요셉이 어떻게 했는지를 누가복음에는 나오지 않고 오늘 본문의 마태복음 1장 19-20a절에 나와 있죠.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다시 말해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그래서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했고, 그 일을 까발리지 않고 조용히 약혼한 관계를 끊고자 한 것이었죠.
바로 그 무렵에 천사 가브리엘이 요셉에게 찾아온 내용을 본문 20b-23절까지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깨달음) 무슨 말씀입니까?
마리아와 약혼한 관계를 파혼할 생각을 하고 있던 요셉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꿈에 찾아와 말한 것입니다.
“요셉아, 네가 아내로 삼고자 한 마리아를 데려오는 걸 무서워하지 말라. 그녀가 잉태한 아이는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다”
“그녀가 아이를 낳으면 그 이름을 예수라 해라. 그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다.”
“그 일은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대로다. 그의 이름 예수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시다.”
어떻습니까? 천사 가브리엘이 저와 여러분에게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희한한 꿈이네”, “개꿈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예화) 약 40여년 전에 현재의 연예인교회가 막 태동될 때였습니다.
당시 하용조 전도사님께서 코미디언 구봉서 선생님 댁에서 본문 말씀을 갖고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날 참가자 중 한 사람이 하용조 전도사님에게 집요하게 질문 공세를 퍼붓는 분이 있었습니다.
“처녀가 아이를 잉태하는 게 가능키냐 합니까?”
“아무리 성령의 능력으로라고 하지만 상식적으로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자기 약혼자가 임신했는데 약혼자는 말할 것도 없고 배속 아이까지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게 현실에서 가능한 일이예요?”
그렇게 계속해서 질문을 퍼붓는 바람에 더 이상 성경공부를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죠.
그때 참다 참다 못한 구봉서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니. 지 서방이 괜찮다는데, 왜 니가 난리인데!”
(깨달음) 그야말로 촌철살인같은 지적 아닙니까?
요셉은 우리와 다른 2천 년 전 사람이요 우리와는 지구 반대편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2천년 전에 그는 그 모든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자신의 생각과 편견을 뛰어넘는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지 요셉 개인만의 의지와 결단으로 가능한 일이었겠습니까?
마리아가 잉태한 것이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한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서 어떻게 요셉이 모든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요셉에게 온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셨던들 어찌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만큼 요셉의 심령을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굳게 붙잡아 주셨기에 요셉이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사실이죠.
그래서 요셉은 성령으로 잉태한 아이를 아내로 데려왔고 아이를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전개) 그런데 임마누엘 하나님의 역사는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아기 예수를 낳은 마리아가 남편 요셉과 함께 유대인의 정결례를 치르기 위해 아이를 안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 있던 시므온이 아기 예수가 누군지를 알아봤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할 것이다.”하고 말했죠.
무슨 뜻이겠습니까?
앞으로 마리아가 예수님으로 인해 큰 칼에 마음이 난도질당하는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는 사방팔방을 뛰어노느라 정신 없이 돌아다닌 소년 예수였죠.
하지만 공생애 사역을 시작할 무렵부터 끊임없는 모함과 살해 위협속에 시달리는 모습을 매일 같이 목격한 마리아였죠.
그러니 마리아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큰 칼로 마음이 난도질당하는 것 같은 고통을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성화) 요한복음 19장 25절은 이렇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그 십자가 곁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로마 군인들의 채찍질에 가슴과 등짝에 살점이 떨어져나갈 때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히고 로마 군인이 망치로 내리칠때마다 예수님의 몸은 고통으로 뒤범벅이 되지 않겠습니까?그 고통 속에서 마침내 숨을 거두고 로마 군인이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을 찌르자 예수님의 시신에서 피와 물이 쏟아져 내리죠.
그 끔찍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마리아의 아들이었습니다.
바로 자기 태로 낳은 아들 예수 말이죠.
아기때부터 자신의 젖을 빨고 자기의 품으로 양육한 그 아들 예수 말입니다.
그 예수를 낳은 어머니 마리아, 그 아들 예수를 키운 어머니 마리아, 그녀에게 어찌 모성 본능이 없었겠습니까?
