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설교열기)(성화)가인이 왜 동생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동생 아벨이 드린 제사는 하나님 받으셨지만 자신이 드린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 때문이죠.
이른바 시기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쳐죽인 것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할 형제 지간에 시기심이 생기면 이런 비극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시기심은 누구에게나 파고들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도 얼마든지 파고들 수 있는 게 시기심입니다.
(예화)마귀가 리비아 사막을 건너가다가 어느 성자를 괴롭히는 자기 부하들을 만났습니다.
마귀의 부하들은 성자를 꾀어 죄를 짓게 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죠.
마귀들이 꾀이는 제안을 할 때마다 성자는 단호히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부하들이 실패를 거듭하자 이번에는 마귀 두목이 입을 열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하는 일을 보니 너무 서툴러, 내게 맡겨”
그리고 마귀 두목은 성자에게 다가가 성자의 귀에 속삭였습니다.
“신부님, 동생이 방금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가 된다는구 만요?”
그 말을 듣자 성자의 그 평화롭던 얼굴이 금방 험상궂은 시기의 표정으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마귀 두목이 부하들 앞에서 승리에 찬 어조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방법이 바로 이런 것이야”
(깨달음)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할 관계 속에 시기심이 밀려 들면 화평의 관계가 깨지고 마는 것입니다.
시기심이 지나치면 살인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시기심에 밀려오려고 할 때 우리는 그것마저 십자가에 죽이며 살아야만 화평의 관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적용)중요한 것은 시기하지 않는 것은 소극적인 사랑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데 보다 적극적인 사랑의 특성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래 참는 것이 그것입니다.
오래 참는데서부터 모든 사랑이 시작되고 완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다툼과 분열이 생긴 원인도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들에게도 오래 참는데서부터 화평의 관계가 세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레루야. 축복합니다.
(역배)고린도 전서 13장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문헌 중 가장 아름다운 찬가입니다.
그 어떤 대문호도 바울이 쓴 고린도 전서 13장에는 필적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 사랑의 필수성, 사랑의 특성, 사랑의 영원성을 간결하고도 완벽하게 표현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고린도전서 13장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교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사랑의 필수성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천사의 방언을 한다 할지라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꾕꽈리에 불과하다는 것 말이죠.
사랑이 없으면 단순한 공기의 진동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방 신전에서 악기를 두드리고 소리치는 소음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또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과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죠.
개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비행기를 타고 가고 배를 타고 가는 게 완전한 비밀이자 신비스러운 일이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피조물인 인간이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영적 비밀을 깨달아 안다고 해도 사랑이 없다면 nothing이라는 것이죠.
유달산을 향해 소리쳐서 유달산이 목포 앞바다에 빠지는 능력을 지녔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을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도 없다고 했습니다.
한 숟가락 한 숟가락 정성스럽게 타인의 입에 먹을 것을 넣어준다고 해도 사랑이 없는 것은 자기 공명심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일들이 자기를 위한 이기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사랑의 필수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하는 모든 행위에는 사랑이 필수적으로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nothing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사랑의 특성에 대해서 말해주는데 4-7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원해)바울은 본문을 통해 사랑의 두 갈래 특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정의입니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다’하는 말입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 자랑하지 않는다, 하는 게 그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특성이 있는데, 먼저 생각해 볼 게 소극적인 정의입니다.
소극적인 특성의 첫 번째는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기하다’는 헬라어 단어가 ‘젤로오’(ζηλόω)입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어그러지는 첫 단계가 ‘시기’하는 것입니다.
‘시기’란 그릇된 경쟁의식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시기하면 반드시 우월의식에 사로잡히거나 월등의식에 사로잡힙니다.
한 사람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이 사람에게는 우월의식이 생기고 저 사람에게는 열등의식이 생깁니다.
그래서 다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생깁니다.
‘시기하지 않으며’ 다음 단계는 ‘자랑하지 않으며’입니다.
‘자랑’은 헬라어로 ‘페르페류오마이’(περπερεύομαι)는 ‘과장하다’는 뜻입니다.
자랑은 과장하는 것이죠.
남으로부터 칭찬받기를 열망하는 것입니다.
그 과장으로 자기 우월감을 더 크게 드러내거나 아니면 열등감을 가려버립니다.
