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예화) 지난 번 지방회 감찰회 모임을 우리교회에서 가지지 않았습니까?
그때 어떤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그 목사님의 장모님이 실제로 겪은 ‘딥 페이크’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어느 날 그 장모님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고 합니다.
“엄마, 나 너무 아파서 수술해야 돼.”
“엄마, 나 죽겠어요.”
그때 그 장모님이 저절로 눈물이 나오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내가 어떻게 도와줄까?”
“엄마, 나 죽겠어요. 돈 좀 보내줘요.”
(깨달음)‘딥 페이크’란 인공지능으로 사람의 이미지는 물론 목소리까지 변조시키는 기술을 말하는 거죠.
그만큼 세상은 최첨단시대를 살고 있는데 그만큼 사람들이 속고 속아넘어가고 있다는 것이죠.
지금도 누군가는 딥 페이크를 이용해 또 다른 누군가를 속이려고 계획하고 있을지 모르죠.
“내 아들도 아닌 컴퓨터로 내 아들 목소리를 내는데, 내가 내 아들 목소리도 몰라볼 줄 아는 거야?”
“얼마나 미련한 사람이면 그런 목소리 하나에 넘어간단 거야?”
그렇게 말해도 ‘죽어간다는 아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누구라도 눈물이 저절로 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발췌) 이재기 목사의 〈하나님 나라의 진주를 구하다〉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서울 인사동에는 크고 작은 골동품 가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골목에 자리잡은 그리 크지 않은 골동품 가게에 한 중년 남자가 들어갔습니다.
그 가게 안에는 자질구레한 장신구와 조악한 액자와 모조품 그림들이 전시돼 있었죠.
가게를 둘러보던 그는 구석진 곳에 고양이 하나가 오래된 도자기처럼 보이는 그릇에 머리를 들이댄 채 핥고 있는 걸 봤죠.
아무래도 범상치 않은 그릇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 봤더니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중국 명나라 때의 유물임을 알았습니다.
그 유물은 그 가게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다 팔아도 그 접시를 살 수 없는 그야말로 진귀명귀 값비싼 보물이었죠.
그 중년 남자는 그토록 귀한 도자기를 고양이 밥그릇으로 쓰고 있는 주인은 그 가치를 모르고 있을 것이라 생각을 했죠.
그야말로 일생일대에 자신에게 소중한 기회를 찾아왔음을 실감했죠.
그래서 재빨리 머리를 굴려 푼돈으로 그 보물을 자기 손에 넣을 방법을 궁리했습니다.
“주인장. 그 고양이 한 번 멋지구려. 얼마면 팔겠소?”
“죄송하지만 파는 게 아닙니다. 가게 안의 쥐들을 청소해 주거든요.”
그 중년은 조바심이 났지만 짐짓 태연한 척 다시 흥정을 하기 시작했죠.
“내가 꼭 키우고 싶어서 그래요. 한 50만원이면 되겠소?”
주인은 못 이기는 척 말을 했습니다.
“정말 파는 게 아닌데요. 정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남자는 그 고양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이제 본격적인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보자. 고양이 밥그릇까지 아예 사가는 게 좋겠는데.”
“주인장. 이러면 어떻겠소. 내가 5만원 더 얹어 줄 테니 우유를 담는 저 접시까지 주시구려.”
그러자 그 주인은 정색을 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저 접시오? 절대 안 됩니다. 사실 저건 중국 명나라 때의 도자기거든요.”
“제가 가장 아끼는 보물이예요. 값을 따질 수가 없지요.”
그러면서 그런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 드릴까요?”
“뭔데요?”
“글쎄 저걸 들여온 후로 고양이를 열일곱 마리나 비싼 값에 팔았지 뭡니까?”
(깨달음) 보물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벌이는 머리싸움이 그토록 흥미롭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두 사람처럼 무언가의 가치를 제대로 분별하는 눈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저처럼 골동품에 문외한인 사람이 가서 봐도 그런 진귀한 보물의 가치를 분별할 수는 없겠죠?
