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논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지난 시간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는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받기 위함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함 말이죠.
이전에 세상 어둠과 짝하고 살던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을 믿는다면, 이제는 주님의 빛과 진리를 좇아 사는 게 그것이죠.
물론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은다해도 때로 내 판단과 내 생각이 앞설 때가 있죠.
그 때문에 죄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혼탁한 어둠에 빠져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죠.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때마다 당신이 택한 자녀를 빛 가운데 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성화) 다윗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그는 위로 7명의 형들과 달리 배다른 8번째 아들이었죠.
어렸을 때 형들이 집 안에서 편안하게 살 때, 그는 외롭게 양치기에 내몰려 살아야 했던 이유죠.
다만 고독속에서도 곰과 사자의 발톱에서 양들을 지켜내는 물맷돌 실력 곧 자립심을 키웠죠.
다윗이 15살 때 무렵이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 왕으로 기름붓게 하셨죠.
그 후 블레셋의 육척장신 골리앗을 물맷돌로 쓰러트렸고, 여러 전쟁에서 공을 올려 사울의 사위가 됐죠.
하지만 백성들이 사울보다 다윗을 더 높게 평가할 때, 사울은 질투와 시기심이 들끓어 다윗을 죽이고자 했죠.
그때가 다윗의 나이 22살이었는데, 그때부터 8년 넘게 도망자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다윗은 4년 넘게 유대광야 동굴로 도망쳤고 증조 외할머니 룻의 고향 모압에 부모를 맡겼죠.
그 후 유대광야로 돌아와 한숨 돌렸지만 사울의 군대가 여전히 쥐몰이하는 걸 알 때 자기 판단으로 내린 결단이 있었죠.
유대 광야가 아닌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 밑으로 들어가는 걸 택한 게 그것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좇는 게 아니라 오직 자기 명철을 좇아 판단한 결정이었죠.
그런데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브레셋의 신 다곤 곧 우상을 숭배하는 자였죠.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귀신을 숭배하는 사람, 곧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죠.
다윗은 그것까지 생각치 않고 당장에 자기 살길만 찾아 흑암의 세력 안으로 들어간 꼴이었죠.
그때 어떤 일을 겪게 됩니까?
이제는 사울의 군대가 추격하지 않아 더 이상 화를 당할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블레셋의 아기스 왕이 군대를 일으켜 사울 왕의 군대를 치려고 할 때 그 다윗과 휘하의 600명을 동원하도록 명령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그 전투에 참전한다면, 자기 동족을 쳐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었죠.
그 일이 얼마나 곤혹스러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건져내 주십니다.
이른바 아기스 왕의 부하 장수들이 아기스 왕에게 이렇게 건의를 하죠.
“왕이여, 저 다윗이 전쟁에 싸우러갔다가 마음이 변심해 우리 군대를 칠지 모릅니다.”
“저 자를 전투에 참전케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렇게 블레셋의 군대 장수들이 아기스에게 건의하니까, 아기스 왕도 다윗을 돌려보내게 되었죠.
(깨달음) 그 일을 겪고 났을 때 다윗이 어떤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주님, 너무너무 감사해요.”
“지난 4년간 유대 광야를 도망칠 때도 지켜주셨는데, 지금 형편없는 길을 선택하여 어려움에 빠질 뻔한 저를 건져내주셨네요.
그런 마음으로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리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주님의 음성을 좇아야 하는데, 때로 내 판단이 앞서서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는 것 말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빛 가운데서 건져주시는 아바 아버지이신 줄 믿습니다.
(나예) 지난 수요일날 아침 일찍 문자가 왔습니다.
카카오뱅크라고 하면서 서민을 위한 저금리 대출을 시행하는데 귀하가 그 당사자라고 말이죠.
그래서 전화를 걸어 1천만원 신청한다고 남겼죠.
수요예배 설교를 거의 다 쓸 무렵에, 그곳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때 대출 이자가 몇 프로나 되는지 제가 물었을 때 2.5%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순간 제 뇌가 빨리빨리 돌아갔습니다.
서울서 개척할 때 2%로 빌린 대출과 목포에서 5%로 빌린 대출을 합친 것보다 훨씬 싸다는 것 말이죠.
천만원을 2.5%로 빌리면 원금 이자 합해도 10만원도 안 될 것 같아, 곧바로 신청을 한다고 했죠.
