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나예) 예배당 옆 텃밭에 포도나무의 포도가 익어서 따 먹었습니다.
눈에 보이면 여러분들도 한 알 한 알 따 먹어도 좋겠어요.
포도나무가 닭장 위에 한 그루, 텃밭 모서리 부분에 두 그루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똑같은 포도나무 같아 보여도 그 맛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토양도 다르고, 포도나무 종자도 다르기 때문이죠.
퇴비를 주고, 거름도 줘야 하고, 종이로 열매를 감싸줘야 극상품 포도열매가 맺힐 텐데, 거기까지는 신경쓸 겨를이 없죠.
다만 농부의 마음처럼, 가끔 들여다보면서 병에 걸리진 않았는지, 벌레가 많지 않는지, 그것만 살펴 줄 뿐이죠.
(깨달음) 제가 그렇게 살피는 모습을 통해 느낀 게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나를 그렇게 살펴주고 계시겠구나, 하는 것 말이죠.
오늘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그런 은혜로 눈여겨보시고, 품어주시고, 살펴주시는 줄 믿습니다.
(나예2) 예배당 옆 텃밭에 사과나무도 네 그루나 심었습니다.
젙붙인 것까지 하면 다섯 그루는 되네요.
제가 건강에 관한, 면역력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었습니다.
아침에 사과 한 쪽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금사과’다 하는 것 말이죠.
아무리 제사상에 올리는 배가 좋다고 해도, 사과만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죠.
작년에는 태풍에 사과가 많이 떨어졌는데 올해는 감사하게 사과가 잘 매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과에 얼마나 많이 열렸는지, 한 줄기에 대여섯개씩 붙어 있는 사과를 두 세 개만 남기고 잘라줬습니다.
그래야 남아 있는 사과 열매들이 더 많은 영양분을 받아들일 수 있고 더욱 튼실한 사과열매로 커갈 수 있기 때문이죠.
(깨달음) 제가 그렇게 사과나무의 사과열매를 들여다보고 잘라주는 모습을 통해 느낀 게 그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나를 그렇게 눈여겨보시고 살펴주시겠구나, 하는 것 말이죠.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영양분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제게 해가 되는 부분은 미리 잘라주시겠구나, 하고 말이죠.
(적용)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농부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을 일깨워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농부처럼,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우리에게 무엇이 해가 되는지, 알고 계셔서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 말입니다.
그러나 포도나무든지 사과나무든지, 그 어떤 나무든지, 처음부터 완벽한 나무는 없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묘목을 사서 심더라도, 주변에 좋은 나무를 접붙이더라도, 몇 년에 걸친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도윤이나 도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고 해서 저절로 초등학생이 되는 게 아니듯 말이죠.
적어도 2-3년은 다니고 적응해야, 그때부터 의젓한 초등학교 학생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그렇죠?
(역배) 오늘 본문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3년의 과정을 거친 후에 ‘제자강화’의 시간을 가지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안드레와 베드로 형제, 배를 가지고 고기잡던 요한과 야고보 형제를 부르셨죠.
또한 갈릴리 벳새다 출신인 빌립과 그 인근 갈릴리 가나 출신인 바돌로매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갈릴리 가버나움에도 세관으로 일하던 레위도,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도, 다대오와 가리욧 출신의 유다, 열심당원 시몬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해서 그들이 저절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무엇을 목표로 살고 있는지, 주님께서 어떻게 사시는지, 주님께서 무엇을 가르치며 사는지, 몸소 따라다니며 배워야 하는 것이죠.
바로 그 기간이 최소한 3년간 필요했던 것입니다.
(깨달음) 과연 그 3년이란 기간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이겠습니까?
3년이란 기간이 주님의 제자가 되기에 충분한 기간이 아니라, 최소한도의 기간이라는 점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았다면, 그 뒤로도 몇 년 동안 더 제자훈련의 삶을 거쳤을지 모릅니다.