(적용)세상은 최첨단을 달리는 시대인데도 무엇이 참이고 가짜인지 분별하기가 쉽지않는 세대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조차 이 세상의 잘못된 문화에 현혹돼 잘못된 가치관을 본받아 살려고 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원성1) 성경은 이 세대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에 대해 이렇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2:2)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을 모른 채 세상 풍조를 좇아 사는 자들이 실상은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의 세력을 좇아 산다는 거죠.
(원성2) 그런데 그 뿐만이 아닙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1-5)
말세에 사람들이 자기 밖에 모르고, 돈을 사랑하고 교만하고 부모를 거역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정도 없고 감사도 없고, 절제도 못하고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하는데 그것을 하나님 사랑보다 더 한다는 것이죠.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하나님을 믿는 겉모습은 갖추는 것 같지만 그 속 심령에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이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깨달음)바로 이것이 이 세상, 이 시대, 이 세대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말세는 어느 특정 시대만 있는 게 아니라 매 시대의 끝자락이 말세지말입니다.
우리도 지금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시대 속에 놓여 이 않습니까?
그렇기에 우리가 무엇을 본받고 살고 있는지 점검해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역배)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서 10대 후반에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당시 최고의 율법학자인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모든 율법의 학문을 배웠고 장래 산헤드린 의원까지 내다보고 있었죠.
그런 그가 A.D.34년 그의 나이 34살 때 다메섹 도상의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죠.
그 후 아라비아 광야에 가서 3년간 경건훈련을 마치고 다메섹으로 왔지만 여의치 않아 예루살렘으로 갔죠.
예루살렘에서 야고보와 베드로를 만났지만 다른 사도들이 인정해주지 않자 바나바가 바울을 고향 다소로 보내줬죠.
그 고향 땅 다소에서 7년간 기도하고 묵상하며 살아가는데 그때 방언도 하고 삼층천 곧 천상의 세계를 입신하기도 했죠.
44살 무렵 바울은 안디옥교회를 목회하고 있던 바나바의 초청으로 안디옥교회의 공동담임목회자로 3년간을 섬기죠.
47살 무렵에 바울과 바나바는 성령님의 강권하심에 이끌려 1차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중간에 바나바의 조카가 이탈했고 바울도 풍토병에 걸렸지만 비시디아 안디옥-이고니온-루스드라-더베에 복음을 전했죠.
그렇게 3년간의 1차 선교여행을 마쳤는데 그때가 A.D.50년 바울의 나이 50살 때였죠.
그런데 할례문제로 안디옥교회가 시끄러웠는데 1차 예루살렘공의회를 열어 그 문제까지 완전 매듭을 짓게 되죠.
바울은 이제 편안하게 안디옥교회를 목회하면 되는데 2차 선교여행을 떠나자고 바나바에게 제안하죠.
그때 바나바는 조카를 데려고 배타고 구브르로 향하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1차 선교여행 끝지점 더베와 루스드라로 향하죠.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나 선교팀에 합류케 했고, 드로아 인근에선 의사 누가에게 복음을 전해 선교팀에 합류케 하죠.
그때 바울은 소아시아의 에베소를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성령님은 그들을 마게도냐 곧 유럽대륙으로 인도하죠.
그때 배를 타고 마게도냐의 외항 네압볼리에 당도해 빌립보-데살로니가-베뢰아-아테네-고린도로 오면서 복음을 전했죠.
유럽대륙에서 복음전도를 마친 바울은 브리스길라 부부를 에베소에 남겨 놓고 안디옥교회로 돌아옵니다.
그것이 3년에 걸친 2차 선교여행이었고, 바울의 나이 53살의 일이었죠.
그 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곧바로 나섭니다.
2차 전도여행지였던 더베-루스드라-이고니온-비시디아 안디옥에 이어 곧바로 소아시아의 중심지 ‘에베소’로 향하죠.
그곳 에베소에서 3개월은 유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고, 2년이 넘는 기간은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전하죠.
그런데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고린도교회가 문제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2번 방문했고 네 번 편지를 써 보냈죠.