그때 대출자격을 알아본다면서 신분증을 카카오톡에 올려달라고 해서 그대로 했습니다.
그 후엔 가까운 은행에 가서 체크카드를 발급받도록 해서 또 그렇게 했죠.
체크가드의 ATM 인출 한도를 600만원으로, 이체 한도를 3천만원으로 조정토록 해서 그렇게 했죠.
그렇게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 이후에는 자신들의 주소로 체크카드를 보내달라고 하는 거였죠.
그런데 그때 이상한 마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왜 하필 체크카드를 보내 달라고 하는 걸까, 하고 말이죠.
그래서 카카오뱅크 본사에 전화를 걸어 다시금 확인을 해 봤더니, 그것이 보이스피싱 수법임을 알려줬습니다.
그을 겪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카카오뱅크 본사에 전화를 걸어 확인토록 해보고 싶은 그 마음이, 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었다는 것 말이죠.
(깨달음) 혹시라도 제 이 이야기를 듣는 동안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어요?
“목사님도 참. 아니 보이스피싱 이야기를 하셨으면서도, 그것도 모르고 당할 뻔 했어요? 미련하시기는.”
그런데 제가 서울서 부목사로 섬길 때 담임목사님이 3천만원을 보이스피싱으로 송금한 일을 당했을 때, 그때 저도 그렇게 속으로 말했었죠.
“목사님도 참. 아니 그게 보이스피싱인지 모르셨어요. 저한테 한 번 물어나 보시지. 미련하시기는.”
그때는 제가 그랬는데, 제가 당할 뻔하고 나니까, 마음이 벌렁벌렁했는데, 그 목사님은 몇 날 동안 잠도 못 주무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일을 겪고 나서 깨달은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
(적용) 다윗도 자기 명철 자기 판단을 좇아 블레셋의 시글락에 들어갔다가 화를 당할 뻔한 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다윗을 건져 주셨습니다.
저도 딱 그런 모습이었으니, 얼마나 부끄럽고 또 감사한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듯 자기 명철 자기 판단을 좇아 어리석은 길에 빠져드는 자들을 당신의 빛으로 건져올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죠.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우리가 4주에 걸쳐 로마서 12장 말씀을 살펴봤었죠.
로마서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고린도에 잠시 들렀을 때 써 보낸 편지였죠.
그렇다면 고린도에 들리기 전에 바울이 머문 그 에베소라는 도시는 어떤 도시였을까요?
에베소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수리아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제국의 4대 도시 중의 하나였죠.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로서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인구만 해도 현재의 목포시 인구 20만보다 조금 더 넘는 25만 명으로 추산되죠.
그만큼 시리아와 인도와 이집트 등지에서 몰려온 상인들이 넘쳐났습니다.
그 때문에 각종 식료품과 보석과 노예를 사고파는 동양 최대의 무역시장이 그곳에 들어서 있었죠.
에베소가 더 유명한 것은 24개의 유방이 달린 여신상 곧 아르테미스 신상이 세워져 있던 까닭이죠.
그 여신상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무려 4배나 큰 신상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온 무역상들은 그 아르테미스 신상 곧 아데미 신상 앞에 엎드려 자신들의 소원을 빌었죠.
그러니 에베소의 구리세공업자들은 금과 은으로 부적용 여신상을 만들어 그들에게 팔면서 돈을 벌어들였죠.
바울은 그런 에베소 도시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들어가 복음을 전했던 것이죠.
3개월은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고, 2년 넘는 기간은 ‘티란노스의 스콜레’ 곧 두란노 서원을 빌려 낮잠자는 시간에 복음을 전하고 가르친 것이었죠.
그때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접하고 세 번에 걸친 방문과 네 번에 걸친 편지를 써 보내기도 했죠.
그 무렵에 바울이 천막 만들 때 쓰던 ‘천조각’과 앞치마 격의 ‘보자기’를 통해 병든 자에게 엊을 때 고침받고 귀신이 떠나가는 역사가(행19:11) 일어났죠.
그곳의 무당과 마술사들은 바울의 흉내를 냈지만 도리어 귀신들에게 제압당하고 말았죠.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많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죠.
그런데 에베소의 구리세공업자 ‘데메드리오’는 바울이 그런 일을 펼치자 자기 돈줄이 끊길 걸 생각해서 여러 동업자를 선동했습니다.
