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논지)우리가 쓰는 볼펜의 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요?
볼펜 볼의 원자재가 될 큰 철 덩어리가 있는데, 그 철덩어리를 볼펜 볼의 크기에 맞게 깍둑썰기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깍두기가 된 그 철덩어리를 대형 원심기에 넣고 초고속으로 돌린다고 하죠.
그러면 그 원심기 안에 있는 깍두기들이 서로 부딪히고 깎여서 볼펜에 들어갈 만큼의 동그란 모양이 된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빚어지는 것도, 하나님 나라의 볼펜의 볼로 다듬어지는 것도 그런 원리이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원심기 안에 수많은 깍두기들과 함께 부대끼고 다듬어지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것이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원심기 안에 넣으신 주님을 목자요 농부로 믿고 온전히 내어맡기며 사는 게 중요하겠죠?
(발췌)최윤영 목사님의 〈호모 크리스챠니쿠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본교회를 섬기고 있는 최윤영 목사님도 그렇게 다듬어진 수많은 깍두기 중의 하나였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부산의 망미동으로 이사를 갔다고 하죠.
그곳으로 전학을 갔는데 아이들의 텃새가 너무나 심해서, 그 동네의 골목대장 선배와 결전을 벌이기도 했죠.
다만 가족이 하나님을 믿고 있어서 그는, 그 골목대장이 무화과나무를 따먹으라 가자고 해도 나서질 않고 얻어 터졌죠.
그때 당시 다니던 교회는 건물도 좋고 교인수도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 때문에 전도사님도 목사님 아들의 눈치를 봐야 했고, 달리기 시합때 자기 차례를 목사님 아들에게 빼앗긴 일도 있었죠.
배구시합 때도 자기 동창생인 목사님 아들의 인기가 최고였는데, 그 녀석이 서브를 넣다가 팔이 빠져 기절한 일도 있었죠.
그렇게 동네에서도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밀리는 삶을 살고 있었는데, 그의 엄마가 암이 걸리는 가슴 앞은 일이 생겼죠.
그때 그의 어머니는 너무 힘에 겨워서 기도원에 들어가 20일, 또 40일 금식기도를 하며 살았습니다.
그 와중에 그의 가족들은 울산으로 이사를 가야 했습니다.
울산에 있는 교회는 이전의 교회와 달리 나무 골격을 세워서 파란색 천막을 두른 작은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정이 넘치는 교회였죠.
그래서 엄마 몸이 좋아질 때면 엄마보다 더 힘든 교회의 어르신들을 돌본 그의 엄마였죠.
다만 몸에서 고름이 나오고 냄새나는 엄마와 함께 예배드리는 그 자신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그 때문에 집에서 교회를 오갈 때면 큰 대로변이 아니라 산길을 피해 다녔던 그였죠.
본격적인 투병 생활 1년을 채우던 11월 5일날, 엄마는 부산체육고등학교 기숙사 생활하던 누나까지 불러 유언을 했습니다.
다들 예수님을 잘 믿으라는 유언이요, 중학교에 다니는 그에게는 가족을 당부한다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때 그는 엄마는 괜찮냐고 물었는데, 그의 엄마는 “괜찮다. 예수님 땜에 괜찮다.”하고 대답하며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병원 치료비 때문에 몽땅 재산을 다 쏟아부은 그 집의 형편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었죠.
오죽 했으면 리어카를 빌려 시신을 공원묘지에 묻으려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형편을 알아차렸는지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러줬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그의 뒤통수에 따라 붙은 말은 좀체 마음에서 사라지질 않았습니다.
“재는 엄마도 없는 애가 저러고 놀고 있네. 재는 엄마도 없는 애가 저러고 웃고 있네.”
그러니 좋은 일이 있어도 웃을 수도 없었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울 수도 없었죠.
그때부터 교회에 대한 존경심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여름 교회 중고등부 수련회 때 놀라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사실 그는 교회와 하나님에 대해 싫은 마음이 있어서 수련회에 가지 않으려 했는데, 아버지가 보내서 갈 수밖에 없었죠.
