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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SundaySermon

나를 따라오라(마4:18-22)_2025년 2월 2일 주일설교문

by 똑똑이채널 2025.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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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 중에 우찌무라 간조 선생이 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의 제자가 김교신 선생이고 김교신 선생의 제자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매달을 딴 손기정 선수입니다.

참된 스승 밑에 참된 제자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찌무라 간조 선생이 어느 날 한 부자로부터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부자는 저녁을 성대히 잘 차려 놓고 극진히 선생을 대접했죠.

이제 선생이 식사를 잘 마치고 집을 나서면서 부자에게 인사 치레를 했습니다.

“잘 먹었다, 이 돼지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부자는 심한 모멸감에 얼굴이 흙빛이 되고 말았습니다.

집에 들어온 부자는 너무 분해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그토록 존경받는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

“기껏 식사를 대접 했더니 그런 식으로밖에 인사를 못해?”

“돼먹지 못한 인간 같으니라고!”

 

그렇게 씩씩대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동안을 뒤척거리다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마음 한구석에서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존경받는 인물이지.”

“말을 함부로 할 사람이 아닌데 어째서 내게 그런 몰지각한 말을 했을까?”

“그분의 성품으로 보아 절대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닌데!”

“뭔가 깊은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부자는 자신의 삶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내 삶이 그분이 말한 돼지와 다를 바가 뭔가?”

“나 혼자 이렇게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어버리면 이게 돼지지. 별 게 돼지겠는가!”

다음날 부자는 아침 일찍 일어나 우찌무라 간조 선생을 찾아가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합니다.

 

(깨달음)하나님께서 한 인간을 부르셔서 구원하시는 방법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부자의 자아를 깨트리기 위해 우찌무라 간조 선생의 입술을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가진 게 많거나, 남들보다 똑똑하거나, 능력이 출중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방법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한 사람의 자아와 스스로의 힘을 꺾으셔서 부르시는 구원자인 줄 믿습니다.

 

(예화2)성프란시스에게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생애에는 놀라운 기적이 나타납니다.”

“선생님을 보면 성자 같은 인격을 느낄 수 있는데 그 비밀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프란시스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간단한 거야.”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를 내려다보시고 사람을 찾고 계셨어.”

“가장 추한 사람이 누군지, 가장 불결한 사람이 누군지, 고통 가운데 고민하는 사람이 누군지, 가장 병든 인생이 누군지 찾고 계셨어.”

“그 하나님의 눈길이 나에게 머물렀지.”

“그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고 난 후에 ‘저 사람이야. 저 사람을 붙들어 내가 한 사람의 생애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 줘야겠어’하고 나를 선택하신 거야.”

 

(깨달음)그렇죠.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이 땅에서 뛰어나고 아름답고 잘못이 없고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지렁이 같은 야곱, 사기꾼 같은 야곱, 고집스런 야곱과 같은 사람을 찾아 부르셔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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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일생과 편지 | 권 성 권 - 교보문고

바울의 일생과 편지 | 바울은 누가 뭐래도 복음 전도자였다. 그가 복음 전도자로 활동한 것은 그의 곁에 위대한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나바, 디도, 실라, 디모데, 누가, 루디아, 야손, 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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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나라가 아니라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희락과 평강이라고 했죠(롬14:17).

그만큼 모든 사람들이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사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공생애 사역을 시작할 때 맨 처음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해 제자 삼는 일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부활승천직전에도 알 수 있죠.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19-20)

 

그처럼 주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제자를 불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설령 당신이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앉아 있을지라도 제자승계를 통해 후대에도 계속 하나님의 나라가 구현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아버지 하던 일을 아들이 이어받고 또 손자가 이어받아 가업을 세워가길 바라는 것처럼 말이죠.

 

물론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방식과 세상 사람들이 조직을 세우는 방식은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조직을 만들 때 회장을 세우고 부회장을 세우고 협회장이나 대표를 세웁니다.

그리고 사무실을 내고 간판을 달고 명함을 돌리며 조직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조직이나 건물보다도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조직이 있어도 사람이 준비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워 서로가 동역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세워가길 바란 것이었습니다.

 

(적용)교회에서 권사로 안수집사로 집사를 세우는 이유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직분자를 세워서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구현되고 성취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그렇다고 어중이 떠중이나 새신자를 안수집사나 권사나 집사로 세우지는 않습니다.