그만큼 주님을 만났거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거나, 주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한 사람에게도, 그 이후에 신앙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군대에 들어가 훈련병시절을 거쳐야 하듯이, 공기업이나 공무원이나 회사에 취직했을 때 수습기간을 거쳐야 하듯 말이죠.
그런 과정 없이는 온전한 군인 온전한 직원 온전한 주님의 제자, 맛있는 포도나무나 사과열매로 거듭날 수 없듯이 말이죠.
(발췌) 무당 어머니 밑에 태어나 목회자가 된 김종오 목사님이, 어린 시절에 겪은 일이 있습니다.
그 분은 언젠가 말씀드린 〈무당 엄마 목사 아들〉에 나오는 주명식 목사님과는 또 다른 분입니다.
김종오 목사님의 간증은 〈내 삶에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에 나온 내용입니다.
그 분은 어렸을 적 어머니가 무당이라 무당집에서 태어났습니다.
1976년경 초등학교를 마치고 홍성중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 걸어서 15분 거리에 조그만 절이 있었죠
그곳을 지나가면서 듣게 된 목탁 소리와 풍경소리에 심취해 절에 머물고 싶은 소원까지 품게 된 그였습니다.
이른바 스님이 되고픈 마음이 든 것이었죠.
그런데 1977년 성탄절 새벽 1-2시 경 사이에 집 밖에 새벽송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옛날에는 성탄절이 밝아오는 새벽에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찬양을 동네 곳곳마다 돌아다니며 대문 앞에서 부르곤 했죠.
그런데 누구 하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무슨 찬송소리가 들리는지 대문을 열고 나갔죠.
그러자 아무도 모르게 그 형이 읍내에 있는 교회에 다니고 있었던 것이었죠.
그러자 집이 발칵 뒤집혔고 엄마는 “예수 믿으면 망하는 거 모르냐? 이놈아”하면서 당장 그만두라고 했습니다.
형은 그에 뒤질세라 “아닙니다, 어머니. 예수님 믿으면 망하지 않고 오히려 구원받습니다”하고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때 아버지도 나무하러 갈 때 쓰던 작대기로 형을 때릴 기세였고, 형은 맨발로 집을 뛰쳐나갔습니다.
그런 일이 종종 발생하자, 동생 김종오는 식칼을 형에게 들이대면서 그렇게 위협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형. 제발 부탁인데. 집안 시끄럽게 하지 말아라.”고 형의 목을 겨누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무언가 씌운 사람처럼 행동한 모습이었다고 생각을 하죠.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79년 여름이었습니다.
형은 다락방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어머니와 아버지와 김종오는 안방에서 잠을 자려고 누워 있었습니다.
벽에 걸린 괘종시계는 밤 11시를 알리며 11번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 괘종시계가 타종을 멈추자 어머니는 갑자기 머리가 아프시다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밤 11시 30분경 어머니는 머리가 몹시 아프다고 했고, 11시 50분경 ‘아악!’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벌러덩 넘어졌죠.
권투 선수가 KO패를 당하는 모습 그대로 완전히 녹다운 돼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너무나도 놀라서 “종오야! 니 엄마 죽은 것 같다.”하고 소리를 쳤죠.
그로부터 10분 뒤에 시계 괘종이 12번의 타종을 하고 멈춰섰습니다.
그 순간 시체와 같았던 그 어머니가 일어나면서 “하, 하, 하나님!”하고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그 아버지는 “종오야! 니 엄마가 미쳤나 보다.”하고 말했습니다.
보름달이 환하던 그때 마루에 무릎 꿇은 그 어머니 입에서 찬양과 방언이 나오면서 통곡과 회개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어머니의 회개와 감사기도는 동네의 새벽예배 30분 전을 알리는 4시 30분까지 계속 됐습니다.
교회 타종이 멈추는 동시에 어머니는 대문을 열고 나갔다가 아침 7시가 돼서야 집에 돌아왔죠.
그토록 완강하게 교회를 거부하던 그 어머니가 처음으로 새벽기도회에 다녀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였습니다.
