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성화) 태풍이 이쪽으로 올 것 같더니만 남해 먼 바다 쪽으로 가서 참 감사했습니다.
올해는 그런 태풍, 그런 광풍이 심하지 않는 것 같아, 더욱더 감사하고요.
그런데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각자가 인생 풍랑을 맞이할 수 있죠.
그 원인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것처럼 일상적인 풍랑(막4:37)이 우리에게 밀려들 수 있습니다.
또한 요나처럼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길을 갈 때 그 길에서 돌이키도록 인생 풍랑(욘1:4)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더욱이 바울처럼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고 순종할 때도 유라굴로와 같은 광풍(행27:14)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듯 여러 이유로 인해 인생 풍랑이 우리에게 밀려올 때,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가 어떤 것일까요?
세상의 환란과 풍랑이 몰아쳐 올 때 그때 가장 중요하게 점검해야 할 게 무엇이겠습니까?
그 풍랑이 몰아쳐올 때, 그때도 주님은 내 안에 계시는가, 하는 것이죠.
그것은 일상적인 풍랑이나 요나의 불순종의 상황에서나 바울처럼 사명을 감당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중에서 마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저녁 무렵 제자들에게 갈릴리 건너편 거라사인 지방으로 가자고 말씀하죠.
갈릴리 호수는 폭이 16km, 길이가 24km나 되는 큰 호수입니다.
그래서 그 큰 호수를 일컬어 ‘갈릴리 바다’라고 부르는 것이죠.
평상시엔 그 호수가 평온하지만 북쪽 헬몬산 기슭의 찬바람과 남쪽 요르단의 뜨거운 바람이 만나면 광풍이 일어나게 되죠.
제자들이 몰고 가는 그 한 밤 중에 갑자기 광풍이 몰아친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 배의 고물 곧 배 뒤편에서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죠.
그 날 하루 종일 병든 자를 고치고 천국 비유를 가르치면서 머리둘 곳 없었던 주님은 그야말로 녹초가 된 상태였죠.
그러나 제자들이 광풍에 죽게 생겼다면서, 주님을 흔들어 깨우며, 어떻게 좀 해 보라고 하는 것이었죠.
그때 예수님께서 일어나면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바람과 풍랑을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하고 말씀하셨고, 이내 광풍이 잠잠해졌죠.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 믿음이 없느냐?”하고 말입니다.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까?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내 인생에도 얼마든지 광풍이 불어올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정작 그때 우리가 감지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 일깨워주시는 것이죠.
인생의 풍랑, 인생 환란과 풍파가 몰아쳐올 때, 그때도 주님은 내 안에 계시는지,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는지 말이죠.
그만큼 내 실수로 만나는 인생 광풍이나, 하나님의 뜻과 엇긋난 길 속에서 만나는 인생 풍랑이나,
심지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만나는 광풍속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인생 광풍이든지 간에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심을 확인하고 주님의 뜻에 내 뜻을 맞출 때, 주님은 그 광풍까지도 잠잠케 해 주시는 분이시죠.
(예화) 세계에서 최고로 좋은 명마는 부계 혈통을 잇는 ‘아라비아 산’이라고 하죠.
오래전에 성지순례팀을 따라 영국에 간 적이 있는데, 어떤 사립학교에서 말타기 수업을 하는 걸 봤죠.
그런데 그런 영국의 좋은 말들도 실은 아라비아 산의 숫말과 교배해서 낳은 말들이라고 하죠.
당연히 아라비아 말들이 값비싸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오래 전에 말 훈련에 탁월한 사람이 나팔로 말 100마리를 훈련시킨 일이 있다고 합니다.
나팔을 길게 불면 달려가도록 하고, 또 나팔을 짧게 부르면 달려오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훈련을 시킨 것이었죠.
그런 다음에 그 말들을 우리에 넣고 꼴만 주고 일주일간 물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우릿간에서 5분만 달리면 갈릴리 호숫가보다 더 잔잔한 물이 흐르는 하천이 있다고 하죠.
그러니 어떻겠습니까?
목이 말라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말들이 물 냄새를 맡고 계속 그 하천 쪽만 바라보지 않겠습니까?
