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은 느헤미야서 3장은 예루살렘 성벽 중수, 즉 성벽 보수공사에 관한 기록입니다. 예루살렘 성과 성문들의 상태는 1장 3절에서 이미 읽은 바 있듯이, 성이 허물어지고 성문들이 불타버렸죠. 포로귀환자들 가운데 자기 친동생과 몇 몇 사람들이 그런 상태를 보고 수산 궁에 있는 느헤미야에게 와서 이야기한 내용이었죠. 그만큼 성전은 재건했지만 성과 성벽은 허물어진 상태 그대로였죠.
그런 상황을 전해 들은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아닥사스다 왕 앞에 섰죠. 그래서 2장 5절을 통해 기한을 주면 성을 건축하고 돌아올 것이요, 그에 따른 통행증도 내주시고, 벌목 허가증까지 달라고 계획을 세워 보고했죠.
그래서 아닥사스다 왕의 허가를 받은 느헤미야는 3차 포로귀환자들 극소수의 귀환자들과 돌아왔고, 3일간 쉼을 얻은 후 4일째 되는 날 몇몇 사람들과 밤에 나귀를 타고 잠행에 나섰죠. 과연 성벽과 성문들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코자 말이죠. 그런데 두 눈을 뜨고는 못 볼 정도로 황폐화 되어 있었죠. 그래서 여러 방백들에게 말했죠. 우리가 이런 수치를 당하고 살 게 아니라 힘을 모아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자고 했죠. 그 말에 감동받은 이들이 모두 성벽재건에 뜻을 모으고 준행하기로 결의했죠.
오늘 읽은 3장 말씀은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읍의 성문에 관한 언급은 구약의 역사서와 예언서 몇 곳에만 기록돼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도 두 곳만 등장하죠. 요한복음 5장의 ‘양문’과 사도행전 3장의 ‘미문’이 그렇죠. 그런데 오늘 읽은 느헤미야 3장에는 성문에 관한 언급만 9번 나오고, 29절의 ‘동문지기’까지 포함하면 총 10개의 문이 등장하죠.
물론 오늘날 존재하는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성은 솔로몬이 건축했던 예루살렘 성의 구조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더욱이 2천 년 전 예수님의 공생애 시기의 보여준 것과도 훨씬 차이가 있죠. 그때보다 훨씬 규모가 큰 성읍이 되었는데, 그 규모가 확장된 것은 예루살렘 성 안에 골고다 언덕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예루살렘 성에 있는 문은 모두 8개입니다. 예루살렘 성의 형태는 원형도 아니고 사각형도 아니지만, 둘 중 하나를 생각한다면 사각형에 가깝죠. 그 성읍의 동서남북 각 방향에 2개의 성문이 있는데, 동쪽에 있는 두 개의 문, 곧 ‘양문’과 ‘미문’만 그대로의 이름을 간직하고 있죠. 그래서 예루살렘 성문들의 이름은 그들의 생활양식과 연관돼 있습니다. 이른바 ‘양문’은 ‘양의 문’으로서 성전 제사를 위해 양들이 들어오는 문이기에 ‘양문’으로 붙인 것이고, ‘마문’은 말들이 출입하는 문, ‘어문’은 바다나 호수에서 잡아온 물고기들을 주로 유입하기 때문에 ‘어문’으로, 또 ‘분문’이 있는데 그 이름은 성읍에 사는 백성들이 분뇨를 처리하기 위해 출구로 사용한 문이 ‘분문’입니다. 또 ‘수문’과 ‘샘문’은 성 주변에 샘물이 있기 때문에 그 물을 퍼 나르는 문으로, 그리고 ‘골짜기 문’은 골짜기로 나가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렇게 이름 한 것이죠. 그리고 ‘모퉁이 문’은 모퉁이 즉, 모서리 가까운 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고, 마지막으로 발음하기 어려운 문이 있는데, 31절에 나오는 ‘함밉갓 문’이 그것입니다. ‘함밉갓 문’은 히브리 발음을 그대로 음역한 것인데, 관사 ‘하’에 ‘미프카드’라는 단어가 붙어있는 형태입니다. 그 단어는 ‘임무’라는 의미도 있지만 사무엘하 4장 27절에 쓰인 용례를 보면 ‘인구조사’와 ‘소집’의 의미도 있죠. 그래서 그 ‘함밉갓 문’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백성들을 소집할 때 사용한 문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런 성벽과 문들이 대부분 무너져 황폐화된 것이죠. 그래서 성벽을 포함해 성문의 보수공사를 앞두고 느헤미야는 어제 2장을 살펴 본 것처럼 밤중에 몇 사람들을 데리고 성벽답사를 한 것이었죠. 그래서 느헤미야는 나귀를 타고 북서쪽에 위치한 골짜기 문으로 나가 남서쪽에 있는 ‘분문’을 거쳐서 동남쪽에 있는 ‘샘문’까지 잠행에 나섰던 것입니다. ‘골짜기 문’에서 ‘샘문’까지는 예루살렘 성을 사각형 형태로 보았을 때 ‘ㄴ’자 쓰기 순서대로 쭉 살펴본 것이었죠. 그리고 ‘샘문’에 다다랐을 때 이제 북쪽을 향해 성벽과 성문을 점검해 볼 차례였는데, 바로 그 지점부터는 각종 잔해물과 쓰레기 더미 때문에 나귀를 탈 수가 없어서 걸어서 살펴봤던 것이죠. 그렇게 해서 북쪽으로 가며 답사를 마무리하고, 다시 시작점인 ‘골짜기 문’으로 들어와 숙소로 들어간 것이었죠.
