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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SundaySermon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엡5:14-16)

by 똑똑이채널 2021.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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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논지) 코로나 19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드러난 바 있습니다.

그 중에는 학교 학생들의 등교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발생한 문제점도 있죠.

 

무엇일까요?

3 수험생의 경우 학교에서 수업을 하지 않으니까 학력 중간층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자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학생들은 성적을 유지하지만,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학력이 무너지는 것이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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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어떤까요?

그런 모습은 신앙인들의 모습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코로나19로 인해 신앙의 중간층이 없어지는 모습 말입니다.

 

코로나19 초기만 해도 우리나라 성도들은 열심을 내서 예배당에 나와 예배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부터 영상예배에 익숙해지고, 이제는 그게 편하다고 생각한 채 신앙이 나태해진 경우가 다반사죠.

그로 인해 신앙의 격차가 생길 수밖에 없는 지경입니다.

 

(적용) 그런데 이런 모습은 그리스도인에게 모의고사를 보는 것과 같은 격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앞으로도 난리와 난리가 일어나고 재난과 도처에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재림의 징조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데 그런 난리와 재난 앞에 누가 깨어 있는 자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코로나19 앞에 깨어 있는 자들이 종말의 시대에 재림의 시대에 깨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 앞에 신앙이 후퇴하고 세상 흐름만 좇는 신앙인은 종말과 재림 앞에도 여전히 후퇴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라면 주님께서는 그렇게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18:8)하시면서 말이죠.

 

(적용)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코로나19의 영적 모의고사 앞에서 그래도 여러분들은 합격한 신앙인의 모습 아닙니까?

이런 신앙 자세라면 어떤 종말과 재림이 닥쳐와도 주님 앞에 더욱더 깨어 있는 신앙인으로 나아갈 줄 믿습니다.

 

왜 그런 영적인 흐름의 차이를 낳는 것입니까?

코로나19의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섭리하고 주관하시는 분임을 믿기 때문이죠.

그것이 바로 참된 신앙인의 믿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지 못한 자들은 눈에 보이는 당장의 것만 보고 신앙이 후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참된 신앙인이 아니라 그저 종교인에 가까울 뿐입니다.

로마의 황제가 기독교를 핍박할 때, 다들 카타콤 지하 무덤에서 숨죽이며 예배하며 더욱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로마 황제가 지배하는 그 세상 너머에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계심을 믿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눈에 보이는 황제의 세상만 보는 자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놓친 채 세상 흐름만을 좇아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여전히 통치하시고 섭리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를 위해 주님의 제단 앞에 더욱 신실하게 나아오시는 줄 믿습니다.

 

(성화) 이사야 선지가 활약하던 시대, 요즘 새벽에 묵상하고 있는 웃사야 왕의 시대가 바로 그와 같았습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인 B.C. 739년 부름을 받아, 히스기야 왕의 아들 므낫세 통치 중간인 680년에 순교한 선지자죠.

 

이사야 선지자가 부름받던 그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은 말 그대로 암담하고 참담한 지경이었습니다.

그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은 말할 것도 없고 남왕국 유다마저 풍요와 번영의 신을 좇아 온갖 죄악이 난무했죠.

그때 웃시야라는 왕이 새롭게 등극하면서 하나님 중심으로 말씀 중심으로 개혁을 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의 통치 52년 동안 그 어느 때보다 부국강병한 나라를 이루게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의 통치 말년에 그는 기고만장한 교만의 늪에 빠져들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장이 분향할 향을 빼앗아 그가 직접 분향하려는 영적 교만과 추태를 보여준 것이었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즉석에서 그를 심판하셨는데 그는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자신의 왕권이 더 강하다는 것을 입증하려다가 육신의 철퇴를 맞은 것이었죠.

 

그러자 그는 자기 왕권을 아들 요담에게 물려줬고, 뒤로 물러나 있는데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죠.