수련회 집회 첫날 설교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싸구려 질그긋에 값진 보석이 담겨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설교를 듣는 그는 속으로 “그래서 어쩌라구”하며 시큰둥하게 반응을 했죠.
그렇게 길고 지루한 설교가 끝나고 기도회가 이어졌습니다.
그때부터 그 자리에 모여 있는 형들과 누나들이 가슴을 치고 울부짖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그가 좋아하던 착하고 예쁜 수빈이 누나마저 깍지를 낀 채 슬픈 얼굴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누나,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아무리 질그릇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도 예수님이라는 보화가 담겨 있다면 괜찮대요. 예수님 때문에 괜찮을 거예요.”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해 준 말을 섞어서, 그 누나에게 속으로 건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그의 심령에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넌 왜 안 괜찮니? 나 때문에 괜찮다면서 넌 왜 안 괜찮니?”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나는 왜 괜찮지가 않지?”라는 서글픈 마음이 복받쳐 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도 보배가 담겨지게 해 달라고,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이 괜찮아지고 싶다고,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조용한 속삭임이 그의 심령에 밀려들었습니다.
“윤영아. 나는 오래전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네 속에 있었단다.”
그 음성은 예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눈을 떠 봤을 때 모두들 숙소로 돌아가고, 두 세 사람만 예배당에 남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자리에 일어났는데, 다리가 너무 저렸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자기 마음 속에 “어? 괜찮다. 모든 게 괜찮아졌다.”하는 절대적인 평안함이 밀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불쌍하고 가난한 자기 집도, 여태껏 억울해 하던 것도,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 모든 게 한꺼번에 괜찮아졌다는 것 말입니다.
(깨달음)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 걸까요?
전에도 함께 해 주셨지만, 비로소 그때 깨닫게 해 주신 주님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이죠.
그의 심령에 이미 들어와 계신 그 주님을 알게 해 주셨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니 학교나 교회나 주변 삶이 변한 게 없어도 그의 삶은 주님과 함께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적용)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코로나19로 경제적으로 힘들고, 가정과 일터와 사업장의 환경이 어려워도, 왜 우리가 기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입니까?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주님 때문에, 내가 주님을 의식하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나를 지켜보시고 살펴주시는, 임마누엘 주님 때문에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죠.
세상이 힘들고 어려울 때, 내 손에 잡히는 게 없을 때, 우리가 무엇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까?
내가 주님의 원심기 안에 깎이고 있는 볼펜의 볼인지, 농부되시는 주님이 나를 살펴주시는지, 그걸 헤아리는 게 중요한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강화의 시간을 가지면서 하신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갈릴리 출신의 12명을 제자로 불러 3년간 가르치고 훈련하신 이후에, 드디어 십자가 죽음을 앞둔 목요일 밤에 나눈 말씀이죠.
그러면서 주님은 참 포도나무고 첫 운을 떼셨습니다.
그것은 포도나무가 구약성경에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던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시켜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 새로 옮겨심은 포도나무 말입니다.
죄악의 땅에서 새로운 약속의 땅에 이식했다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를 좇아 참된 열매 맺는 포도나무가 돼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영향 속에 세상의 탐욕과 욕망과 우상을 좇아 살기에 바빴죠.
바로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리, 주님의 제자로 부름받은 너희들은 참포도나무이신 주님의 가지로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주님 스스로를 ‘참 포도나무’라고 강조하신 이유가 있다고 했죠.
그 당시에 스스로 구원자라고, 로마의 해방자가 될 것이라면서, 예수아, 곧 구원자라는 이름을 쓴 이들이 많았죠.
갈릴리, 유대 땅, 예루살렘 주변,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부모들이 자기 자식의 이름을 예수아 라고 지은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나사렛 출신의 그 예수아, 그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구원자임을 밝히신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주님에게 붙어 있는 포도나무 가지가 돼야 참된 제자로 열매맺는 삶이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아버지, 곧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밝혀주고 있습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아버지는 농부라”(1절)
(원해)우리말 ‘농부’로 번역된 ‘게오르고스’(γεωργός)는 ‘농부’(a husbandman)와 함께 ‘경작자’, ‘재배자’란 말도 있습니다.
