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성화)수요일날 밤에 나눈 말씀을 잠깐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씀이 기독교의 기본 원리요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구원받기 위함이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함이라는 점입니다.
그 사실을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한 내용 가운데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빌립보를 거쳐 데살로니가, 또 베뢰아를 거쳐, 아테네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성채 위에는 104개나 되는 기둥을 자랑하는 그리스에서 가장 큰 제우스 신전도 있었고, 46개의 기둥으로 세운 파르테논 신전도 있었습니다.
그 밖에 크고 작은 신전들도 있었고, 3만개 되는 신상들도 세워져 있었는데 그 중에는 ‘알지 못하는 신들’조차 있었죠.
일본 사람들이 800만개나 되는 신주단지를 모시고 사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인 셈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아테네의 철학자들 곧 에피쿠로스주의자들과 스토아주의자들에게 이끌려 아레오바고 언덕으로 향했죠.
그곳은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위치한 넓은 바위 언덕을 가리키는 곳인데, 그 옛날 아테네 초창기에는 귀족회의장소였죠.
그 후에 그곳은 법정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소크라테스도 그곳에서 재판을 받은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그 철학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했는데, 맨 먼저 운을 뗀 게 그것이었죠.
아테네 시민들은 종교심이 많이 있지만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기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말이죠.
그러면서 바울은 내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이시라고,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의 소유권자와 통치권자라고 선포했죠.
그 하나님은 아테네 시민들이 신전에 신을 모시는 것과 달리 결코 신전에 제한받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아테네의 신전 앞에 재물을 바치고 뭔가 부족하여 더 원하고 더 달라는 신과는 차원이 다른 분이라고 했죠.
그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맡겨주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깨달음) 바울이 선포한 그 복음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나 자신의 소유권자요 통치권자라는 사실, 하나님은 곧 ‘나의 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 분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죄와 심판과 죽음에서 자유케 해 주셨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았던들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실 이유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나의 주인되신 하나님’은 아테네의 3만개 신들처럼 나에게 뭔가를 달라고 하고 원한다고 하는 분이 아니란 거죠.
‘나의 주인되신 하나님’은 오히려 나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맡겨주시고 베풀어주시는 ‘나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나의 주인되신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재물을 달라고 하시고 더 원한다고 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나의 주인되신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당이 굿을 할 때 작게는 500만원 많게는 2천만원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귀신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는 게 아니라 도적처럼 죽이고 멸망시키는 게 목적이죠.
더욱이 내림굿을 받은 무당이나 작두 타는 무당은 그 신통력이 3-4년이면 끝나 버리죠.
그 무당이 모시는 귀신은 그 무당을 괴롭히고, 더 많은 재물을 원하다가, 급기야는 또 다른 사람을 무당을 삼아 떠나기 때문이죠.
그 사이는 그 무당은 신통력이 다하고, 급기야 패가망신하는 게 무당의 삶입니다.
그렇다면 아테네 신전에 제물을 받치는 모습이나 무당이 굿을 할 때 제물을 바치게 하는 모습이 똑같다는 걸 알 수 있죠.
그렇다면 ‘나의 주인되신 하나님’께 우리가 예물 곧 헌금을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을 얼래고 달래서 나의 소원을 성취하듯이, 그렇게 미신을 섬기기 위해 헌금을 드리는 걸까요?
결코 그렇지 않죠.
내가 예배때 헌금을 드리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매번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함이죠.
더욱이 나의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내게 생명과 호흡을 주셨고 이 땅에 맡겨주신 것들의 소유권자임을 고백하는 뜻으로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깊이 엮어나가는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테네 신전 안에서 끝낸다면, 예배당에 나와 내 몸과 마음과 헌금을 드릴 때, 끝낸 다면,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엮어나갈 수 있을까요?
예배를 통해 주님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에 조금이라도 실천하며 변화되는 삶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깊이 엮어나가는 길입니다.
(적용) 제가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으셨습니까?”
“네, 저는 저의 죄와 심판과 사망에서 건져내 주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예요.”
그렇게 대답한다면 너무나 확실하고 멋진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주인되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계십니까?”
그렇게 질문을 할 경우에 이렇게 대답하는 분들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네, 기도할 때 눈물이 쏟아지고, 몸에 진동이 오고, 평소 환상이나 신비로운 체험을 해요.”
그렇게 대답하는 분이, 과연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모습일까요?