더욱이 수많은 시민들을 데리고 연극장으로 몰려갔죠.
그때 그들은 바울과 함께 하던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연극장으로 끌고 갔죠.
그때 바울이 그들에게 나아가 말리고자 했지만 더 큰 화를 당할 수 있다며 동역자들이 말렸죠.
그러자 그 연극장에 이유도 없이 군중심리에 이끌려 들어간 수많은 무리들은 2시간 가량 소리질렀죠.
“위대한 에베소 여신 아데미여!” “아데미여!”하면서 맹목적으로 열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다행히 그곳의 서기장이 무장한 군인들을 동원해서 그들의 시위와 선동을 정리하고 해산시켰죠.
그일 그치자 바울은 배를 타고 마게도냐로 건너가 빌립보에서 고린도로 내려가 3개월간 머물면서 로마서를 써 보낸 것이었죠.
그 후 A.D.57년 바울은 배를 타고 여러 곳을 거쳐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돌아와 예루살렘교회에 올라가 보고를 했죠.
그런데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에 의해 바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붙잡혔습니다.
그때 가이사랴에 2년 구금되었다가 신임 베스도 총독이 부임할 때 로마의 5대 황제 네로의 법정에 상소하죠.
그때 바울은 배를 타고 로마로 이송됐는데 나이 60이 된 바울은 로마 셋집에서 2년간 가택연금에 처했죠.
바울은 그곳에서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가 하면, 옥중서신으로 불리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써 보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는 그런 배경 속에서 써 보낸 편지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무슨 목적으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써 보냈겠습니까?
고린도전후서는 음행 파벌 은사 제사 등 여러 문제와 바울의 사도직을 헐뜯는 거짓 사도들이 있어서 그걸 해결코자 써 보냈습니다.
갈라디아서도 유대율법주의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회를 혼란케 했고 바울의 사도직을 부정하는 이들이 있어서 그 문제를 해결코자 써 보낸 편지였죠.
하지만 에베소서는 어떤 문제를 해결코자 쓴 게 아니었습니다.
오직 에베소교회 성도들과 소아시아에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을 격려하고 권면코자 써 보낸 편지죠.
이른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보편적인 교회(universal church)를 이루도록 권면코자 써 보냈죠.
에베소교회는 물론 소아시아 7개교회 모두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주님 안에서 한 몸을 이루도록 말입니다.
또 하나의 목적은 에베소교회와 소아시아 7개교회 성도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룬 존재임을 기억하라는 권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것은 특별한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엡1:5, 엡1:11) 가운데 있는 은혜라고 말이죠.
그러니 누구든지 자기 구원을 자랑치 말고 주님의 은혜안에 성전이 되라고(엡2:22) 한 것입니다.
그러니 썩어질 옛 구습을 좇지 말고 의와 진리의 새 사람을 입고 살라고(엡4:24) 권면한 거죠.
그것은 이 세상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악한 영들과 승리할 때 가능하다고 한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점들을 일깨우고자 바울이 ‘쇠사슬에 갇힌 사신이 된 심정’(엡6:20)으로 이 편지를 써서 두기고 (Tychicus) 편으로(엡6:21) 보낸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전반부 곧 1-3장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기록해 나갔죠.
하나님께서 각 개인과 교회 공동체를 섭리 가운데 예정 가운데 부르셔서 주님의 몸을 이루게 하신 것이라고 말이죠.
그만큼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된 이들이 성령 안에서 모두 강건하도록 기도한다고 써 보냈습니다.
에베소의 후반부 곧 4-6장까지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의 합당한 삶에 관한 권면입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을 중심으로 택함 받은 자들이 한 몸으로 하나가 되어 서로 섬겨야 한다고 말이죠.
그것은 주님께서 부여하신 달란트와 재능으로 서로 봉사하고 섬길 때 영적으로 성장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오늘 읽은 5장 말씀도 에베소서의 후반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들의 합당한 삶에 관한 내용입니다.
죄와 사망과 심판 가운데 있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생명의 빛을 비춰주셔 구원해주셨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때부터는 구원의 단계에 머물러 있지 말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가라는 뜻이죠.
바울은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나가는 자를 ‘새 사람’이라고 칭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옛 구습에 빠져 세상과 자기 탐욕에 빠져 사는 이들을 어둠 속에 있는 ‘옛 사람’이라고 칭하죠.