교회 공동체에 다년간 몸담고 있고 교회기둥처럼 헌신하고 세상에서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자들을 동역자로 세우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3년간 동고동락하면서 제자도의 삶을 보여주신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를 고치고 치유하셨지만 제자들을 따로 불러 가르치신 이유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제자를 부르시는 그 장면 속에 구원의 부르심이 있다는 걸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4: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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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권성권 - 교보문고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욥이 재산 잃고 자식들 다 죽고 심지어 그의 몸에 악창이 들끓을 때 그의 세 친구가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욥이 고난 당하는 것은 ‘인과응보’ 때문이라고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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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 고기를 잡고 있던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를 부르신 장면입니다.

물론 이 장면만 보면 예수님께서 처음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를 부르시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요1:40-42)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외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이었죠.

그는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고 또 예수님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외치며 많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며 살도록 선포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였고 광야에서 낙타 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청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까닭에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와 세례를 받았고 그가 외치는 회개의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선포하고 외친 회개의 삶은 도덕적으로 뉘우치는 회심일 뿐 근본적인 생명의 변화를 일으킨 회개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당대에 누가 봐도 세례 요한은 율법과 도덕에 비춰봤을 때 참된 랍비 참된 선생이었습니다.

그러니 너도나도 그를 따르는 제자가 많았고 그 중에는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도 그 중 한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스승인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는 걸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하고 외쳤죠.

더욱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하는 것을 봤습니다(요1:32).

그 까닭에 세례 요한은 바로 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오 이 땅에 메시아임을 제자들 앞에서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세례 요한의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안드레가 자기 형제 베드로에게 달려가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형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어요. 형님도 한 번 보시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안드레는 자기 형 베드로는 예수님께 데리고 갔던 것이죠.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그렇게 말씀하셨죠.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는 게바라 할 것이다.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다”

‘시몬’(שִׁמְעוֹן)이란 히브리식 이름의 뜻은 ‘듣는다’(heard)는 의미로 실은 ‘귀가 얇은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쪽 저쪽에 쉽게 휩쓸리는 성격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죠.

그런 시몬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장차 게바라고 부를 것이다 했는데 ‘게바’(Κηφᾶς)란 ‘반석’(stone)을 말하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지만 결코 무너지지 아는 까닭은 주춧돌을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그처럼 ‘게바’ 곧 ‘페트로스’(Πέτρος) 곧 베드로는 반석처럼 이리 저리 흔들리 않고 심지가 견고한 자를 칭하는 말입니다.

 

그때 처음 예수님을 만나 베드로는 사뭇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자신의 성경이 울그락불그락 하고 귀가 얇아 이리저리 휩쓸리는 우유부단한 성격임을 어떻게 저분이 알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 한마디 말에 베드로가 당장 예수님을 스승으로 따라다닐만한 결단력이 생긴 건 아니었습니다.

그 후에 다시금 갈릴리 어부로 고기잡이에 나선 베드로였죠.

 

누가복음(눅5:1-11)을 보면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는 여느때처럼 그물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그날은 한 마디도 잡지 못했죠.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눅5:4)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그 말씀에 토를 달지 않고 곧바로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던졌습니다.

이전에 자신을 만났을 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저 분이 나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뭔가 남다른 분이라는 걸 알기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물을 던진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엄청난 고기를 잡았고 한 배에 실을 수 없어서 인근에 있는 배를 불러 함께 고기를 잡아 올렸습니다.

그 옆에 있던 동업자들, 곧 베드로가 요청해서 함께 배에 실었던 사람들은 바로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눅5:10)이었죠.

 

그때 베드로가 어떻게 합니까?

베드로는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주님의 그 말씀에 순종했을 때 엄청난 고기를 잡게 되자 그 즉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죠.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시옵소서.”(눅5:8)하면서 말이죠.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지난번에 제게 찾아와 저의 성격과 속까지 환히 꿰뚫어 보셨습니다.”

“제가 귀가 얇아 이러 저리 쉽게 흔들리는 성격이라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가 평생 살아온 고기잡이의 이력까지 뛰어넘는 분임을 이제야 알아보게 됐습니다.”

“그 전에도 제 동생 안드레는 주님을 스승으로 모시자고 말했었죠.”

“형, 저분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세례 요한 스승이 말했어요.”