기차가 달려오는 것도 모르고 철길 위에 뛰노는 아이를 밀쳐내고 아이를 구해내는 게 모성애 아닙니까?
그 모성애가 어찌 마리아에게 없었겠습니까?
그러니 어미 앞에서 죽어가는 그 아들 예수를 어찌 살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왜 살리고 싶은 마음이 마리아에게 없었겠습니까?
그렇기에 마리아는 충분히 아들 예수를 향해, 그 군중들을 향해 충분히 외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저 예수는 바로 내 아들이예요.”
“내가 내 몸으로 낳은 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내 아들 예수는 지금 온전치 못한 정신병에 걸려 있어요.”
“그러니 저 아들은 살려 주시고 나를 차라리 죽이세요.”
(깨달음)어떻습니까?
아들을 지키려는 모성애를 지닌 마리아로서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마리아는 모성본능을 억누르면서 큰 칼로 난도질당하는 그 고통을 참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태로 낳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현장을 끝까지 잠잠히 바라보았습니다.
비록 자신의 태로 예수님을 낳긴 했지만 자신의 젖을 빨리고 자기 품으로 양육하기는 했지만,
예수님은 실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태로 낳은 예수님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잉태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녀는 알고 있기 때문에 말이죠.
이 세상 사람 그 누구도 알지도 믿지도 못해도 오직 마리아 자신만큼은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적용)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23절에서 전해주는 ‘임마누엘’의 참된 뜻이지 않겠습니까?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아들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된 임마누엘 하나님이셨다는 사실 말이죠.
2천년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그 예수님이 바로 성자 하나님이시자 임마누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2천 년 전 베들레헴의 마굿간 구유에 친히 태어나신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알라신을 섬기는 무슬림처럼 모두가 신을 찾아가는 종교입니다.
하지만 임마누엘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의 삶 속에 친히 들어오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십자가의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에게 죽음에서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허물과 죄가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에서 대속을 이루셨기에, 우리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임마누엘 주님 안에서 천국을 소망하며 살 수 있는 것이죠.
(주문) 그렇기에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신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주님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이 성탄절에 임마누엘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주시길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음성) 그렇기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이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친히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이 땅의 모든 종교는 신을 찾아가는 종교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삶으로 오신 분인 줄 알고 있느냐?”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는 게 불가능한 것 같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아니겠느냐?”
“네가 아무리 불가능한 일이라고 떠들어댈지라도 그 남편 요셉이 믿겠다고 하는데 네가 무슨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느냐?”
“모성애를 가진 마리아가 공생애 사역하는 아들 예수로 인해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너는 알수 있지 않느냐?”
“심지어 채찍에 맞고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힐 때 ‘저 아들은 내 아들이예요. 지금 정신병에 걸렸어요.’하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지 않았겠느냐?”
“그런데도 왜 그녀가 묵묵히 그 말들을 삭이면서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를 바라본지 너는 알고 있지 않느냐?”
“그분이 바로 임마누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애끓는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지 않았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믿고 의지하는 주님은 오늘도 너와 함께 하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심을 네가 잊지 말도록 해라.”
“네가 힘들고 어려울 때도, 심지어 네가 죄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 분은 너의 삶에 임해계시고 너와 함께 아파하시는 주님아니겠느냐?”
“네 심령을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스러운 일이 네가 닥칠 때, 십자가에 위에서 너의 모든 짐을 짊어지신 그 주님을 바라보도록 해라.”
“심지어 네 삶에 소망이 끊긴 상태일지라도, 절망의 늪에 빠져 있는 그때에도,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도록 해라.”
(찬양)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내 모든 죄 다 사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나의 구세주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발췌) 이동원 목사님의 〈처음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미국에 같은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빌과 글로리아라는 선생님이 사랑에 빠졌습니다.
빌은 음악을 좋아했고 글로리아는 영어 전공으로 글 쓰는 것을 좋아했죠.
그들은 결혼해서 빌은 음악을 만들고 글로리아는 가사를 쓰는 환상의 커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환상적인 커플의 삶에 혹독한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남편 빌이 단핵구증이라는 전염병에 걸려 무력감에 시달려 모든 일을 포기했습니다.