그래도 그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자 젊은 제자 디모데를 보냈는데 수습을 못했고, 오히려 디도가 그 문제를 수습했죠.
그때 바울은 너무나 기뻐서 그곳 고린도로 건너가서 성도들을 만나 3개월간 머물면서 위로하고 격려하죠.
바로 그때 바울은 고린도의 서쪽에 위치한 로마교회를 향해 편지를 써서 젊은 여집사 뵈뵈 편으로 보냈죠.
그때가 A.D.56년경 곧 바울의 나이 56살 때의 일이었고,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로마서가 그 편지입니다.
그때 바울이 왜 로마서를 써 보냈겠습니까?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롬1:8)고 해서, 로마교회 성도들 믿음이 에게해를 건너 바울이 머물던 고린도까지 전해진 것이었죠.
오순절날에 성령님이 임하실 때(행2:10) 로마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로마에 돌아가 교회를 세웠고, 그들의 믿음이 바울에게까지 전해진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모신 마음으로 로마교회를 세운 ‘그들의 영적 필요를 채워주고자’(롬15:14-16) 로마서를 써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 무슨 메시지를 써 보내고자 했을까요?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것과 모든 사람이 죄에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것은 모세의 율법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의 의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죠.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그 은혜의 복음을 통해 죄에서 자유함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인 성결과 함께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11장까지는 칭의와 성화에 대해 기록했고, 12장-16장까지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의 삶에 대해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자생적으로 세워진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이 무엇인지를 체계적으로 신학적으로 세세하게 써 보낸 것이죠.
그런데 그와 같은 복음의 진수인 로마서를 써 보낸 곳이 어디라고 했습니까?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2개월 가량 마지막으로 머물고 있던 고린도교회 곧 고린도 지역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는 상업도시로서 향락과 퇴폐문화와 우상이 넘쳐나는 도시였습니다.
그 타락한 도시 속에서 어떻게 복음의 진수인 로마서를 써 보낼 수 있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인 ‘종’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인 사람에게는 환경이나 상황이 중요치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죠.
아무리 악이 창궐할지라도 선이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고린도만 타락한 도시였겠습니까? 그렇지 않죠.
바울이 써 보낸 로마서를 받게 될 로마교회 곧 로마라는 도시는 더욱더 퇴폐적이고 향락적이고 우상이 판을 치는 곳이지 않았겠습니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할 정도요, 당대에 모든 세계를 장악하던 로마였으니, 모든 부와 권력과 상업과 향락이 판치는 곳이 그곳이었죠.
(본문)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을 통해 바울이 힘주어서 권면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원해) 여기에 ‘이 세대’란 ‘이 세상’(this world)과 ‘이 시대’(the age)를 모두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고 ‘본받지 말라’할 때 ‘본받다’는 헬라어 ‘쉬스케마티조’(συσχηματίζω)는 ‘비슷하게 모양짓다’, ‘복사하다’는 뜻이죠.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의미는 이 세상과 이 시대의 패턴이나 틀을 따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시대에 비춰보면 가나안 땅의 음행이나 우상숭배를 본받지 말라(출23:24, 신18:9)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신약시대에 비춰보면 이 세상의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의 세력이 이끄는 대로 세상 패턴과 흐름을 좇아 살지 말라는 거죠.
바울이 로마서를 쓰면서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 써 보낼 때는 또 어떤 의미로 써 보냈겠습니까?
로마 시내에 퍼져 있는 신을 숭배하는 행위를 비롯해, 타락한 욕망의 문화를 복사하듯이 본받지 말라는 권고죠.
로마가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을지라도 로마가 추구하는 가치관이나 로마 사람들이 욕망하는 삶을 좇지 말라는 권면이죠.
(원성) 베드로 사도도 그 단어를 베드로전서 1장 14-16절에서 이렇게 사용한 바가 있습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하고 명령한 말씀을 인용한 거죠.
‘거룩’이란 말이 ‘구별되다’는 뜻입니다.
주일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께 경배하는 구별된 모임을 거룩히 여기시는 거죠.