이제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그때 우릿간의 문을 열어주는데 말 100마리가 쏜살같이 물을 향해 달리더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때 말을 훈련시키던 그 주인이 돌아오라는 나팔을 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말들이 나팔 소리가 나든 말든 하천가로 달려가서 머리를 처박고 물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네 마리가 주인에게 돌아와 헐떡이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네 마리의 말을 따로 구별해 기른 것이 오늘의 명마 조상이 되었다고 하죠.
(깨달음) 그 이야기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바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세상 풍조는 나날이 갈리고 있는데 그 속에서도 주님을 향한 믿음을 순종하며 따를 수 있는가, 하는 거죠.
주님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 안에 거하고자 순종하는 자들에게 믿음의 명문 조상으로 세우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줄 믿습니다.
(적용)아브라함이 살 길을 좇아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하나님께서 헤브론으로 부를 때 기꺼이 순종하여 믿음의 조상이 됐죠.
요나도 자기 살길을 좇아 욥바에서 니느웨로 가고자 했지만 풍랑속에서 회개하며 순종할 때 위대한 선지자로 세움받았죠.
바울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다가 광풍을 만났지만 그 속에서도 사명을 감당할 때 믿음의 사도로 우뚝 세워주신 주님이죠.
그만큼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간에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예수님께서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을 중심으로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3년간 따로 정하여 머문 곳이 없이 동가숙서가식하면서 제자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어느 곳에 가든지 주님을 환영하는 곳이면 그곳에 평안을 빌며 묵으셨죠.
그러나 주님을 환영하지 않도 문전박대하는 곳이라면 먼지를 털어버리면서 그곳을 나와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면서 제자들도 그런 복음 전도자의 삶, 그런 여행자의 삶을 살도록 당부하셨습니다.
그 3년간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고, 그 3년간 성전을 청결케 하셨고, 그 3년간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3년의 마지막 기한이 다가올 무렵, 곧 십자가 죽음을 내다보면서, 목요일밤 제자강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본문에 나오는 모습 중 하나요, 마가의 다락방에 장소를 정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가지셨고, 이어서 주님의 제자라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면서, 말씀을 나누셨죠.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떠나가지만 너희들을 향한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고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죠.
그러니 내가 없더라도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떠나면 보혜사 성령을 보낼 것이고, 그 성령께서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 하셨죠.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우리가 3주째 읽은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참 포도나무이시고,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라고 말이죠.
왜 예수님이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의 아버지를 향해 농부라고 하셨는지, 지난 시간에 살펴봤습니다.
포도나무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애굽에 있던 그들을 가나안 땅에 옮겨 심은 그들이었죠.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양분을 공급받고 열매맺는 게 아니라 가나안의 타락한 문화에 동화되고 말았죠.
그런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여러 선지자를 보냈지만 듣지 않았죠.
그 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참포도나무를 가꿔주시고 돌아봐주시는 분이 농부되시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말씀한 것이죠.
(본문) 곧이어 주님께서는 본문 2-5절을 통해 주님의 가지로 붙어 있어야 할 제자들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같이 읽어보실까요?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원해) 이 말씀에서 계속 반복되는 단어, 주님께서 강조하시는 단어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내게 붙어 있어’, 내 안에‘, 내 안에’, ‘그가 내 안에’, ‘나를 떠나서는’, 바로 그런 단어들이죠.
다른 것 같지만 실은 하나의 단어같지 않습니까?
‘내 안에’, 곧 ‘주님 안에’ 거하는 포도나무 가지로 살아야 한다, 하는 것이죠.
여기에서 ‘내 안에’, ‘주님 안에’하는 헬라어 단어가 ‘엔 크리스도’(ἐν χριστου)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 2700번이나 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단어를 통해 무엇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까?
그리스도 ‘안에’(in) 자라는 포도나무 가지가 돼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스도와 ‘함께’(with)하는 포도나무 가지가 돼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스도에 ‘의해’(by) 자라고 열매 맺는 포도 가지가 돼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죠.
(깨달음) 왜죠?
그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었죠.
오직 ‘주님 안에’ 자라고 있는 포도나무 가지라야 주님의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포도나무 가지라야 풍랑이 몰아쳐 와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의해’ 자라는 가지라야 아라비아 명마처럼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이겠습니까?