그러니 블레셋과 에돔까지 다 장악하고 이집트까지 맞설 국력이었는데, 한순간에 초상집으로 내려앉은 꼴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당시 신흥 강대국인 앗수르 제국이 남왕국 유다의 위쪽 북이스라엘을 점령하였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 지역으로 끌고 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남왕국 유다 백성들의 모습은 어떻겠습니까?

그야말로 온 천지가 암흑과 같은 상황, 소망을 잃어버린 상황 아니었겠습니까?

나라의 국력도 급격히 쇠퇴했고, 북 이스라엘의 위쪽 앗수르 제국이 남쪽으로 위협해 올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죠.

 

바로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부르신 것이었겠습니까?

이사야야, 유다 백성들이 눈에 보이는 국력이 기울어졌다고, 눈에 보이는 앗수르 제국이 쳐들어온다고 다들 벌벌 떨고 있다.”

이사야야, 너도 나 여호와가 죽은 줄 생각하고 있느냐?”

이사야야, 나는 이 세상의 통치자로서 시퍼렇게 살아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지 않더냐?”

바로 그 사실을 유다 백성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함이셨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때 이사야 선지자를 불러서 보여주신 환상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선지자에게 보여주신 것은 성전의 환상이었습니다.

성전에 있는 수많은 스랍들 곧 천사들이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었죠.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까?

이사야야. 정신 차려라.”

왜 너까지 비실거리는 거냐? 이 세상이 끝났냐? 네 하나님이 죽었느냐?”

네 나라의 왕이 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냐?”

저 강대국 앗수르가 세상을 통치한다고 생각하느냐?”

그게 아니지 않느냐?”

그 모든 것 위에 있는 나 여호와, 보좌자 앉아 있는 나 여호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고 통치하지 않더냐?”

제발 너라도 눈을 떠서 온 유다 백성들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줘야 하지 않겠느냐?”

 

바로 그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전의 환상과 성전 위에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신 것이죠.

 

(적용) 지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좌충우돌하면서, 세상의 흐름만을 좇아가려고 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크리스천 신앙인들조차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어떤 크리스천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모두가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죽은 듯 살아가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며 살아 있는 신앙인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산 자처럼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고 사는 자는 죽은 자입니다.

하지만 카타콤 무덤이 죽은 듯 보이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의지하는 자들은 진정으로 산 자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 들어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천막을 만들면서 복음을 전했죠.

그때 에베소는 인구 25만이 살고 있었고, 항구도시로서 세계 곳곳의 무역상들이 드나들던 도시였죠.

더욱이 그곳 에베소에는 24개의 유방이 달린 여신상 곧 아르테미스 신상이 우뚝 세워져 있는 곳이었습니다.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여신상, 그 아데미 여신상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나 더 크죠.

이집트와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와 인도에서 오는 무역상들은 그 아데미 신전에서 빌고 또 빌며 사업번창을 위해 기도했죠.

그것을 바라본 에베소의 구리세공업자들은 그 무역상들로부터 돈을 벌기 위해 부적용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바로 그런 에베소 도시에 바울과 동역자들이 들어가 3년 넘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곳에서 놀라운 일도 일어 났었죠.

바울이 천막 만들 때 사용하던 앞치마 격의 보자기와 땀을 닦을 때 사용하던 천조각으로 귀신 들린 자와 병든 자에게 얹으 을 귀신이 떠나가고 병이 고침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일로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일이 일어났고,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났죠.

 

하지만 바울의 그 모습을 바라보는 데메드리오라는 구리세공업자들은 바울이 계속 그렇게 했다가는 자신들의 수입이 끊어질 것을 염려했습니다.

바울이 오기 전까지 여태껏 구리로 된 작은 아데미 조각신상을 만들어 팔면서 돈을 거둬들였는데, 더 이상 그게 팔리지 않을 것을 내다봤기 때문이죠

그때 그는 같은 동종업자들과 또 시민들과 함께 바울을 따라다닌 두 사람을 데리고 연극장에 달려가서 2시간 동안 아데미여하며 찬양하고 떠들며 시위를 했죠.