그 옆집 정식이 할머니가 그 집에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 할머니도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점을 보고 절에 다니던 분이었습니다.
그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묻더라는 것입니다.
“종오 엄마. 어젯밤에 집에 무슨 일이 있었어?”
“왜요?”
“글쎄. 어제 새벽에 큰 소리가 들려 무슨 일인가 싶어 나와 봤어.”
“그런데 이 집을 쳐다보니까 이 집 지붕 위에 빨갛게 불붙은 큰 나무 십자가가 박혀 있는 게 아니겠어”
“불은 붙었는데 희한하게 나무가 타지 않는 거야. 내가 그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말야.”
“내가 그걸 보고 쓰러졌는지, 우리 며느리랑 아들이 나를 방으로 데려다가 눕혔다가 지금에서야 깨어났다니까.”
“어제 무슨 일이 있었어?”
(깨달음)그렇게 해서 김종오의 어머니도, 그리고 그 할머니도 함께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가항력적인 주님의 은혜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에게 찾아와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주님의 자녀로 부르시는 첫 체험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 주님의 찾아오심, 주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체험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주님의 자녀가 됩니까?
그로부터 그 어머니는 4년 정도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녔는데, 그때 김종오의 나이는 19살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그 말씀을 종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종오야. 내가 너를 결혼시킬 때가 살아야하는데 그렇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너를 목사로 부르실 거야. 기도 많이 하고 성실하게 준비해라.”
그렇게 말해준 그 어머니는 그로부터 3개월 후 천국에 가셨습니다.
그 후 김종오는 우여곡절을 겪고서 신학교를 갔는데, 신학생 때도 갈등을 겪다가 중도에 포기하려고 했죠.
하지만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포도나무를 가꾸어주듯이, 사과나무의 가지를 쳐주듯, 주님의 은혜로 빚어주셔서 주님의 제자, 주님의 목회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적용)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와주시고,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도 그와 같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방법은 정말로 다양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찾아오셨다고 해서, 내가 주님을 만났다고 해서 저절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김종오 목사님의 어머니처럼 4년이 걸리기도 하고, 김종오 목사님처럼 십수년이 더 걸리기도 합니다.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애굽에 종살이하며 죄의 종으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죠.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발라 그 피를 보고 심판을 넘어가셨고, 그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즉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까? 아니죠.
적어도 3개월 간에 걸쳐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그 은혜를 다 체험하게 한 후에, 그때 비로소 언약식을 가졌죠.
그들은 무당이 KO패 당하는 것보다 더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죠.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 반석에서 생수를 공급하시는 하나님, 빈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해주신 하나님이셨죠.
그런 체험을 겪으며, 이 세상의 하늘과 땅에 살아계신 신은 하나님 한 분 뿐이구나, 하는 것을 몸소 알게 해 주셨죠.
그래서 3개월 되던 시점에 드디어 그들을 자녀로 삼아주시는 언약식을 체결한 것이었죠.
그러나 그것으로 또 끝이었습니까?
광야 38년을 헤쳐나가는 동안에도 끊임없는 우여곡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빚어주셨습니다.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참포도나무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참포도나무의 가지로 빚어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음성) 그렇기에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지금 이 시간에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포도나무든 사과나무든 농부의 눈길과 관심은 늘 그 나무에 머물지 않겠느냐?”
“내가 너를 참포도나무인 주님의 가지로 접붙이고자 얼마나 네 심령의 문을 두드렸는지 너는 알고 아느냐?”
“무당이었던 김종오의 엄마도, 무당 엄마인 김종오도, 그 형의 믿음을 통해 그 가족들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지 않았더냐?”
“애굽에서 죄의 종, 마귀의 종으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찾아오지 않았더냐?”
“오늘 너에게도 그런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너를 부르지 않았더냐?”
“그러나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에게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주님께서 찾아와주시고 만나주셨어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 믿음의 시작이지 않더냐?”
“무당이었던 김종오 엄마도 4년 넘게 믿음의 길을 걸었고, 그 아들 김종오도 십수년 동안 갈등을 통해 주님의 자녀로 나아가지 않았더냐?”