농부란 농사만 짓는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요즘 식으로 말하면 축산업자, 양식업자, 영농업자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죠.
농부만 해도 그렇습니다.
들판의 모든 곡물들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와 함께 자라는 법이죠.
농부의 마음은 들판에 자라나는 곡물들에게 그 마음이 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마치 자식과 같이 여기는 것이죠.
그것은 소나 돼지나 닭을 키우는 축산업자도, 전복이나 새우를 키우는 양식업자도 마찬가지죠.
소나 돼지나 닭에게 병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여물과 밥은 잘 먹고 있는지, 늘 살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복이나 새우들도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닌지, 수온이 너무 높은 것은 아닌지, 그 마음이 늘 그 녀석들에게 가 있는 법이죠.
마치 자기 자식들처럼 애지중지 키우는 것 아니겠습니까?
(깨달음) 그렇다면 우리에게 농부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인지 깨달을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식물과 곡물처럼 보살피며 마음을 쏟아 붓는 분 아니겠습니까?
영적으로 허기에 처한 것은 아는지, 영적인 병해충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헤아려주시는 분 말입니다.
가축이나 짐승들이 아파하는 것은 아닌지, 전복과 새우가 고온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주인처럼,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눈여겨보고 계시고 보살펴주시는 분 말입니다.
(원성)시편 121편 3-4절에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원성2) 이사야 49장 14-15절은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우리에게 농부되시는 주님은 우리를 향해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면서, 눈동차럼 지켜보고 살펴주시는 분이란 뜻이죠.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일 때 TV에서 재미난 것을 볼 때 그것조차 잊어버릴지라도 농부 되시는 주님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아니하신다고 약속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성화) 그런 하나님을 누가 체험한 바 있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이삭의 아들 야곱이 그런 체험을 했죠.
야곱은 형 에서와 쌍둥이로 태어난 동생이었죠.
커가면서 에서는 들판에 익숙한 사람으로서 아버지의 품을 떠나 이방의 타락한 문화에 빠져드는 삶을 살았죠.
동생 야곱은 형과 달리 집안의 사람으로서 아버지의 품 안에 거하는 삶을 택해 살았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욕심이 많은 동생이라 형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샀고, 형의 축복권까지 빼앗고자 아버지를 속였죠.
그 일로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하는 걸 알게 되었고, 그때 어머니와 아버지는 야곱을 외삼촌 집으로 보냈죠.
물론 그 일은 부모의 계획 속에 나온 일이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야곱을 훈련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알 수 있죠.
욕심 많은 야곱의 혈기와 고집을 꺾고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뜻 말이죠.
그때 야곱은 아버지의 집 브엘세바에서 외삼촌 라반이 사는 하란까지 900km 거리를 가야 했습니다.
그 거리는 목포에서 서울까지 300km인데 그 세 배나 되는 거리입니다.
당시의 발걸음으로 한 달 넘게 걸리는 거리였죠.
그런데 그 낯선 땅을 향해 나아가는 길목에 ‘루스’라는 곳에서 잠을 잔 적이 있지 않습니까?
브엘세바에서 그곳 루스까지는 100km지점의 거리로 이틀 정도 지나온 곳이었죠.
그때 그 루스에서 잠을 자는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꿈에 하늘로부터 사닥다리가 내려오며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고, 하나님께서 나타나 말씀해주셨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28:13-15)
(깨달음) 야곱이 그때 깨달은 게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아버지의 집에만 계신 분인줄 알았는데, 낯선 곳을 향하는 자신의 길목에도 함께 하시는 분임을 깨달은 것이죠.
더욱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떠나지 않을 것이라, 약속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감격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 품을 떠나 전혀 낯선 곳을 향해 떠나는 그 마당에 얼마나 외롭고 두렵고 답답한 상황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때까지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를 떠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농부처럼 그를 보살펴주시겠다고 약속한 거죠.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주님은 우리에게도 농부가 되셔서 우리를 보살펴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이 시간에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주님은 네게 농부로서 무슨 영양분이 필요한지, 영적인 병해충은 무엇인지, 너를 헤아리고 보살펴주지 않겠느냐?”