 

그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 연극장의 서기장이 무장한 군인을 동원해 그 군중의 시위를 해체시켰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더이상 자신이 그곳에 있을 수 없어서 배를 타고 고린도에 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그 에베소에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까지 와서 바울을 체포했고, 결국 바울은 억울한 누명을 쓴 채 로마의 가택연금 상태로 갇히게 되었습니다.

비록 바울이 자기 돈으로 셋집을 얻으면서 네로 황제의 판결을 기다려야 했지만, 그 집을 벗어날 수 없는 감옥과도 같은 신세였죠.

 

바로 그곳에서 바울은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함과 동시에 오늘 본문의 에베소서를 비롯해,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등 4개의 편지를 써 보낸 것이었죠.

 

그때 바울이 어떤 목적으로 에베소서를 써 보냈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까?

에베소서의 전반부 곧 1-3장까지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써 나갔다고 했습니다.

에베소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의 어둠 가운데서 빛으로 불러낸 자들이라고 말이죠.

그것은 그들의 능력이자 열심히나 자랑거리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부르신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주님의 그 구원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몸된 지체로서 서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당부했죠.

 

에베소의 후반부 곧 4-6장까지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의 합당한 삶에 관한 권면을 써 보냈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을 중심으로 택함받은 자들이 한 몸으로 하나가 되어 서로 섬겨야 한다고 말이죠.

그것은 주님께서 부여하신 달란트와 재능으로 서로 봉사하고 섬길 때 영적으로 성장케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중에 5장 말씀은 너희는 주 안에서 빛이라너희들은 빛의 자녀라는 뜻으로 써 보낸 권면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세상에 속한 옛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주님 안에서 새 사람빛의 자녀라는 것이죠.

너희가 예전에는 에베소의 아데미 신을 좇고 로마의 황제를 추종하듯, 눈에 보이는 세상 흐름만을 좇는 자들었지만, 이제는 다르다는 것이죠.

이제는 주님 안에서 진정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그러니 이제부터는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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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그것을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봤고, 오늘 본문 14절 말씀을 통해 바울이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깨달음) 무슨 말씀입니까?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 가운데 잠자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상태에서 여러분들은 일어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여전히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빛을 비춰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왜 바울이 이런 권면을 에베소교회에, 또 이 내용을 함께 읽을 소아시아 7교회 성도들에게 써 보낸 것입니까?

주님의 택하심 가운데 구원의 빛 안에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 신과 황제의 흐름만을 쫓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죠.

주님의 빛의 세계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을 주도하는 풍요와 번영의 신을 좇고, 황제의 권력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는 자들은 살아도 실은 죽은 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는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여러분은 그런 자들과 달리 이 세상의 통치자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라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들이 비록 죽은 자 같으나 진정으로 살아 있는 자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웃시야 왕이 죽어 나라가 폭망한 것 같고, 앗수르 제국이 침략한다는 소리 앞에 다들 주눅들어 있는 모습과 같은 것이죠.

코로나19의 상황 앞에 다들 주눅들어 이 세상의 통제 앞에 영적으로 무기력한 모습이 실은 그런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성전 제단의 환상, 그 보좌 위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여주시면서, 진정한 통치자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것처럼 지금 바울의 이 편지를 통해 에베소의 아데미 신이나 로마 황제의 권력이 전부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진정한 통치자임을 믿고, 영적으로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죠?

(은혜) 주님은 코로나19, 앞으로 닥칠 재난과 종말과 재림 앞이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로 살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시는 분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으로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도 이 세상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것 전부라고 생각하느냐?”

세상 많은 이들이 코로나19에 좌지우지되고 세상 권력과 눈에 보이는 탐욕의 신을 좇아 사는데, 너는 어떻느냐?”