그런 모습처럼 베드로 사도도 바울처럼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을 향해 그렇게 권면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을 만나기 전 세상 욕심에 빠져 살던 그 삶에서 이제는 구별된 가치관을 갖고 구별되게 살아가라는 권면이죠.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세상 탐욕과 우상과 타락한 문화를 좇는 삶을 본받지 않도록 우리 심령을 동여매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으로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눈에 보이는 것이 다라고 생각하느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가 있지 않느냐?”
“그런데도 이 세상 사람들은 딥 페이크에 속아넘어가고, 값비싼 골동품을 저가에 챙기려고 속고 속이고 있지 않느냐?”
“이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세력들이 주도하고 있는데 너는 그걸 바라보고 있느냐?”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 믿음을 굳게 지키도록 이 세상의 타락한 욕망과 우상숭배를 본받지 말라고 하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보이지 않는 영적 진리를 내가 꿰꿇어보고 살았으면 좋겠구나”
“로마가 세계를 지배할 때 그들의 군사력과 정치력과 퇴폐문화에 모두가 본받아 살았지만 당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구별된 삶을 살지 않았겠느냐?”
“그들을 향해 바울이 하나님의 영적인 진리를 좇으며 살도록 이 편지를 써 보냈는데, 오늘 성령님께도 너를 향한 그 음성이 동일하지 않겠느냐?”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크고 화려하고 거대한 것을 좇지만 너는 오직 영원한 진리와 생명을 구별하여 그 삶을 좇아 살기를 바란다.”
(찬양) 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발췌) 손석제의 〈나를 변화시킨 일곱 가지 질문 〉에 나온 실제 이야기입니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신경외과 교수로 있는 이븐 알렉산더 박사는 뇌의학 전문가라고 합니다.
뇌의학 전문의인 그가 2008년 뇌수막염균에 감염돼 대장균에 노출되어 급성 뇌수막염을 앓고 뇌에 고름이 찼다고 하죠.
그로 인해 그는 뇌사상태에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더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사망선고를 내리려고 하는데 7일 만에 그가 깨어났다고 합니다.
그 후에 그가 쓴〈천국의 증거(Proof of Heaven〉가 아마존에서 20주나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하죠.
그를 두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뇌 기능의 환각상태라고 또는 단순한 꿈이라고 이야기를 한다고 하죠.
하지만 그렇게 부정하는 일들은 의학적인 실험이나 검증을 통해 천국을 부정하는 것과 결코 다를 바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천국을 보고 왔다는 그 진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천국을 경험했다고 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공통된 증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천국은 하늘 구름 빛 만남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은 ‘성경적인 이미지와 대상’으로 나타난다는 게 그것이죠.
만일 임사체험이 거짓이라면 세상에 즐거워했던 파티나 술과 같은 환락적인 이미지로 나타나야 하는데 결코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죠.
두 번째는 그와 같은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이 그 이후의 삶이 대부분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여태껏 이 세상의 것이 전부라고 생각해 온 사람이 천국을 보고 경험하고 왔으니, 이 세상과 결코 비교할 수 없는 그 천국의 삶을 갈망하면서 변화된 삶을 살지 않겠습니까?
바울도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고향 다소에서 7년간 살면서 3층 천의 천국을 보기 전까지는 이 세상을 목적으로만 살았죠.
하지만 그 천국을 보고 난 이후에는 그 남은 삶을 주님의 나라를 위해 바치는 삶으로 바뀌었죠.
그것처럼 천국을 보고 온 이븐 알렉산더 뇌의학 전문가도 그 외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도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죠.
세 번째는 그런 임사체험 속에는 의도된 스토리가 담겨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의도된 스토리가 있다는 뜻이겠습니까?
영적인 세계에 관한 스토리, 곧 복음의 초대, 천국의 초대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 어떻습니까?
미국 하버드대학 신경외과 뇌의학 교수로 있던 알렉산더 박사도 임사체험을 통해 천국을 보고 오기 전까지는 영적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것 아닙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서 그 천국을 보고 왔을 때, 그도 그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도 바울처럼 그 이후에 모든 삶의 관점이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영원한 세상을 소망하는 삶으로 변화돼 있겠죠.