“주님은 깍두기가 된 철덩어리를 대형 원심기에 넣고 초고속으로 돌리듯이, 너를 지금도 돌리며 빚어주고 있지 않겠느냐?”
“야곱이 형을 피해 낯선 외삼촌 집으로 가는 그 길목에 잠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살펴주시고 약속해주지 않았더냐?”
“최윤영이 엄마 잃고 외롭고 힘들게 살 때도 주님은 그의 심령 속에 오래 전부터 함께 해 주셨다고 말하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손에 잡히는 포도나무 열매가 없다고 생각할 때, 세상의 고난과 환경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이 세상 환경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네 심령 안에 함께 계시는 주님을 재확인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느냐?”
“주님은 야곱이 외롭고 두려움 속에 있을 때도, 야곱이 어디로 갈지라도, 그에게 약속한 것을 이루기까지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지 않았더냐?”
“중학생 최윤영이가 온갖 실망과 좌절 속에 있을 때에도, 여전히 그와 동행해주신다고 말씀해주지 않았더냐?”
“그 주님께서 오늘도 네 심령 안에, 너를 지켜주시고 보살펴주시는, 너의 농부이심을 너는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설령 내가 너를 도우지 않는 것 같아 보여도, 주님은 네 안에 여전히 너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찬양) 기도를 멈추지 마라 눈앞의 상황이 마음을 눌러도
원망치 마라 너의 입을 지켜라 저들은 너의 입을 보고 있다
마음을 뺏기지 마라 내가 널 도우지 않는단 소리에
너의 모든 게 모든 게 불리해도 너는 기도를 계속해라
너 기도를 멈추지 마라 내가 너의 그 모든 상황을 바로 역전시키리니
너 기도를 멈추지 마라 내가 잠시도 쉬지 않고
모든 걸 지켜보고 있으니 바로 역전되리라
(발췌2) 서두에서 말씀드린 중학생 최윤영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희망대학을 신학대학교로 기입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그에게 “저 자식은 사지 멀쩡해서 신학교 가려고 한다”면서 등록금을 주지 않겠다고 했죠.
그런데 그런 아버지보다 더욱 괴로웠던 것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할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렇게 응답해주시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네가 필요 없으니, 네 갈 길이나 가라.”
한두 번도 아니고 장래에 대해 기도할 때마다 가슴에 남는 것 같아, 너무나도 괴로웠던 그였죠.
1991학년도 대학입시에서 신학대학교를 합격하고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죠.
설령 자신을 꾸짖을지라도 등록금만큼은 주시겠지, 생각한 그였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등록금을 주지 않아, 등록금을 납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로부터 1년간 공사판을 돌아다니면서 등록금을 모으고 재수를 해야 했죠.
그리고 그 해 안양에 있는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신학대학 야간학부에 들어갔습니다.
공사판을 뒹굴면서 모은 돈으로 등록금을 냈고, 그의 수중에 10만원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죠.
“하나님! 일주일, 저 같은 놈이 단 일주일만이라도 신학생으로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그것만으로도 족하겠습니다.”
딱 1주일만 다니겠다고 생각하고 들어간 신학대학이었는데, 3일째 들어 돈이 다 떨어질 때였죠.
그때 같은 독서실에 사는 선배 하나가 자신을 아는 선배 자취방에 넣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 선배를 따라 낮에는 공사판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학교에 들어가 수업을 듣는 그였죠.
그 중간에 학교 독서실에서 졸도하여 쓰러지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그렇게 지친 몸을 이끌고 신학대학교 도서관을 올라가던 4학년 봄철이었습니다.
토요일 오전, 개나리 꽃망울 하나하나가 용광로에서 뿜어 나오는 불꽃처럼 보였죠.