심지어 하나님을 주인으로 믿는다는 크리스천들 가운데도 어둠에 사로잡혀 죽은 자로 지내는 자들이 있는데, 너는 어떻느냐?”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이 세상 사람들과 달리 여호와 하나님을 진정으로 전능하신 온 우주의 통치권자로 믿고 있느냐?”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눈이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모두 통치하시고 섭리하신 줄 믿고 있느냐?”

그렇다면 너도 코로나19, 앞으로 닥칠 재난과 종말앞이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제단 앞에 나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왕이 죽은 걸 침울해하고 이방 권력 앞에 주눅 든 유다 백성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시퍼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줬듯이, 오늘 너에게도 그런 은혜를 보여주길 원한다.”

에베소 시민들은 물론이고 성도들조차 탐욕의 신과 세상 권력 앞에 죽은 자로 사는데, 오늘 너도 영적으로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로 살수 있도록, 바울의 이 편지를 너에게 보낸 것 아니겠느냐?”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는 걸 잊지 말고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오길 원하노라.”

 

(찬양) 주께 가까이 날 이끄소서 간절히 주님만을 원합니다

채워 주소서 주의 사랑을 진정한 찬양 드릴 수 있도록

주께 가까니 말 이끄소서 간절히 주님만을 원합니다

채워주소서 주의 사랑을 진정한 찬양 드릴 수있도록

목마른 나의 영혼 주를 부르니 나의 맘 만져 주소서

주님만을 원합니다 더 원합니다 나의 맘 만져 주소서

 

(예화) 전남기독신문 915일자에 실린 예화입니다.

북유럽 어느 시골 성당에 사람 크기만한 예수님의 동상이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 동상 앞에서 기도를 하면 소원이 잘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났죠.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나아와서 소원을 빌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문지기가 예수님이 서 있는 곳에 한 번 서 있어 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소원을 말하며 여러 날을 기도했죠.

그러던 어느 날 진짜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래 네가 하도 소원을 말하니 딱 하루만 너와 자리를 바꾸겠다.

그런데 나와 한 가지 약속을 해야 한다.

너는 누가 와서 어떤 행동이나 기도를 하던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로 말하지 말아라. 알겠느냐?”

문지기는 절대 침묵하겠다고 굳건히 약속을 했죠.

 

그러던 어느날 문지기는 예수님의 동상이 되었고 예수님은 문지기가 되었습니다.

문지기가 예수님의 동상이 되어 서 있을 때 첫 번째 사람이 왔습니다.

그는 아주 부자였고 도박을 즐기는 자였죠.

자기가 도바을 하러 가는데 돈을 잃지 않고 많이 딸 수 있도록 소원을 빌었습니다.

그런데 돈다발이 들어 있는 가방을 깜박하고 놓고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문지기는 가방을 놓고 갔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의 약속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죠.

 

조금 지나자 가난한 농부가 두 번째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가 중병으로 누워 있는데 치료비가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도와 달라고 하면서 빌었습니다.

그 농부가 기도를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돈 가방이 보였습니다.

그 농부는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을 했죠.

감사 기도를 한 후에 돈 가방을 들고 나갔습니다.

문지기는 그 돈 가방은 주인이 있다고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의 약속 때문에 침묵했죠.

 

세 번째 기도하러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러 온 것이었죠.

청년이 기도를 막 시작하는데 갑자기 예배당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성난 표정을 하며 들어왔습니다.

그는 돈 가방을 놓고 간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돈 가방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그 청년의 멱살을 잡고 돈 가방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었습니다.

청년은 무슨 행패냐고 전후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이미 분이 날 때로 나 있는 상태라 그 청년을 이끌고 경찰서로 가자고 다그쳤죠.

청년은 지금 가지 않으면 배를 탈 수가 없다고 하면서 경찰서로 가는 걸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옥신각신 다투는 것을 본 문지기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말을 해주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청년은 배를 타게 되었고, 부자는 돈 가방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때 노하신 음성으로 그에게 말씀하셨죠.

너는 나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니 내려 오너라.”