음행하는 자, 행실이 더러운 자, 탐욕에 빠져 사는 자, 그들 모두 우상 숭배자요 ‘옛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5장 전반부에 말씀하고 있죠.
바울은 그런 자들과 짝하지 말라고 권면을 합니다.
그들이 바로 에베소 도시의 아데미 여신을 숭배하는 자로서, 여전히 어둠과 짝하며 사는 자들이기 때문이죠.
그것을 오늘 본문 8-14절을 통해 권면해 주는데,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깨달음) 무슨 말씀입니까?
에베소교회 성도들도 주님의 복음을 영접하기 전에는 모두 아데미 여신을 좇아 숭배하던 어둠의 자녀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주님의 섭리 속에 택함을 받아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빛의 자녀가 됐다는 것이죠.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빛의 열매를 맺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주님 보시기에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좇아 살라는 것이죠.
매사에 주님께 묻고, 주님의 뜻을 구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빛 되신 주님의 말씀보다 자기 명철과 자기 판단에 이끌려 자기 욕심을 좇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죠.
바로 그런 자들이 있다면 주님의 빛 안에서 영적으로 깨어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원성) 이 말씀은 실은 구약성경의 이사야 60장 1절을 말씀을 인용해서 권면한 말씀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자기 명철과 탐욕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져 살 때, 바벨론에 멸망당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자녀들을 버린 게 아니라 그들을 징계 가운데 회개하도록 하셨고, 70년 만에 포로생활 속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바로 그런 포로상태, 절망의 상태에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빛을 발하셔서 일어나게 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깨달음) 그것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았어도 내 명철과 세상 판단만을 따를 때 어려움에 빠질 수 있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때도 내 명철과 세상 판단만을 좇는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시고자 빛 가운데서 건져올려주시는 분이란 사실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죠?
(은혜)주님은 내 명철을 의지하고 세상 판단만을 좇아 넘어지는 그때도 진리의 빛으로 건져 올려주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음성) 주님께서 오늘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도 너의 명철을 의지하고 세상 판단만을 의지하다가 넘어지려고 한 때가 있지 않느냐?”
“그때 주님께서 너에게 진리의 빛을 비춰 너를 건져 올려준 적이 있지 않더냐?”
“다윗이 광야를 도망치면서도 하나님과 교제했는데, 자기 판단에 이끌려 어려움에 처한 적이 있지 않더냐?”
“너도 네 생각 내 판단에 치우쳐 어려움을 겪을 뻔한 일이 있지 않느냐?”
“그러나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그런 상황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너를 빛 가운데 건져 올려주신 아바 아버지이시지 않더냐?”
“에베소교회 성도들도 전에는 아데미 여신이라는 우상숭배자로서 어둠에 빠져 살지 않았더냐?”
“그들이 아데미 신전에 엎드려 경배하지만 그것은 귀신과 짝하며 살던 모습이지 않더냐?”
“주님께서 그들에게 생명의 빛으로 건져내주셨고, 이제는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지 않겠느냐?”
“그런데도 자기 명철만 믿고 세상의 자기 지식만 좇는 자들이 있다면 얼마나 주님께서 탄식하겠느냐?”
“너도 이제는 너의 명철이나 세상 지식보다 오직 주님의 빛안에 거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구나.”
“그분은 이 세상에 빛보다 더 밝은 진리와 생명의 빛이요, 지금도 그 빛으로 너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찬양) 빛이 없어도 환하게 다가오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음성이 없어도 똑똑히 들려주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당신이 있음으로 나도 있고 당신의 노래가 머물므로 나는 부를 수 있어요
주여 꽃처럼 향기 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당신이 좋을 수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성화) 주님께서 생명의 빛으로 건져올려주신 자들은 세상 어둠의 영과 짝하며 사는 이들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금 옛 사람으로 회귀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그것은 성령이 거하는 성전으로서의 몸이 귀신을 섬기는 자와 함께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즘 새벽에 살펴보고 있는 여호사밧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사밧 왕은 남왕국 유다의 네 번째 왕이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자마자 그의 아버지 아사가 걸어갔던 ‘처음 길’ 곧 종교개혁을 계속 단행했습니다.
