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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SundaySermon

마땅히 생각할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롬12:3-5)

by 똑똑이채널 2021.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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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나예) 제 딸이 수시에 접수한다고 해서 무심코 제가 “‘한전공대넣어 봐라했습니다.

그때 제 딸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빠, 거기는 전국적으로 몰리는 곳이에요. 바랄 걸 바래야지요.”

 

그때 저는 이렇게 또 말을 했죠.

아니, 또 아냐? 지원자가 많지 않으면 기회가 올 수 있을지.”

그러자 제 딸이 딱 잘라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거기는 1등급 얘들이 오는 곳이예요. 괜히 거기 넣다가 다른 곳에 넣을 기회가 사라지게 되잖아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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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그때 제가 느낀 게 그것입니다.

우리 딸은 자기 분수를 아는 구나, 하고 말입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지 않는 구나, 하고 말이죠.

 

(예화) 나귀가 한 마리 살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청년기가 되어 사람을 태우고 다니다 보니 왠지 새로운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느 날부터 자기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모두 자기 앞에 절을 하는 것이었죠.

그때부터 이 당나귀는 자신을 위대한 동물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신의 등 위에 자꾸 어떤 사람이 타고 다니는 것이었죠.

그 당나귀는 은근히 화가 났습니다.

모든 사람이 내가 지나가면 절을 하는데, 어떤 녀석이 감히 내 등에 타고 다니느냐는, 하는 것이었죠.

 

어느 날에는 도저히 참다 못해, 앞 발을 높이 들고, 등에 탄 사람을 떨어뜨려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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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야말로 채찍으로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그 집안에서 팔려나갔다는 사실이죠.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자기 등에 탄 임금님을 보고 절한 것인데도,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절한 줄로 착각했기 때문이니다.

마땅히 생각할 이상의 것을 생각지 말라야 하는데,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다, 그렇게 된 것이죠.

 

(적용) 그런데 당나귀만 그렇게 착각하며 살겠습니까?

우리도 때로 착각하며 살 수 있죠.

 

영적인 원리가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악한 영의 세력들이 내게 다가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영적인 세력들이 내 앞에서 주춤거리고, 심지어 내 앞에서 벌벌 떤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 이 녀석들, 내 앞에서 벌벌 떠네.”

, 저 녀석은 주눅들어 있잖아.”

이야. 내가 대단한 존재인가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나 자신인데,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나 자신인데, 때로 그걸 망각할 때가 있죠.

영적인 세력들은 물론이고, 사람들 앞에서, 교만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 교만한 당나귀와 같은 모습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녀라 해도, 우리는 죄의 부패성을 안고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하죠.

그때에만 성령님의 임재를 모시고 사는 겸손한 인간으로 살 수 있는 것이죠.

그때에만 언제 어디서나 마땅히 생각할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된 성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로마서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고린도에 3개월간 머물 때 쓴 편지라고 했죠.

그때 자생적으로 세워진 로마교회의 성도들 믿음이 바울이 머물고 있던 고린도에까지 전해졌죠.

 

바울은 그때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자기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주님께 드리듯, 펜을 들어 로마서를 썼습니다.

로마교회가 평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신생교회라 그들은 구원이 무엇인지, 구원받은 삶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었죠.

 

그런 그들을 위해 바울은 로마서 1-11장까지 구원의 이론에 대해, 다시 말해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지 썼죠.

구원이란 쉽게 말하면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건져내서 살려주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자기 힘이나 자기 실력이나 자기 능력으로 물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 건져내줘야 하는 것이죠.

 

그것은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죠.

우리도 아담의 후예들로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죄의 후손들이죠.

이런 죄의 후손인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우리 스스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예수님만 구원자가 되실 수 있죠.

 

바로 그와 같은 사실을 바울은 로마서 1-11장까지 써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12-16장까지는 구원의 실천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구원받은 자녀가 어찌 살아야 할지를 쓴 것이었죠.

 

바울은 자기 몸을 산 제물로 주님께서 드리듯이 쓴 그 편지를 누구편으로 보냈다고 했습니까?

고린도의 외항 겐그레아 출신인 젊은 여집사 뵈뵈 편으로 보냈다고 했죠.

 

만약 뵈뵈 집사가 그 일을 단지 인간 바울의 심부름으로만 여겼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결코 그녀는 고린도에서 직선거리로 800km 걸리는 그 거리, 배로 한 달 이상은 가야 했던 그곳 로마를 향해 가지 않았겠죠.

하지만 그녀는 바울의 부름이 하나님의 부르심인 줄 알고, 그녀도 자기 몸을 주님께 산 제물로 드리듯이 가지고 갔던 것이죠.

 

(깨달음) 그와 같은 사실을 통해 지난 시간에 깨달은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 몸을, 곧 자기 모든 인격을, 자기 소유와 재물까지도, 모두 주님께 산 제물로 드리며 살아야 한다고 했죠.

 

바로 그것이 영적인 예배이기 때문이죠.