“이스라엘 백성도, 홍해를 경험하고 생수를 공급받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는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맛봤어도 광야 38년간 불평과 원망의 삶을 거치지 않았더냐?”
“지금도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심령과 네 믿음을 참된 포도나무 가지로 빚어주고 계시지 않겠느냐?”
https://www.youtube.com/watch?v=qHQHBXvSs3o
(찬양)주 사랑이 나를 숨쉬게 해 세상 그 어떤 어려움 속에도
주 은혜로 나를 돌보시며 세상 끝날까지 지켜주시네
주 사랑이 나를 이끄시네 내가 갈 수 없는 그 곳으로
주의 사랑 나를 붙드시며 세상 끝날까지 인도하시네
주님만이 내 아픔 아시며 주님만이 내 맘 어루만지네
어느 누구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네
주님만이 내 능력이시며 주님만이 나의 구원이시네
어느 누구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네
(본문) 예수님께서 대부분 갈릴리에 살고 있는 그들 12명을 부르셔서 3년간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살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께서 무엇을 목표로 살고 있는지, 예수님께서 어떤 삶을 사시는지, 어떤 것을 가르치는지 배웠죠.
그리고 이제 그날 저녁에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떡과 잔을 나누는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본문의 말씀을 주신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본문 1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원성)예수님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든 12제자에게 참된 제자로 살라는 당부를 하시면서 ‘참포도나무’임을 밝혔습니다.
사실 포도나무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5장 1-2절에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가나안 땅에 포도나무처럼 심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포도나무 열매가 극상품 열매를 낼 줄 알았는데 아주 작고 빈약해 보이는 들포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향기롭고 맛있는 포도열매가 아니라 쓸모없고 가치 없는 포도나무로 전락해버렸다는 뜻이죠.
바로 그 시대의 포도나무를 생각하며,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이 ‘참포도나무’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애굽에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자녀로 삼아 가나안 땅에 살게 하셨다면 주님의 참된 자녀로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뜻이죠.
바로 그것처럼 주님의 제자로 부름받은 12명의 제자들도 그렇게 주님의 자녀답게, 주님의 제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해)그런데 왜 주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다”하고 밝힌 것이겠습니까?
여기에 ‘참’으로 번역된 헬라어 ‘알레테스’(ἀληθής)는 ‘진정한’(true), ‘진실로’(truthful)하는 뜻입니다.
왜 예수님은 ‘참’이란 말, 곧 ‘진실’이란 말을 사용하셨겠습니까?
그 당시에 ‘예수아’, 곧 ‘구원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는 그 당시에 로마를 뒤엎고 유대 민족의 해방을 가져올 인물로 스스로 구원자라고 자칭한 인물들이 셀 수 없이 많았던 것이죠.
지금 우리나라도 내년 대선을 바라바고 스스로 대통령이 될 적임자라고, 나라의 경제를 책임질 자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은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참 구원자, 참 포도나무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그들 12명의 제자들도 주님을 닮아 참된 제자로 살아가라는 뜻을 강조하기 위함이셨죠.
(적용)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죠.
그토록 참 포도나무이신 주님의 당부를 들었어도 12명의 제자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다들 도망간 것 말이죠.
이것이 인간의 실상이요, 이것이 곧 나 자신의 연약함임을 알려주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 제자들이 어떻게 참된 제자로, 참 포도나무이신 주님의 가지에 붙어 있는 자로 살 수 있었습니까?
주님을 배반한 그들이라도 주님께서 다시금 찾아오셔서 그들을 품어주시고 안아주시는 긍휼 때문이었죠.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바로 그 ‘은혜’입니다.