그러자 문지기가 말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죄송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화내실 정도로 잘못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잘못된 상황을 바로 잡아서 평화를 이루었을 뿐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너는 나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잘못이 된 것이다.

그리고 네가 개입해서 해결한 것보다 침묵했으면 더 좋은 결과가 있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부자의 그 돈은 어차피 도박장에서 다 날릴 돈이니라.

그 돈이 농부에게 갔더라면 농부는 자기 아내를 살릴 수 있었느니라.

더욱 잘못이 큰 것은 청년의 문제니라.

그 청년은 그냥 두었다면 배를 타지 못해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네가 개입하는 바람에 그 청년은 배를 타고 바다에서 침몰해 죽게 되었느니라.

내가 침묵으로 일하는 이유를 이제는 알겠느냐?”

 

(깨달음) 어떤가요?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시고, 때론 침묵 가운데 계시는 분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침묵가운데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실 때도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바라보시면서도 하늘 위에서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침묵하심으로 인해 온 인류에게 구원하는 길이 열어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는 그 문지기처럼 하나님의 침묵을 잘 못 견뎌하는 것은 아닙니까?

더욱이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이 세상의 흐름을 내 뜻대로 해보려고 하는 마음까지 품는 것은 아닙니까?

심지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나지 않을 때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신과 권력의 흐름을 좇는 모습까지 내비치지 않습니까?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 가운데서도 여전히 당신의 일을 섭리하시고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길을 열어가신다는 것 말입니다.

그러니 내 뜻대로 일이 관철되지 않아도, 침묵 가운데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더욱더 바라보며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음성) 그렇기에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실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 저는 너무나도 연약한 자예요.”

세상 사람들처럼 저도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고 하고 세상의 신과 권력의 힘에 휩쓸려 살려고 하는 연약함이 있어요

그 문지기처럼 제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싶고 내일의 앞날까지도 시원하고 알고 싶은 심정이예요.”

하지만 저보다 저를 더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천하 만사의 때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길 원해요.”

크리스천들조차 세상 풍조에 휩쓸려 영적으로 죽은 자로 살고 있는 이 때에, 세상 풍조를 이겨내며 주님께 더욱 나아가는 살아 있는 자로 살게 해 주세요.”

코로나19라는 영적 관문을 잘 통과하게 해 주셨사오니, 앞으로 닥칠 재난과 난리와 종말의 환란 속에서도 이사야처럼, 바울처럼, 주님의 제단을 바라보며 더욱더 믿음으로 나아가게 해 주세요.”

지금 당장에 내 눈 앞에 일어나는 결과를 바라지만, 주님은 그 보다 더 선한 길을 열어가고 계심을 믿음으로 눈으로 보게 해 주세요.”

 

(찬양) 세상 일에 실패 했어도 너는 절망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다시 일어서게 하리라

질병으로 고통 당해도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다시 일어서게 하리라

나를 버린 자들도 내가 사랑 하거늘 하물며 너희를 그냥 둘까 보냐

나는 너와 함께하는 너의 하나님 됨이니 의로운 오른 손으로 붙들리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너를 크게 사용 하리라

너로 하여금 나를 증거 하도록 내가 너를 도우리라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 역사하시는 온 우주의 통치권자이십니다.

코로나19가 온 세상을 주도하는 세상 같지만 실은 이 일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코로나19든지, 앞으로 닥칠 환란과 재난과 종말 앞에서도 오직 신실한 믿음으로 주님께 나가는 영적으로 살아 있는 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으로 주님께 간구한다 할지라도, 지금 당장 자신이 원하는 일이 눈앞에 펼쳐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천하 범사의 모든 때를 주관하시는 주님께서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셔서 더욱 선한 길을 섭리하고 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왜 그때는 그렇게 당장 응답해주지 않으실까 괴롭기도 했지만, 나중에 주님의 선하신 뜻 앞에 도리어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코로나19의 상황속에서도, 모두가 눈 앞의 현실만을 바라보며 사는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영적으로 살아 있는 자로 사는 은총의 주인공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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