그런데 바람에 흔들리는 그 불꽃같은 꽃망울 아래서 하나님의 또렷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들아. 환영한다. 환영한다. 환영한다. 아들아.”
그 음성이 들려올 때 그의 가슴 속에 울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중생관 건물 앞에 다다랐을 때는 그의 눈에 눈물이 범벅이 되었죠.
그토록 어렵게 들어간 학교였고, 입학할 때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 단 일주일인 줄 알았는데.
잠깐이나마 신학생 신분을 소유하게 된 것에 만족하겠다며 기도한 그였는데.
어느덧 4학년 졸업반이 되어 있었다니, 그 모습 앞에 감정이 복받쳐 울었던 것입니다.
그때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렸는데, 그 책을 주워서 펼치는데, 그 눈에 들어온 소제목 앞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 “하나님의 시간표”
(깨달음)그때서야 그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하나님의 시간표 속에서 여태 다듬어 오셨다는 걸 말입니다.
아니, 유아기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시간표 안에서 그를 빚어주고 다듬어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적용)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저도 신학교 다닐 때 공사판을 누빈 적이 있어서, 그 목사님의 삶에 괜히 눈물을 흘렸는데,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세상이 지치고 힘들 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내 안에 임마누엘로 계시다는 것 말입니다.
설령 내가 주님을 의식하지 못한 유아기 때에도, 내 부모도 나를 몰라줄 때도, 죽기보다 힘든 과정에 처해 있을 때도, 주님은 나의 농부가 되어 보살펴주신다는 것 말입니다.
나의 모난 부분이 있으면, 주님의 원심기에 나를 돌려 이리저리 빚어주시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란 사실 말입니다.
(내음성)그러니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실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땐 농부되신 주님을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제 가정이 힘들고 어려울 때, 세상 사는 일이 힘들고 지칠 땐, 내 안에 계신 주님을 생각지도 못한 일이 많아요.”
“주님은 나의 농부가 되셔서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내게 무엇을 잘라내야하는지, 가장 잘 알고 계신데도, 주님을 놓치고 살았어요.”
“주님은 12제자들만 포도나무 가지로 빚으시는 분이 아니라, 오늘 저희들도 주님의 가지로 빚어주고 계신 줄 믿어요.”
“12제자들이 절망과 낙심 가운데 있을때도, 그들에게 찾아와 격려해주시고 새롭게 빚어주셨잖아요.”
“최윤영이가 신학대학에 들어가 4년동안 쓰러지고 졸도할 때, 주님은 함께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잖아요.”
“야곱이 낯선 곳으로 떠날 때 그 홀로라고 생각했지만, 주님은 그를 통해 계획한 일을 마치까지 결코 떠나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주님, 제가 가정이나 세상 일로 지치고 힘땔 대도, 주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며 살 수 있도록 저를 만져주시기를 원해요.”
(찬양) 나 비로소 이제 깊고 넓은 바다간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내 손을
주는 결코 놓치지 않으셨다 나 비로소 이제 폭풍우를 뚫고 간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나약한 나를 잡아 주시는 그분은 나의 주님
주 나를 놓지 마소서 이 깊고 넓은 바다에 홀로
내 삶의 향해의 끝이 되는 주님이시여 난 의지합니다.
날 포기하지 마소서 나 잠시 나를 의지하여도
내 삶에 항해의 방향을 잡아 주시옵소서
이 깊은 바다에 날 홀로 버려두지 마소서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목자요 농부요, 볼펜의 볼을 만드시는 대형 원심기인 줄 믿습니다.
내 믿음의 영양분이 어디가 부족한지, 또 어디가 넘치는지, 어느 부위에 영적인 병이 걸렸는지, 미리 아시고 헤아려주시는 농부이십니다.
깍두기가 된 철덩어리를 대형 원심기에 넣고 돌릴 때 여기저기 부딪히지만, 주님은 그때마다 더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으로 빚으시는 줄 믿습니다.
야곱도, 최윤영 목사님도,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도, 농부되신 주님께서 그렇게 친히 빚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 인생의 농부되시는 그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베풀어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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