“형. 저 분이 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한 분으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라고 했단 말예요.”

“형. 이전에는 세례 요한을 스승으로 모셨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싶은데 형도 같이 모시게요.”

“제 동생 안드레가 그때 그렇게 말했지만 어찌 한 번 보고 그럴 수 있겠냐고 핀잔을 줬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 성격뿐만 아니라 제 생업에 관해서도 완전히 상식을 뛰어넘는 이 세상의 초월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 주님 앞에 죄인인 제가 어떻게 감히 스승으로 모실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저를 떠나시는 게 좋겠습니다.”

 

바로 그 고백 앞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무슨 뜻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네가 무서워할 것은 없다.’

‘이제 너도 나와 함께 사람을 취하는 하나님나라의 동역자가 되었으면 좋겠구나.’하고 말씀한 것이었죠.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 19절 말씀 그대로입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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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 권성권 - 교보문고

야긴과 보아스 |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 이 책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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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해)여기에 ‘따라오라’는 헬라어 ‘듀테’(δεῦτε)는 ‘여기로 와봐’(come here)하는 ‘듀로’(δεῦρο)의 복수형 부사입니다.

이 단어가 구약성경에서는 ‘야라크’(יָלַךְ, 창11:31, 창12:5)로 쓰였습니다.

그 단어를 파자하면 목자가 지팡이로 양을 이끄는 형국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로 이끄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그렇게 고백한 것 아닙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23:1-4)

 

사울의 칼날을 피해 10년간 광야를 전전긍긍하며 도망쳐 다닐지라도 그 모든 길목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 목자가 되셔서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미리 아시고 친히 인도하신다는 것 말입니다.

 

그처럼 예수님께서도 목자가 되어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에게 “나를 따라오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만이 참된 안식(마11:28)과 영생(마25:34)을 얻는 길임을 일깨워주기 준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는 곧장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주님이 하늘과 땅과 바다의 초월자로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참된 목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것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를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 땅에 왔습니다.

아버지 데라의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지만 하란 땅이 번화가였고 왠지 모를 꿈을 이루기에 충분한 곳처럼 보였죠.

그래서 그 땅에 눌러 앉아 살았는데 그만 그곳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에겐 절망과 낭패만 남은 것 아니었겠습니까?

평생 우상을 만들어 팔던 갈대아 우르에서 살 때도 자식 하나 낳지 못했지만 하란 땅으로 오면 뭔가 다를 가 싶었던 아브라함이었죠.

하지만 그곳에서는 평생 기대고 살았던 아버지마저 죽어버렸으니 더이상 기댈만한 것들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말씀하셨죠.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12:1-5)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야라크’(יָלַךְ)요 본문의 ‘듀테’(δεῦτε)와 같은 단어입니다.

평생 기대고 의지하던 아버지가 죽고 자식 하나 낳지 못한 실패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임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따라나선 것입니다.

자기 힘과 능력으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 밖의 구원자가 부르실 때 순종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의 근원이 된 시점이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

 

(적용)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코자 부르실 때 우리가 힘이 있거나 능력이 있거나 왠지 잘 나갈 때 부르시지는 않습니다.

그토록 고집이 쎄고 그토록 완고하고 그토록 능력이 있을 때는 쉽게 부르지 않습니다.

왠지 모를 절망과 좌절과 한계를 느끼고 있을 때 그때 주님께서는 내 삶의 자리에 찾아와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우찌무라 간조 선생의 입술을 통해 돼지처럼 살아왔던 그 부자를 부르시듯이 말입니다.

성프란시스를 부르시듯이 나의 교만한 자아와 능력과 힘을 꺾으셔서 부르시는 분입니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처럼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그 찬송가의 노래처럼 말입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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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권성권 - 교보문고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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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나의 자아와 고집과 능력을 깨트려서 우리를 순전한 하나님의 양으로 부르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하나님께서는 돼지처럼 자기 배만 위해 살던 일본의 그 부자를 부르시고자 우찌무라 간쪼의 입술을 사용하신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은 성프란시스 같은 사람도 부르시고자 자기 자아와 교만과 자기 능력을 깨트려서 순전하게 부르시는 분 아니겠느냐?”