귀신을 섬기는 무당도, 불교도, 힌두교도, 선을 쌓는 사람은 좋아하고 악한 사람은 벌주고 배척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악한 사람들조차도, 주님을 배반한 제자들조차도 품으시고 사랑하시는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그토록 선한 히스기야 왕도 사랑하셨지만, 악의 종합선물세트요 탈무드에서 이사야를 톱으로 죽였다던 므낫세를 구원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발췌)유기성 목사님의 〈예수와 하나가 되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필립 얀시란 기독교 복음주의 작가가 특별 강연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창녀였다가 새 삶을 살기로 결단한 40개국에서 모인 100여 명의 여인들이 요청한 바였습니다.
자신들도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는지, 그 ‘은혜’에 대해 말씀을 전해달라는 요청이었죠.
얀시는 그들의 요청을 거저할 수가 없다고 여겨, 주최 측에 그런 요청을 먼저 했습니다.
“은혜에 대해 말하고 싶지만 먼저 그들의 말을 듣게 해 주세요.”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며칠간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이 얼마나 조롱과 학대를 받으며 살았는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필립 얀시가 그때 그분들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당신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21:31)
필립 얀시가 그들에게 주님의 그 말씀을 전하자, 그 자리에 참석한 그 분들이 깜짝 놀라더랍니다.
그때 필립 얀시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하필 여러분이 가장 먼저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누구도 그 즉석에서 대답을 못했고, 침묵과 함께 시간이 지날 무렵, 불가리아에서 온 창녀가 더듬더듬 말하는 것이었죠.
“모든 사람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기쁨으로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내려다볼 사람들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밑바닥에 있으니까요! 가족도 친척도 친구들도 다들 나를 창피해합니다.”
“사람이 가장 밑바닥에 떨어졌을 때 진정으로 은혜를 갈망하게 되지 않을까요?”
필립 얀시는 그때 가장 정확한 은혜에 대해 정의해줬다고 그녀에게 말해줬습니다.
가장 밑바닥에 있다고 느끼는 자가 은혜를 갈망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들에게 긍휼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 말입니다.
(깨달음)제자들이 믿음이 좋고 능력이 있어서 참 제자로 삼아주신 주님이 아니죠.
그들이 주님을 배반한 채 숨어 있었고, 두려워하고 있었고,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주님께서 찾아와 긍휼의 은혜로 품어주신 것이었습니다.
(발췌2) 문준경 전도사님이 전도해 세운 임자진리교회 이판일 장로님이 있습니다.
6.25 때 예배드렸다는 이유로 공산당 무리들이 어린아이들을 포함해 48명의 성도들을 생매장했습니다.
그날, 문준경 전도사님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은 후 장로가 된 이판일 장로의 가족 13명이 다 순교했습니다.
오직 그날 목포로 갔다가 현장에 없던 아들 이인재가 유일한 생존자였죠.
후에 국군 정벌부대가 가족들을 몰살시킨 원수들을 붙잡아 놓고 이인재에게 총을 주며 마음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는 그들을 쏴 죽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원수를 사랑으로 갚으라”하는 주님의 음성과 돌아가신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나 괴로워 몸부림치다가 결국 그 음성에 순종해서 원수들을 다 용서했다고 하죠.
그로 인해 6.25전쟁으로 마을에 불어닥친 무서운 보복 학살이 멈춰섰다고 합니다.
그 이후 그들은 모두 주님의 자녀가 되었고, 마을은 완전히 복음화가 되었죠.
이인재는 나중에 목회자가 되었고, 고향 진리교회에 와서 목회하다 은퇴를 했습니다.
(깨달음) 그런 이인재 목사님이야말로 정말로 주님의 참된 제자라 칭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분이 그런 결단을 하게 된 것, 원수를 사랑하게 된 것, 그것이 그의 결심이나 그의 믿음으로 한 일입니까?
그 자신은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음성이 결국 그의 마음을 붙잡아 세운 것이었죠.
(발췌3) 이제 문준경 전도사님이 공산당에게 붙잡혀 목포로 끌려왔습니다.
그때 문준경 전도사은 치안유지법위반으로 광주지방법원 검사국 조선총독부 검사 요다 카츠키에게 심문을 받았죠.
그러다 국군이 목포를 점령하자,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다시 증도로 돌아가려고 했죠.