그렇게 답사를 끝마친 느헤미야가 오늘 3장에 이르러 본격적인 성벽 보수 공사를 진행하는 모습입니다. 느헤미야의 성벽보수 공사는 북동쪽에 위치한 ‘양문’에서부터 시작을 하죠. 1절에 나온 대로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기”를 시작하여 ‘시계 반대방향’으로 성벽과 성문 보수공사를 순차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절에 나오는 ‘어문’까지 성벽을 세워나가는데, 그 사이 곧 양문’과 ‘어문’ 사이에 망대 두 개를 세우죠. 망대는 적을 관측할 수 있는 높은 타워를 칭하는데, 양문과 어문 사이에 함메아 망대와 하나넬 망대를 세운 것이죠.
그 ‘어문’ 다음으로 6절에 ‘옛 문’, 13절의 ‘골짜기 문’, 14절의 ‘분문’, 15절의 ‘샘문’, 26절의 ‘수문’, 28절의 ‘마문’, 그리고 마지막 31절의 ‘함밉갓 문’을 연결해서 짓고 세우죠. 그만큼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 수리를 하는 이 모습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각자 정한 한 문을 기점으로 다음 연결지점까지 성벽과 성문을 세워나갔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제사장과 레위인과 상인, 그리고 일반 평민까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이 공사에 참여했다는 점이죠. 물론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 공사 구간만 아니라 다른 공사 구간까지 거들고 협력하기도 했지만, 그와는 달리 5절의 드고아 귀족들은 아예 자신들이 맡아야 할 공사까지도 참여치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든 함께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으면 좋은 결과를 이룰 수 있다는 점’ 아니겠습니까? 백짓장도 받들면 낫다는 게 그런 이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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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느헤미야가 성벽과 성문 재건에 온 힘을 쏟은 진정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외형적인 건물의 벽과 문을 세우는데 집중했을까요? 아니죠. 그 성벽과 성문을 통해 백성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울타리, 곧 영적 방어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게 진정한 목적이죠.
비록 1차 포로귀환자들을 이끌고 온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주축이 되어 성전을 재건했다 해도, 또 2차 포로귀환자자들이 이끌고 온 에스라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대로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삼은 그 모습을 개혁했다고 하더라도, 성벽과 성문이 허물어진 상태로는 외부의 잦은 약탈과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죠. 그것은 단순한 약탈과 유혹을 넘어 그들의 영적 상태까지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있죠. 그래서 그런 외부의 약탈과 유혹을 차단하고, 더 나아가 백성들의 심령을 더욱더 공고히 해 줄 요량으로 성벽과 성문을 통해 영적 울타리를 든든하게 세워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에스라는 에스라서 7-10장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의 심령을 하나님의 율법으로 개혁코자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10장 이후에 에스라 선지자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지 않고, 페르시아 왕궁으로 돌아갔다고 성경학자들은 전하죠. 그러니 느헤미야로서는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는 그 일을 통해 그들의 영적 울타리를 더 확고하게 세워나갈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성전도 있고, 제사장과 레위인도 있지만, 진정한 영적 울타리를 확고히 쳐야 다시금 외부의 약탈과 유혹에 빠져들지 않고 그들의 심령을 견고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온 백성들이 나서서 자신들이 맡은 할당 부분에 모두가 참여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는 그 일을 통해 그들의 심령상태를 깨닫고 그들 모두가 영적인 울타리까지 견고하게 칠수 있도록 말이죠.
그렇게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회복을 원한다면 교회생활을 문제 삼기보다 교회생활을 안정적으로 하지 못하게 하는 외적인 요인 곧 외부의 약탈과 유혹을 먼저 살피는 게 중요하죠. 그 일로 수치를 당하지 않고, 견고한 울타리를 세울 수 있는 방안도 간구하는 것 말이죠. 그만큼 영적인 울타리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나의 신앙생활을 침해하는 요소가 있다면 기꺼이 영적 울타리를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3차 포로귀환의 인솔자인 느헤미야가 백성들에게 자신들이 사는 근처의 성벽과 성문을 세우도록 독려했습니다. 그 일에 모두가 뜻을 모아 합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성벽과 성문을 세우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를 통해 영적 울타리를 굳게 세우고 영적 신앙생활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저희들도 성벽과 성문을 보수 공사하는 심정으로 영적 방어체계를 구축하게 하시고, 세상의 사고방식과 유혹을 차단하여, 온전한 은혜의 울타리를 구축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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