(은혜) 주님은 우리를 주님안에 거하는 포도나무가지로 삼으셔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오늘 우리 각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네 인생에 풍랑과 폭풍이 몰아쳐올 때 네가 점검해야 할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인생의 광풍 앞에서도 네가 주님 안에 거하고 있는지, 주님이 네 안에 거하고 있는지, 그걸 살펴봐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세상의 풍성한 열매를 맺고 싶어할 때도 네가 무엇을 점검해야 하는지 알수 있지 않겠느냐?”
“너의 삶이 주님의 포도나무가지인지, 주님 안에서 영양분을 공급받고 있는지, 그걸 점검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 명마도 물이 먹고 싶어도 주인의 나팔 소리에 순종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오늘 네가 주님 안에 거하는 포도나무 가지인지, 주님과 함께 풍랑을 맞서는 가지인지, 주님에 의해 자라는 명마처럼 살아가고 있는 돌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제 아무리 월등하고 유명해도 주님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주님 앞에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세상에서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주님에 의해 자라가는 가지라야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지 않겠느냐?”
“비록 세상의 명마는 못된다 할지라도 오직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말을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겠느냐?
“오직 너는 주님이 네 안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게구나.”
(찬양) 하나님한번도 나를 실망시킨적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신실하신주 오신실하신주 내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예화)송병주 목사의 〈오후 5시에 온 사람〉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송병주 목사님은 55살의 자기 아버지를 색전술 항암치료 중에 천국으로 떠나보냈습니다.
그 뒤 향상교회 유학생으로 학비전액과 매달생활비까지 지원받는 약속과 함께 박사학위 귀국 후 신학대학교수 자리를 약속받았다.
꿈을 안고 미국에 들어가 정신없이 공부를 하는데, 어머니의 뇌종양 말기 판정 소식을 듣게 되었죠.
어머니는 대소변을 못 가리는 처지라 사위와 딸 보기도 부끄럽다고 전화를 했는데, 그는 전화기에 대고 울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박사과정 진학을 포기하고 어머니의 장례를 마쳤습니다.
이제 다시 공부하여 박사과정 지원을 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내아들의 유치원 원장님이 목사님께 면담을 요청하는 것이었죠.
“목사님. 아무래도 준영이가 자폐인 것 같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무슨 소리냐’며 화를 냈죠.
그런데 밤마다 두세 번씩 깨서 울기 시작하면 한 시간 반 동안 내리 우는 준영이 앞에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가득찰 수밖에 없었죠.
미국에 왔던 계획을 수정하고, 유학을 지원한 교회의 비전조차 이루지 못한 실패자라는 자격지심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시편 22편을 묵상하는데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다” 하는 다윗의 심정이 마음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성령님께서 그 목사님께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시편이 다윗의 노래이며, 너의 고통의 노래라고 생각하느냐?”
“이 시편이 인간의 고통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결코 아니다. 이 시편은 십자가에 달린 나의 수난의 시요 나의 고통의 노래다.”
“내 손과 발에 구멍이 났고 내 마음에도 큰 구멍이 났단다.”
“그래서 네 가슴에 난 그 큰 구멍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단다.”
그때서야 그 목사님에게 이런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주님, 제 고통을 잘 아시는군요. 주님은 제 절망을 너무나 잘 아시는군요.”
(깨달음) 내가 환란과 풍파를 겪을 때 주님은 내 상황과 고통을 전혀 모를 거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때도 내 안에 계서서, 나와 함께 고통을 겪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깨닫게 하셔서,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있다는, 확신을 불어넣지 않겠습니까?
(예화2) 무무 작가가 쓴 〈오늘 뺄셈〉에 나온 실화입니다.
미 항공우주국에서 1970년 4월 11일 세 번째 달 착륙을 목표로 우주선을 쏘아 올렸다고 하죠.
그런데 32만 1,860km까지 날아오른 아폴로 13호에 있는 두 개의 산소통 중 하나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나머지 산소통 하나도 폭발의 위험성에 놓이게 된 것이었죠.
그런데 그토록 위험하고 다급한 상황에 처한 그 우주선이 엿새 뒤에 극적으로 무사 생환했다고 하죠.
더 놀라운 건 그들이 위기가운에서도 무사히 귀환을 하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작동을 수동으로 조작해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무사생환한 우주인은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밝혔다고 합니다.