바로 그것이 이 세대가 추구하는 모습과는 달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사는 길이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녀가 자기 몸, 자기 소유, 자기 재물, 자기 전 인격을 주님께 내어드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당나귀처럼 행동하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값없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녀가, 그 주인이신 하나님께 자기 전 인격을 내어드리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과 결코 다를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몸으로는, 그런 인격으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며 살 수가 없기 때문이죠.

 

(적용) 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 각자의 몸을, 우리 각자의 소유권과 재물까지도, 온전히 산 제물로 주님께 내어드리며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자녀를 더욱더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길로 친히 인도하시는 아바 아버지이신 줄 믿습니다.

 

(찬양) 나의 모습 나의 소유 주님 앞에 드립니다

모든 아픔 모든 기쁨 내 모든 눈물 받아주소서

나의 생명을 드리니 주 영광 위하여 사용하옵소서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주를 찬양하며 기쁨의 재물되리 나를 받아 주소서

 

어제 일과 내일 일도 꿈과 희망 모두 드립니다

모든 소망 모든 계획 내 손과 마음 받아주소서

나의 생명을 드리니 주 영광 위하여 사용하옵소서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주를 찬양하며 기쁨의 재물되리 나를 받아 주소서

 

(본문) 바울은 로마서 1-11장까지 구원의 교리편을 써 보냈고, 12장부터는 교리의 실천편을 써 보냈다고 했죠.

그 중에 12장은 구원받은 자녀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세 가지 차원으로 권면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권면하죠.

121-2절의 말씀입니다.

 

둘째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성도들 사이에서,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관계 맺고 살지를 권면해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123-13절까지 나온 말씀입니다.

 

셋째는 성도가 이 세상 사람들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할지를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14-21절까지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 중에서 3-5절 말씀은 구원받은 자녀가 공동체 안에서 어떤 지체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하는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원해) 이 말씀은 공동체 내에서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서론적인 권면입니다.

다만 소극적인 권면과 적극적인 권면이 나옵니다.

동일한 내용인데 앞에서는 부정문으로 품지 말아라하고 말하고 있고, 뒤에는 긍정문으로 지혜롭게 생각하라하고 말하죠.

 

앞에 나온 소극적인 명령문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이런 뜻이 됩니다.

반드시 생각하여야 할 것 이상으로 너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하지 말라하는 것이죠.

한 마디로 말하면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위험 중에 하나가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이죠.

 

마치 임금을 모신 당나귀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듯이 말이죠.

악한 세력들이 내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예수님 때문인데도 마치 내가 능력이 있는 것마냥 착각하면 과대평가하게 되죠.

 

(성화)이는 구약의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 기드온의 아들 중에 아비멜렉의 모습이 그렇죠.

10만 명이 넘는 미디안 대군이 쳐들어올 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네가 나가서 싸워 승리해라하고 말씀해주셨죠.

그때 세 가지 체험을 통해 전쟁에 나섰는데, 기드온에게 몰려든 이스라엘 군인 수가 32,00명이나 됐죠.

10만 명대 32천명, 그 수도 너무 작은데, 하나님께서는 그 수를 줄이도록 하셨고, 결국 300명만 남게 되었죠.

 

그런데 전쟁은 군대의 수나 전쟁 물자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죠.

기드온의 300명 용사가 들고 나간 항아리 나팔 횃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때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기드온을 향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하고 말하죠.

하지만 기드온은 결단코 나는 왕이 될 수 없소. 나는 왕이 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오.”하고 거부했죠.

 

그런데 기드온이 70명이나 되는 자식을 두었는데, 그 중에 한 아들 아비멜렉이 문제였죠.

그는 스스로를 과대평가한 나머지 왕이 되겠다고 하면서 불량배를 동원해 70명의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말았죠.

 

그런 그가 왕이 되어 평생토록 왕으로 살았습니까?

아니죠.

불행하게도 그는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머리가 깨져 비참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면 자기 자신도 망가질 뿐만 아니라 주변 형제들까지도 망가뜨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죠.

(은혜) 주님은 우리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는 것, 과대평가하지 말고, 겸손하게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이 시간에 주님께서 이렇게 우리 심령에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그래도 네 딸이 분수를 알아서 너는 감사하지 않느냐?”

너도 내 앞에 분수를 알고 있느냐?”

네가 당나귀처럼 교만한 모습으로 과대망상 속에 살고 있는 모습은 없었더냐?”

네가 능력이 있어서 귀신이 떠나간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더냐?”

너도 아비멜렉처럼 과대평가하여 네 형제들과 주변 사람들과 성도들을 힘들게 한 적은 없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너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고 늘 겸손하게 주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너는 주님이 주신 삶에 자족하지 못한 채 분에 넘치는 것만 바라보고 살아왔다면 그 길에서 돌아서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당나귀처럼 그 길을 좇고 있다면, 네가 악한 영들 앞에서 주님보다 더 교만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돌아서길 바란다.”