아내 글로리아는 셋째 아이를 임신한 몸으로 병든 남편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이때 이들 가족을 둘러싼 억울한 루머로 마음 둘 곳이 없었습니다.
이제 한 해가 저물고 새해를 맞이하던 시간에 글로리아는 거실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죠.
그때 글로리아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신 임재가 찾아왔습니다.
마치 마리아에게 임한 것처럼, 요셉에게 찾아온 것처럼 말입니다.
그때 그녀의 가슴에 두려움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주님의 평강이 밀려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붓을 들어 노래 가사를 만들었고 이내 남편에게 소리를 쳤죠.
“여보 주님이 말씀을 주셨어요. 곡을 만들어 보세요.”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게 바로 방금 불렀던 불멸의 가스펠 〈살아계신 주〉였습니다.
(찬양)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해설) 그 찬양의 원문 가사는 이렇습니다.
Because He lives, I can face tomorrow. (그가 살아계시기 때문에, 나는 내일을 마주할 수 있다)
Because He lives, all fear is gone.(그가 살아계시기 때문에, 모든 두려움이 지나간다)
Because I know, I know, He holds the future.
(나는 알고 있다, 나는 확신한다, 그가 그 미래를 붙잡고 있다는 것을)
And life is worth the living, just because He lives.
(인생은 살아 있는 가치다, 그가 살아 있음으로 인해서 말이다)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해 주는 것 같습니까?
남편이 단핵구증이라는 전염병으로 무기력에 빠져 아무런 것도 못하고 있을 때, 그로 인해 그의 아내마저 힘들어 할 때, 주님은 그 부부에게 임마누엘로 함께 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로 인해 절망과 두려움에 물려가고 내일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죠.
환경은 바뀐 게 없을지라도 임마누엘 주님이 함께 하심을 깨닫게 되면 내일을 맞서나갈 힘을 얻는 것 말입니다.
(내음성) 그렇기에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주님께서 기뻐받으시겠습니까?
“주님, 저에게도 임마누엘 주님을 만나게 해 주세요.”
“마리아와 요셉에게 찾아와주신 성령님의 임재, 임마누엘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무기력증에 빠져 있는 빌과 그 아내 글로리아에게 성령님의 임재로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실 때 평강을 얻게 되었잖아요.”
“저도 제 자녀들도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 않아요. 하지만 주님. 임마누엘 주님의 임재 속에서 이 세상을 이길 힘을 불어넣어주세요.”
“오직 주님만이 제게 있는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을 물리칠 수 있사오니, 살아계신 주님의 은총을 덧입혀 주세요.”
(찬양)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의 모든 종교는 신을 찾아가는 구도자의 종교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인간의 삶에 직접 찾아오신 임마누엘 주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죄와 사망으로 치닫는 이 땅의 백성들에게 친히 찾아와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내일에 대한 절망과 근심속에 있는 자녀들에게 임마누엘의 평강을 불어넣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질병과 죽음의 고통 속에 있는 자녀들에게 치유와 영생의 소망을 안겨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 함께 해 주신 그 주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임마누엘 주님은 2021년 코로나19와 변이 바이러스가 우리를 둘러 진칠지라도 결코 거꾸러뜨림을 당하거나 넘어지지 않도록 붙자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분은 지금도 우리 안에 성령으로 임재하셔서 그 모든 삶을 이기게 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이십니다.
오늘 임마누엘 주님을 찬양하는 저와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 성탄의 기쁨과 평강이 충만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일설교SundaySerm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영상]세우느니라(엡2:12-16)_2021년 송년주일 (0) | 2021.12.26 |
---|---|
세우느니라(엡4:12-16)_2021년 송년주일설교말씀 (0) | 2021.12.24 |
[동영상] 마리아는 마음에 새기어_대림절넷째주일설교 (0) | 2021.12.19 |
마리아는 마음에 새기어(눅2:15-20)_대림절넷째주일설교 (0) | 2021.12.19 |
[동영상] 목자들이 양 떼를 지키더니(눅2:8-11)_대림절셋째주일설교 (0) | 2021.12.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