(예화) 오늘 로마서를 써 보내면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권면한 바울은 과연 어떤 생으로 마감했을까요?
우리가 전해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마메르틴 지하 감옥에서 참수형 당했습니다.
로마에 가면 참수형 당한 터에 성당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곳 지명이 ‘트레 폰타나’(Tre fontana)입니다.
‘트레’란 ‘셋’을 뜻하는 말이고 ‘폰타나’는 ‘샘’을 칭하는 말입니다.
목포에 ‘폰타나비치호텔’이 있는데 그 ‘폰타나’가 ‘샘’ 곧 ‘강물’을 뜻하는 말이죠.
로마의 ‘트레 폰타나’는 사형 집행관이 바울의 목을 칠 때 그 목이 바닥에 세 번 튀었고, 튄 곳마다 샘물이 솟아났다고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그 성당 안에 들어가면 바울이 참수당할 때 사용된 돌기둥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 튀었다고 하는 그곳에 세 개의 제단이 만들어져 있죠.
바울이 그곳에서 정말로 죽었는지, 정말로 목이 세 번씩이나 튀었는지, 그것을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죠.
하지만 로마 어디에선가 주님을 위해 살다가 참수형당한 바울의 실제 삶의 자국이 있다는 점은 확실한 것이죠.
그런데 그 성당 안에 들어가면 성당 옆에 조각판 하나가 붙어 있습니다.
그 조각판은 로마 군인들이 돌에 묶인 바울의 목을 칼로 치는 장면이 새겨져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생생합니다.
그 조각판에 새겨진 바울의 표정이 얼마나 생생한지, 그 눈동자를 보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이 찡할 정도입니다.
(깨달음)어떻습니까?
바울은 그만큼 그 세대를 본받지 않았던 사람 아닙니까?
만약 바울이 그 당시의 세상 흐름을 좇고 세상을 본받고자 했다면 절대로 천국을 향한 삶, 진리를 향한 삶은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 너머에 영원한 세상, 사탄이 결코 침범치 못할 그 영원한 세상을 보았기에, 그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참수형 당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이 세상과 다른 영원한 천국을 바라봤기에 그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게 여기신 뜻을 좇아 살았던 것입니다.
(내음성)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주님께서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영적인 세계가 있고 천국이 있음을 확신하지만 깜빡깜빡 그 세계를 놓치고 살때가 많아요.”
“이 세상의 친구들 동료들과 어울리다보면 이 세상 것에만 현혹되고 이 세상 것에 사로잡힐 때가 많아요”
“주님 이런 저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믿음의 눈을 뜨고 천국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열어주세요.”
“바울처럼, 알렉산더 교수처럼, 그리고 지금도 수없이 많은 이들이 임사체험을 통해 천국을 보고 변화되듯이, 저에게도 그런 세계의 눈을 열어주시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세력들이 추구하는 길과 달리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별된 삶을 본받아 살게 해 주시옵소서.”
(찬양)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우리 가운데 서신 주님
그 빛난 영광 온 하늘 덮고 그 찬송 온땅가득해
내눈 주의 영광을 보네 찬송가운데 서신 주님
주님의 얼굴을 온 세상 향하네 권능의 팔을 드셨네
주의 영광 이 곳에 가득해 우린 서네 주님과 함께
찬양하며 우린 전진하리 모든 열방 주 볼때까지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욕망의 바다와 같습니다.
이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세력들은 세상 사람들과 믿음의 자녀들조차 그 길로 들어서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 천국을 경험한 사람들,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자들은 결코 그런 삶을 본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멸망을 향한 문이자 지옥을 향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아무리 화려하고 위대해도 결국 유한한 세상이요, 이 세상 너머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기다리고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 우리를 향해, 이 세상을 본받기보다 오직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살도록 권면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심령 속에 이 세상을 본받기보다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좇아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승리의 삶이요, 그것이 영원한 영광의 살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은혜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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