기도할 때 눈물 나고 몸에 진동이 생기고, 환상과 신비로운 체험을 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활력을 주는 요소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주인되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주인되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예배당에서 내 몸과 마음과 헌금을 드릴 때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말씀으로 내 삶이 변화되는 것, 그것이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모습이죠.
주님을 믿기 전과 지금이, 5년 전이나 10년 전보다 지금이, 주님을 조금이라도 닮아가고 있다면, 그것이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깊이 엮어나가는 모습이죠.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아테네 철학자들에게, 전하고자 한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성화2) 그런데 바울이 아테네 시민과 철학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다른 동역자들은 무얼 했을까요?
실라와 디모데는 아테네로부터 320km 떨어진 베뢰아에 남아 새신자들의 믿음을 북돋아주었죠.
그렇다면 그 이전에 들러서 세운 빌립보교회, 그 교회에 남겨둔 누가는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요?
의사출신인 그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위해 자기 달란트 곧 자기 의술로 그들을 섬겼겠죠.
(깨달음) 그와 같은 사실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지난주 말씀드렸듯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분량대로 성실을 다하면 된다는 점이죠.
바울은 바울에게 부어주신 그 역량과 달란트대로 그의 주인되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섬기면 되죠.
새로운 개척지로 부르는 그 역령과 달란트대로 주님의 나라를 세워가는데 그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 말이죠.
실라나 디모데 그리고 누가는 주님께서 주신 생명과 호흡과 맡겨주신 달란트를 다해 각자 각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면 되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메시지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본문) 오늘 읽은 본문 4-5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원해) 바울은 로마서 1-11장까지 구원의 교리편을, 12-16장까지 교리의 실천편을 써 보냈죠.
12장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자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어떻게 맺으며 살아가야 할지 세 가지 차원으로 권면해 줬다고 했습니다.
1-2절까지는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신 자가 어떻게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갈지를 권면한 말씀이죠.
3-13절까지는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신 자가 교회의 몸된 지체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지를 말씀한 권면입니다.
14-21절까지는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신 자가 세상 사람들과의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할지를 권면한 말씀입니다.
방금 읽은 4-5절 말씀도 하나님을 ‘나의 주인’을 모신 자가 어떻게 교회의 지체들과 관계를 엮어나갈지를 말씀하는 권면이죠.
여기에 ‘한 몸’이란 바로 몸된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체’란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교회 공동체 개개인을 말하는 것이죠.
교회란 예배당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신 개개인의 모임을 말하는 것이죠.
그 개개인이 몸된 교회를 이루는 지체요, 그 지체들은 다들 다른 기능을 하나님께 맡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 기능이 무엇이겠습니까?
6-8절에 나와 있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예언을 하는 분, 섬기는 분, 구제하는 분, 다스리는 분, 긍휼을 베푸는 분 등 다양한 기능이죠.
(깨달음)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교회 공동체 내에 각각 맡은 역할과 직책을 말하는 것이죠.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 중에, 어떤 분은 안내로, 반주로, 교사로, 찬양대로 섬기는 모습 말이죠.
어떤 분은 청소로, 식당 봉사로, 재정으로, 또 저 같은 이는 말씀을 맡아 섬기는 모습으로 말이죠.
이것은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역할이 설교하고 예언하는 기능을 맡은 것과 같은 격이죠.
베뢰아에 있던 실라와 디모데는 교회 성도들을 말씀으로 가르치는 교사의 기능을 발휘한 격이죠.
빌립보에 남은 누가는 그 교회 성도들을 의술로 봉사하고 섬긴 역할을 맡은 것과 같은 격이죠.
(적용) 중요한 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지체들은 각 지체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가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손이나 팔만 있어서는, 다리와 무릎만 있어서는, 온전한 몸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저와 여러분 개개인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소중한 분들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우리 주님의 저와 여러분 모두가 자유로교회 곧 주님의 몸된 교회를 받드는 소중한 지체들이라는 사실읿니다.
(원성) 그래서 에베소서 4장 16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주문) 그렇다면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나요?
(은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교회의 개개인에게 주님은 각각의 재능을 맡겨주셔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게 함으로서 그 관계가 더욱 깊어지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나의 주인되신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으로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느냐?”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와 심판과 사망에서 자유함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느냐?”
“너는 오늘 당장 죽는다 해도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그 모든 게 값없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때문이지 않더냐?”