그때 이성봉 목사님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전도사님, 지금 증도로 들어가면 죽어요. 조금 더 있다가 들어가세요.”
증도는 그때까지도 공산군이 장악하고 있던 터였기에, 이성봉 목사님이 말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준경 전도사님은 “전 죽어도 좋아요. 제가 안 가면 교인들이 다 죽어요.”하면서 다시 증도로 들어갔고, 끝내 순교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함께 목포로 잡혀 왔던 양도천이라는 신학생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에게도 들어가지 말라고 말했을 때, 그는 “나는 안 가겠소.”하면서 자기 살길을 찾아갔다고 하죠.
나중에 양도천은 세계일가공회라는 이단의 교주가 되었다고 합니다.
(깨달음) 순교의 영광과 이단의 교주가 한순간에 갈리는 것 아닙니까?
고난이 밀려올 때 고난당하는 것, 죽어야 할 때 죽는 게 확실히 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언제나 우리 자신의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주님께서 고난을 맞이할 힘을 주시는가, 바로 그것이죠.
주님은 우리에게 큰 믿음이 있느냐, 큰 능력이 있느냐, 그걸 바라보시고 원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고난 중에서도, ‘네가 나를 바라보고 있느냐’하는 것, 바로 그것을 눈여겨보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내음성)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주님께서 저를 구원해 주신 것이 제가 믿음이 뛰어나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갈릴리 어부출신들이 남들보다 능력이 있고 믿음이 뛰어나서 제자로 부르신 게 아니었네요.”
“그들이나 우리나 연약하기는 다 마찬가지였어요.”
“그들도 주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으실 때 다들 배반하고 도망쳤어요.”
“그런 그들이 주님의 참 제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그들을 찾아가 품어주시고 격려해주셨기 때문이에요”
“기독교가 위대한 것이 바로 그 주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시니 감사해요.”
“필립 얀시를 만난 그 창녀들이 주님의 은혜를 더욱 크게 받았던 게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을 바라봤기 때문이에요”
“문준경 전도사님이나 이인재 목사님이 위대한 결단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주님의 은혜를 갈망했기 때문이에요.”
“주님, 저도 더욱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살게 해 주세요.”
“그때마다 넘어지기 쉽고, 교만하기 쉽고, 내 자아를 드러내기 쉬운 저를 늘 새롭게 해 주셔셔, 주님의 참된 포도나무가지로 붙어 있게 해 주세요.”
(찬양) 은혜 아니면 살아갈수가 없네 호흡마저도 다 주의 것이니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은혜 아니면 살아갈수가 없네 호흡마저도 다 주의 것이니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크신 계획 다 볼수도 없고 작은 고난에 지쳐도
주께 묶인 나의 모든 삶 버티고 견디게 하시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나의 모든 것 다 주께 맡기니
참된 평안과 위로 내게 주신 주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포도나무든지 사과나무든지 그 땅에 새롭게 심었다고 해서 저절로 극상품 열매를 맺는 법은 없습니다.
애굽 땅에서 건져 낸 이스라엘 백성들도 3개월이나 지나서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언약식을 맺었습니다.
그 뒤로도 광야 38년간 불평과 원망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빚어졌죠.
오늘 우리 자신들도 내가 능력이 있고 열심히 있고 믿음이 좋아서 주님의 자녀요 주님의 제자가 되었겠습니까?
12명의 갈릴리 제자들이 그들의 믿음과 능력과 열심히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었습니까?
오직 주님께서 그들을 찾아와 격려해주시고, 성령님을 통해 끊임없이 감싸주신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무당 엄마였던 김종오의 엄마와 김종오가 주님의 자녀가 되고 목회자가 된 것도 주님께서 불러주신 은혜였지 않습니까?
필립 얀시의 설교를 듣던 100여명의 창녀들도 주님의 은혜로 새롭게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문준경 전도사님도, 이인재 목사님도, 위대한 결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였죠.
오늘 그와 같은 은혜 속에서 참포도나무이신 주님의 가지로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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