네가 아비메렉처럼 너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여 너와 주변 형제들과 사람들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내려놓기를 원한다

 

(찬양) 주여 우린 연약합니다 우린 오늘을 힘겨워합니다

주 뜻 이루며 살기엔 부족합니다 우린 연약합니다

주여 우린 넘어집니다 오늘 하루 또 실수합니다

주의 긍훌을 구하는 죄인입니다 우린 주만 바라봅니다

 

한없는 주님의 은혜 온 세상 위에 넘칩니다

가릴 수 없는 주 영광 온 땅위에 충만합니다

주님만이 길이오니 우린 그 길 따라갑니다

그날에 우릴 이루실 주는 완전합니다

 

(본문) 그런데 본문 3절의 후반절 말씀은 앞선 소극적인 명령문과 달리 적극적인 명령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하는 말씀이 그것이죠.

원문대로 번역하면 믿음의 분량대로 냉정하도록 계속해서 생각해라하는 뜻입니다.

 

바울이 생각하라는 동사를 사용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면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힘들게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너 자신의 삶을 통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 않도록,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도록, 절제하며 숙고하며 살라는 권면이죠.

 

물론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구원과 관계된 믿음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 주어진 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죠.

 

그를 위해 하나님께서 각기 다른 재능과 달란트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꼭 그 사람에게 맞는 재능과 달란트 말입니다.

 

그런데 왜 저 사람에게는 저런 큰 재능을 주셨는지, 왜 나에게는 이토록 작은 달란트만 줬는지, 불평하지 말라는 거죠.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재능과 달란트를 주시기에, 다른 사람이 받은 걸 시기하지 말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각자가 받은 재능과 달란트와 은사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면 된다는 뜻입니다.

 

(성화)이는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께서 천국비유 곧 달란트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신 것과 같은 격입니다.

주인이 어떤 종에겐 다섯 달란트를, 다른 종에겐 두 달란트를, 그리고 다른 한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죠.

그렇게 주인이 그 종들에게 각기 다른 재능을 보고 각기 다른 달란트를 맡긴 후에, 시간이 되어 돌아와 계산을 하죠.

 

그때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은 더 성실하게 일해서 또 다른 다섯 달란트를 남겼죠.

주인은 그렇게 성실하게 일하고 남긴 그를 보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이제 두 달란트 받았던 종을 평가하는데, 놀랍게도 그도 자기 분야에서 성실하게 일을 해서 두 달란트를 남겼죠.

주인은 그를 향해서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격려해줬습니다.

 

이제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셈하는데, 그는 한 달란트 그대로 가져왔죠.

더욱이 그가 받은 한 달란트로 무언가를 시도하거나 일을 한 게 아니라 그냥 그것을 땅에 묻어둔 것이었죠.

 

그때 주인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25:26-30)

 

왜 그 종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있었을까요?

그는 그 주인이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알았(25:24)다고 고백을 하죠.

그만큼 그 종은 자신이 많은 것을 남기면 그 주인이 와서 모두 빼앗아 갈 줄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주인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무릇 그 주인이 준 분깃에 자족하며, 감사하고, 더욱 성실하게 일하며 남긴 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맡기는 자였죠.

하지만 받은 분깃에 불평하고, 원망하며, 주어진 것에 땀흘려 일하지 않는 자에게는, 그 있는 것까지 다 빼앗아 버렸죠.

 

(깨달음)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입니까?

하나님께서 너에게 맡긴 재능과 달란트가 각기 다 다르다면, 그것이 작다고 불평하지 말고, 주신 바를 족한 줄로 알고,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가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마땅히 생각할 바를 넘어 그 이상의 생각 속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믿음의 분량대로 자족하면 더 열심히 남겨서 하늘나라의 상급을 받는 길이죠.

 

(내음성) 그래서 오늘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가 주신 분깃과 재능과 달란트를 다른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알아요.”

제게 주신 주님의 역량이 어떤지, 제에게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부어주신 분야와 달란트가 무엇인지 제가 알아요.”

주님. 그것이 제게 너무 적다고 불평하지도 말게 하시고, 너무 많아 바쁘다고 투덜대지도 말게 해 주세요.”

오직 주님께서 주신 재능과 달란트에 감사하고 자족하며, 더욱 성실하게 감당하여 더 많은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게 해 주세요.”

그리하여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다가, 주님 부르실 때 천국에서 더 많은 상급을 누리게 해 주세요.”

 

(찬양)한없는 주님의 은혜 온 세상 위에 넘칩니다

가릴 수 없는 주 영광 온 땅위에 충만합니다

주님만이 길이오니 우린 그 길 따라갑니다

그날에 우릴 이루실 주는 완전합니다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용조 목사님이 예전에 네트워크 강의에서 1천 조각 짜리 퍼즐을 맞추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 깨달은 게 있었습니다.

한 개 한 개, 그 조각들이 각자의 자리에 있을 때 환상적인 그림이 된다는 사실 말이죠.

 

그것이 실은 교회요 그것이 실은 하나님 나라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작게 보이고 여리게 보여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있어야 교회가 되고,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죠.

 

그가 하나님께 받은 달란트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꼭 그에게 맞는 절대적인 달란트를 주신 분입니다.

그러니 내가 받은 것으로 과대평가할 필요도 없고, 또 남의 것을 보고 의기소침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내게 주신 믿음의 분량을 따라 주님 앞에 성실하게 감당할 때 더욱 귀한 상급의 은혜를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의 주인공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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