“그러나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는 그 구원의 단계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주님께서 너를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해 주신 것은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더 깊이 엮어나가도록 하기 위함 아니더냐?”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몸된 교회의 지체들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몸된 교회의 성도들을 섬기는지로 깊어지지 않겠느냐?”
“네가 가르치는 일을 잘 한다면 교사로 섬기고, 찬양을 잘 한다면 찬양대로 섬기고, 안내를 잘 한다면 안내하는 기능으로 섬겨야 주님과의 관계도 성도들과의 관계도 더 깊어지지 않겠느냐?”
“자전거도 패달을 밟아야 더 잘 나가듯이 너에게 생명과 호흡과 재능을 맡겨준 그 달란트대로 주님을 섬기고 성도들을 섬겨야 주님과 더 인격적인 관계가 깊어지지 않겠느냐?”
“그것이 너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깊으신 뜻임을 네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것이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상급을 받는 자요,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 성도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깊어 있게 역어나가는 참된 주님의 자녀들 아니겠느냐?”
(찬양)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엔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 주소서 내 입술에 찬양의 향기가
두 손에는 주를 닮은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발췌) 송용필 목사의 '갚을 길 없는 은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칼 루이스’가 금메달을 땄죠.
그때 그 금메달리스트들이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간증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 통역을 맡은 분이 송용필 목사님이란 분입니다.
그분은 그 전에 워런 W. 워스비 목사님과 존 맥아더 목사님의 설교를 통역하기도 했었죠.
1985년엔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식 행사에서 빌리그레이엄 목사님의 설교를 통역한 분입니다.
본래 그는 함경남도 장진군 상남면 출신으로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피난한 아이였죠.
그때 당시 충청남도 공주 땅에 정착을 했는데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마쳤습니다.
공부는 곧잘 했는데, 집안 형편 때문에 알아주는 중학교에 입학하고서도 다닐 수가 없었죠.
그는 꿈을 이루고자 집을 뛰쳐나와 무작정 서울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서울에 들어가려면 통행증이 있어야 했는데, 그게 없어서 미군용차를 타고 내린 곳이 수원역이었습니다.
그때 한 아이가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제공하겠다며 그를 데려갔는데, 그곳이 양아치 소굴이었죠.
그곳에 양아치들이 시키는 일을 하다가 틈을 봐서 뛰쳐나와 파출소로 달아났죠.
그때 어느 순경의 도움으로 그는 수원역 대합실에서 거주하며 구두닦이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철도원이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반고등학교에 가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고 허탈감에 빠져 파출소로 돌아오는 길이었죠.
그때 농산물검사소 건물에서 새어나오는 작은 불빛을 보게 되었는데, 그곳이 매산감리교회였습니다.
그 작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왠지 모를 포근함이 밀려왔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외롭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부턴 새벽기도회를 갔는데, 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이 상의를 했는지, 그를 교회 꼭대기로 데려가 거처를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이 송용필에게 “새벽 4시에 일어나 종을 칠 수 있겠냐?”하고 물었죠.
그는 홀로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몸바쳐 헌신하겠다고 했죠.
그 이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은 송용필을 자기 자식처럼 보살펴줬습니다.
그 이후 하나님께서 그를 더욱 감싸주셨고 그 인생의 길목을 하나씩 하나씩 열어주셨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교회집사님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일하며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대학교에 입학했을 땐 등록금 문제로 고심했는데, 역시 그분들이 내줘서 다니게 되었죠.
군대에 전역한 이후에는 김장환 목사님이 시무하는 수원중앙침례교회로 교회를 옮겼습니다.
그때 김장환 목사님과 함께 오산기지 부사령관 윌리엄 대령을 만나러 갔습니다.
여전히 가난했던 송용필은 오산비행장에서 노무 일을 하면서 대학을 졸업하고자 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가 다니던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수원의 오산비행장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어 거절당했죠.
다만 그 대령이 찾던 ‘오르킷’ 꽃도감을 힘들게 구해다 줬는데 그 대령은 “결코 자네를 잊지 않겠네”하고 위로해주었습니다.
그때 자신이 얻고자 했던 오산비행장 노무 일을 못해서 상실감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몇 달 뒤에 미국에서 어느 낯선 권사님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게 되었죠.
알고 봤더니, 그 대령이 본국에 돌아가 어느 교회에서 간증을 했는데, 그때 가난한 대학생 송용필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성령님께서 그 미국인 권사님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면서 말씀하는 것이었죠.