“우주선 기체는 이미 작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결단을 해야만 했지요.”
“그때 우리는 미항공우주국의 규정과 지시를 어기고, 우주선의 모든 불을 다 꺼 버렸습니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은 미항공우주국 규정상 철저하게 금지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이 꺼지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불을 끄는 순간 희미하게 보이던 지구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태평양 바다에서 비치는 형광빛 해초 군락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우주선 안이 깜깜할수록 어딘가 땅이요 어디가 바다인지, 어디가 안전한 착륙지인지까지 선명하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그들은 무사하게 전원이 귀환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우리 삶에 소원했던 빛이 희미하게 꺼져갈 때 우리도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지 않겠습니까?
내 주변을 밝혀주던 사람들의 기대와 도움의 불빛들이 꺼져갈 때, 그때 내 삶에 어둠이 찾아왔다고 낙담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바로 그때가 나를 살리는 불, 주님의 불빛이 내 안에 들어올 때임을 기억할 수 있기 바랍니다.
주님의 불빛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때,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새롭게 비춰주시기 때문입니다.
(적용)주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거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죠.
그런데 그날밤의 제자강화시간이 끝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체포당할 때,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모두 주님 안에 거하는 그 삶을 박차고, 뿔뿌리 다 흩어지고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제자라는 게 알려지면, 주님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이 들통나면, 꼼짝없이 체포당할 게 뻔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뿔뿌리 흩어지고, 그 뒤에 방문을 걸어잠근 채 두려움에 벌벌 떨던 그들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찾아오셨고, 주님의 부활승천 후에는, 주님이 약속한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임재해 주셨죠.
그들 스스로는 세상을 맞서 나갈 힘도 능력도 없었지만 성령을 통해 그들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의 힘으로 세상을 이겨낼 수 있게 된 그들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주님 안에 거하며, 주님에 의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죠.
(내음성) 그렇기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내가 내 산소통으로만 호흡하면할수록 내 숨도 거칠고 내 산소통도 꺼질 수 있어요.”
“그러나 비록 내 산소통이 꺼질지라도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의 불빛으로 세상을 보면 이 암담한 세상을 뚫고나갈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내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자식마저 힘든 지경에 처한다면, 나라도 그 목사님처럼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하지만 성령님의 임재 속에 주님께서 내 안에 계서서 함께 고통을 겪고 계시다는 걸 일깨워주신다면 제가 일어설 수 있을 거예요.”
“제자들도 그토록 귀가 따갑게 주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다들 흩어져버린 연약한 자들이었잖아요.”
“그런 그들에게 성령님의 임재 속에서 주님께서 그들 안에 거하실 때, 그들은 이 세상의 광풍을 꿰뚫고 담대하게 열매맺는 삶을 살았어요.”
“주님, 이 부족한 저에게도, 이 연약한 저에게도, 주님의 함께 하심의 은혜, 내주하심의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그리하여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에 의해서, 주님의 기쁨되는 선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시옵소서.”
(찬양)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주 나의 하나님이 지켜주시네
놀라지 마라 겁내지 마라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주 나의 하나님이 지켜주시네
놀라지 마라 겁내지 마라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내 맘이 힘에 겨워 지칠지라도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세상의 험한 풍파 몰아칠 때도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주님은 나의 산성 주님은 나의 요새
주님은 나의 소망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성령의 임재 가운데 언제나 함께 내주하시는 분이십니다.
인생의 광풍을 맞을지라도, 인생의 아픔을 겪을지라도, 두려움이 가득찬 일을 당할지라도,
주님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혜의 불빛으로 일깨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은 풍랑을 맞설 힘있는 자를 찾지만 주님은 풍랑을 이기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자를 찾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은 유명한 명마를 원하지만 주님은 당신의 음성에 순종하는 말과 같은 그런 자녀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그 목사님처럼 부모를 잃고 자녀가 당한 아픔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 그때도 당신의 내주하심 속에서 은혜로 감싸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내 산소통이 꺼져갈지라도 내 안에 내주하시는 불빛을 비춰주셔서 내 인생의 방향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와 같은 주님의 내주하시는 은혜가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떤 풍랑과 인생의 광풍이 몰아쳐도 주님으로 인해 승리하게 하시는 은혜가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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