남왕국 유다에 남아 있던 바알과 아세라 신상들을 철저히 부숴트리도록 했죠.
더욱 위대한 일을 했던 것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성읍에 보내 백성들에게 율법교육을 시키도록 한 것이었죠.
이른바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하며 살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시대의 평안함은 물론이고 이방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게 했죠.
엄청난 군사력을 보유하며 막강한 나라가 되게 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태평성대를 누리는 5년째 접어들 때 그가 행한 어리석은 모습이 있었죠.
북이스라엘의 7번째 왕인 아합의 가문과 정략적인 결혼을 한 것, 아합 왕과 연합해 아람 나라를 치러 간 게 그것이었습니다.
그때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시돈 지역의 엣 바알의 딸 이세벨과 혼인을 한 왕이었습니다.
이세벨은 결혼을 해서 왕비로 들어왔지만 홀로 온 게 아니라 수많은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함께 가져왔죠.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상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을 벌인 일이 있는데, 바로 그들을 아합과 이세벨이 먹이고 입혔던 자들이죠.
그만큼 아합은 귀신을 숭배하고 받드는 자들을 먹이고 입힌 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아합과 가문을 맺고자 정략적인 결혼을 하도록 한 여호사밧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더욱이 그 아합과 연합하여 아람나라를 치러갈 때도 전혀 하나님께 묻거나 뜻을 구하지 않았죠.
오직 자기 시대의 태평성대만 믿고 기고만장한 자기 과시와 허세에 빠져 버린 그였습니다.
그때 연합전투에 참전하여 아람 나라를 칠 것 같았지만 오히려 패했고, 그 전쟁에서 아합 왕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여호사밧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죽음의 위기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건져내주셨죠.
(깨달음)그때 여호사밧이 어떤 깨달음을 얻었겠습니까?
“내가 기고만장해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내 명철과 내 판단만을 좇을 때 이런 화를 당할 뻔했구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죽음의 수렁에서 나를 빛 가운데 건져 올려주셨구나.”
바로 그런 구원의 빛, 생명의 빛을, 비춰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던 것이죠.
바로 그 사건을 겪은 뒤에 그는 예루살렘에 돌아오자마자 성전에 나가 감사제를 드렸고, 그 이후에 더욱더 빛되신 주님께 자기 인생을 의탁하는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음성) 그러니 오늘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나도 내 명철과 세상 판단을 좇아 살 때가 더 많아요”
“나도 여호사밧처럼 힘들고 어려울 때는 주님을 의지하다가도 일이 잘 풀리면 내 명철과 내 판단만을 좇을 때가 많아요.”
“주님, 의로움과 불의가, 하나님과 우상이 함께 할 수 없는데도, 여호사밧이 그렇게 빠져들어갔어요.”
“주님, 저도 그런 자들과 결탁하지 않도록 저를 붙잡아 주시고, 행여 그 속에 빠져들 때 주님의 빛으로 건져올려주셔서, 제가 부끄러움을 깨닫게 해 주세요.”
“에베소교회 성도들, 소아시아7교회 성도들을 빛 가운데 이끄시고자 에베소서를 써서 보낸 바울의 심정을 제가 느끼며 살게 해 주세요.”
(찬양) 주여 우린 연약합니다 우린 오늘을 힘겨워합니다
주 뜻 이루며 살기엔 부족합니다 우린 우린 연약합니다
주여 우린 넘어집니다 오늘 하루 또 실수합니다
주의 긍휼을 구하는 죄인입니다 우린 주만 바라봅니다
한없는 주님의 은혜 온 세상 위에 넘칩니다
가릴 수 없는 주 영광 온 땅위에 충만합니다
주님만이 길이오니 우린 그길 따라갑니다
그날에 우릴 이루실 주는 완전합니다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죄와 사망의 어둠에 있던 우리를 당신의 생명과 진리의 빛으로 건져내주셨습니다.
값없이 구원을 베푸신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빛 가운데 살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때로 자기 명철과 세상의 자기 판단을 좇아 어려움에 빠져들 때도 당신의 택한 자녀를 빛 가운데 건져 올려주시는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그때 당신의 자녀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깨닫게 하셔서, 더욱더 주님 앞에 겸비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그것이 그 인생길이 타락하지 않도록, 오히려 겸손하게 빚으시는 더 큰 주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그와 같은 크신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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