“딸아. 네가 한국의 가난한 송용필 청년의 남은 학비와 미국 유학까지 책임져주면 어떻겠느냐?”
그 은혜 속에서 그는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했고, 그 은혜 속에서 미국에 유학을 가서 공부를 했고, 그 은혜 속에서 미국에서 회계사(CPA)로 생활을 하며 결혼을 하게 되었죠.
그 후에 “북한 복음화를 위해 애써야 되지 않겠느냐?”하는 주님의 음성을 통해 그가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미국의 저명한 목사님들의 통역을 맡았고, 빌리그레이엄 목사님의 설교도 통역하게 된 것이었죠.
(깨달음) 그 분의 인생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토록 갈망하던 오산비행장 노무일을 못해 괴로워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길을 예비하신 것 아닙니까?
그로부터 6개월 뒤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미국의 권사님을 들어 하나님께서 모든 과정을 열어주신 것이었죠.
그때 성령님께서 그의 가슴 속에 깊이 울려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
그리고 이사야 55장 8절과 9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적용) 송용필에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실 때,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때부터, 주님은 그의 인생길을 예비하신 분이셨죠.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송용필이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기까지,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까지, 매산감리교회의 지체들을 친히 사용하셨다는 사실이죠.
그가 거처가 없어 힘들어 할때, 그가 공부하고 싶어할 때, 그의 주인되신 주님은 교회 지체들의 손길을 통해 섬기게 해 주셨다는 사실이죠.
바로 그것이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의 역랑과 달란트를 통해 한 영혼을 세워가신 일이었습니다.
(내음성)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실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요, 주님, 저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죄와 심판과 사망에서 자유케 해주심 감사드려요.”
“주님, 제가 구원받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주님과 더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해 주세요.”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만큼, 저와 함께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지체들과 더 깊은 관계를 맺으며 살게 해 주세요.”
“누군가 송용필 청년처럼 힘든 과정을 거치고 있을지 모르고, 누군가 어려움에 처한 지체가 있을지도 몰라요.”
“그가 초등학생 시절의 송용필이든지, 청년기의 송용필이든지, 장년기의 송용필이든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간에 주님의 몸된 지체로 감싸며 섬길 수 있게 해 주세요.”
“주님께서는 저에게 생명과 호흡과 재능까지 맡겨 주신 부분이 있음을 압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를 제가 섬길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기꺼이 헌신하겠어요.”
“송용필처럼 교회의 종을 쳐야 한다면, 예배당을 청소하고 밥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면, 기꺼이 헌신하게 해 주세요.”
“저에게 생명과 호흡과 달란트를 맡기신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분야를 통해 주님이 몸된 교회와 지체를 섬기게 해 주세요.”
“그것이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깊이 맺는 모습이요, 교회의 지체들과도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모습인 줄 믿어요.”
“주님께서 제게 원하시는 삶을 위해 저를 드릴 때,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주님께서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찬양)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많이 알고 계시며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깊이 이해하신단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절대 포기 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쉬지 않고 지켜보신단단
그의 생각 셀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그의 성심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없단다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깊이 엮어나가길 주님은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배 때 경배와 찬송과 헌금을 드리는 것도, 구원의 은혜를 새기며 내 모든 소유권을 올려드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깊이 엮어나갈 뿐 아니라 몸된 교회의 지체들과도 인격적인 관계를 엮어나가길 원하신 주님입니다.
각 지체에게 생명과 호흡과 달란트를 맡겨주신 그 기능을 따라, 몸된 지체들이 예배드리는 이 공간을 청소하는 것도 그 관계를 깊이 엮어나가는 모습 중의 하나 아니겠습니까?
송용필과 같은 어려움에 처한 학생이나 청년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기도하는 것도 몸된 지체와 깊은 관계를 엮어나가는 길 아니겠습니까?
어떤 분은 종을 치는 모습으로, 어떤 분은 청소하는 모습으로, 교사로, 찬양대로, 재정으로, 주방봉사로, 안내자로, 권사님과 집사님과 새신자를 섬긴다면, 그것이 인격적인 관계를 엮어나가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내 명철을 의지하지 않을 때, 범사에 주인되신 주님을 인정하며 그 관계를 깊어 엮어 나갈 때, 우리의 주인 되신 주님께서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은 측량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로 우리의 인생길을 우리의 자녀들의 인생길을 친히 열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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