주님께서는 갈릴리 어부로 잔뼈가 굵은 베드로를 부르시고자 그의 힘과 능력의 한계를 깨닫게 하신 후에 부르신 것 아니겠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할 때도 실패와 좌절 속에 있을 때였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주님께서 너를 불러 구원하신 그 부르심의 은혜가 언제였는지 돌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처럼, 아브라함처럼, 네가 실패와 절망의 자리에 있을 때 주님께서 너를 부르시지 않았느냐?”

때로는 네가 아주 잘 나가고 네 능력이 출중할 때, 그때도 주님은 너의 자아와 힘을 빼내게 하셔서 너를 부르시지 않았더냐?”

인간은 그 누구도 자기 힘과 능력으로는 벗어날 길이 없을 때 초월자인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지 않겠느냐?”

네가 그와 같은 주님의 부르심이 있다면 너는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이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지금도 그런 방식으로 구원받을 자들을 부르고 계시고 그 은총을 너를 통해 이루시길 원하지 않겠느냐?”

 

(찬양)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주셨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내가 어딜 가든지 날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예화)리차드 범브란트 목사가 지은 〈성 크리소스톰〉 전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크리소스톰은 주교로 있을 때 자신이 관장하는 교구 가운데 외딴곳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은 워낙 외진 데다가 오랫동안 사제가 없어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 사는 믿음 좋은 한 농부를 불러 최선을 다해 교육했습니다.

그 후에 그 농부를 그곳의 사제로 세우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에 돌아온 크리소스톰의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내가 자격도 없는 사람을 사제로 앉힌 게 아닌가?”

그래서 다시 그곳에 가서 몰래 예배 시간에 참석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는 성당 기둥 뒤에 숨어 그 농부 사제가 어떻게 자기 책임을 다하는가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 사제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습니다.

여태껏 그 농부 사제처럼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사제를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 부르심의 감격을 잊은 채 살아온 걸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그 짧은 설교를 하는 농부 사제의 얼굴은 빛이 났고 그 한 마디 한 마디는 신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크리스소톰은 제단 앞으로 나아가 농부 사제에게 축복해 달라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농부 사제는 무릎 꿇고 있는 사람이 바로 주교인 것을 알자 깜짝 놀랐습니다.

“주교님께서 저를 축복해 주셔야 할 텐데, 어찌 저에게 축복해 달라고 하십니까?”

주교가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나를 축복해 주시오. 나는 당신처럼 그토록 뜨거운 불과 사랑을 가슴에 안고 예배드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소.”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부르심의 감격을 놓치고 사는 건 아닙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것은 당연한 게 아니라 은혜인데도 당연한 것처럼 살아온 것 말입니다.

혹여라도 부르심의 감격을 놓친 채 당연하게 여기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면 그 농부사제처럼 감격의 은혜를 회복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할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죄인인 저를 불러주신 그 부르심이 당연한 게 아니라 은혜였네요.”

크리소스톰이 그 외진 곳의 농부를 제자로 삼아 예배 인도자로 삼았는데 그를 보고 오히려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네요.”

그 농부 사제의 기도를 통해 자신의 메마른 영성과 당연시하는 구원의 감격을 놓치고 있던 까닭이었어요.”

주님. 주님께서 저를 불러주시던 그때 그 감격을 다시 회복케 하시고, 주님의 은혜 아래 겸손하게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찬양)너는 부유해도 가난해도 너를 사랑하여 구원했으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너는 잘났으나 못났으나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너는 강하여도 약하여도 너의 힘이 되어 일으키리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너는 의로워도 약하여도 너를 나의 피로 구원했으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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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일생과 편지 | 권 성 권 - 교보문고

바울의 일생과 편지 | 바울은 누가 뭐래도 복음 전도자였다. 그가 복음 전도자로 활동한 것은 그의 곁에 위대한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나바, 디도, 실라, 디모데, 누가, 루디아, 야손, 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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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이땅에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저와 여러분들을 불러내서 구원해주신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주님은 아주 잘 나가던 완고한 나의 자아를 꺾어 부르셨고 실패와 좌절에 있을 때 부르셨습니다.

일본의 그 사람도, 성프란시스도, 베드로와 형제 안드레도,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를 불러 주신 하나님의 방식은 다양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주님의 부르심의 은혜였습니다.

혹여라도 주님의 부르심 가운데 있다면 기꺼이 따라 나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의 감격을 잃은 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면 주님의 은혜를 회복하여 다시금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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