그렇기에 겸손과 반대되는 게 자랑입니다.
자랑이 들어가면 결코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 도구가 자랑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는 ‘교만하지 아니하며’인데 교만은 헬라어로 ‘프쉬오오’(φυσιόω)입니다.
풀무질을 한다는 뜻입니다.
마구 부풀리는 것이죠.
교만은 자기가 행하는 일을 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 자신을 부풀리게 되죠.
그렇게 부풀리는 사람이 사랑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죠.
교만의 자리에 있는 사람을 만나면 타인을 지배와 굴림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 다음이 ‘무례하지 아니하며’인데 ‘무례’란 헬라어로 ‘아스케모네오’(ἀσχημονέω)입니다.
상대에게 돌아가야 할 존경과 예의를 무시해 버리는 것이죠.
그만큼 이치에 합당치 않게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저 사람이 수고했는데 자기는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높은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하는 것은 저 사람이 잘 나서가 아니라 내가 코치해 줬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 명예와 존중의 몫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무례한 것입니다.
다음 단계는 무례해지면 ‘자기의 유익’을 구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다는 헬라어는 ‘헤아우토우’(ἑαυτοῦ)인데 ‘자기의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무례하면 반드시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유익만 집요하게 구하게 됩니다.
남의 기분이나 생각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오직 내 기분만 생각하는 것이죠.
내가 기분이 좋으면 상대가 기분 나쁜 것은 상관치 않고, 내가 기분이 나쁘면 상대가 기분 좋은 것을 뒤엎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성내지 아니하며’인데 ‘성내다’는 헬라어 ‘파록쥐노’(παροξύνω)입니다.
일상에서 내는 화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폭발하듯 발작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발작을 하는 것이죠.
여기에 ‘파록시노’는 ‘날카롭게 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화를 내는데 단순하게 내는 게 아니라 날카롭게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속이 시원치 않기 때문이죠.
그 다음이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다’는 말씀인데 ‘생각한다’는 말이 헬라어로 ‘로기조마이’(λογίζομαι)입니다.
‘계산하다’는 뜻으로 ‘심사숙고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죠.
악을 셈하듯이 생각하고 심사숙고하는 것을 뜻하죠.
악은 공동선을 헤치는 것인데 그것을 셈하는 게 빠른 것이죠.
왜냐하면 자신에게 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인데 ‘불의를 기뻐하다’는 헬라어 ‘카이로’(χαίρω)는 어쩔 줄 몰라하며 즐거워하는 걸 말합니다.
불의를 기뻐하면 기뻐할수록 내 사욕을 챙길 수 있습니다.
불의는 다른 게 아니라 모두를 생각지 않고 나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소극적인 사랑은 이제껏 설명한 걸 말합니다.
시기하고 교만하고 무례하고 자기 것만 구하고 발작을 하고 불의를 기뻐서 어찌할 줄 몰라는 것들 말이죠.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시기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시기하다’는 헬라어 단어 ‘젤로오’는 ‘열심’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어떤 일이든 열심을 내는 사람이 시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이 나의 열심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열심인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적용)바울도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바울이 지중해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열심을 냈는데 하나님의 열심에 자기 자신을 도구로 내어 놓은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열심을 다했지만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를 위해 열심을 내면 분명히 시기로 이어지고 그러는 사이 다음 단계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몸을 불사르게 내주고, 내가 모든 것으로 사람의 입에 떠넣어 줄 정도로 구제해도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원해2)이번에는 적극적 사랑의 정의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사랑은 ∼하는 것이다’ 하는 단어입니다.
첫 번째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오래 참다’는 헬라어 ‘마크로튀메오’(μακροθυμέω)입니다.
참는데 한 번 참는 게 아니고 또 잠시 참는 게 아니라 오래 참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저항할 수 없어서 체념하는 의미에서의 소극적인 인내에서부터 얼마든지 보복할 수 있음에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적극적인 인내까지 포함하는 걸 말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참는 데서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 가운데는 ‘내가 얼마나 참는 줄 알아’하고 말하지만 진짜 참는 사람은 참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온유하다’입니다.
헬라어로 ‘크레스튜마이’(χρηστεύομαι)인데 ‘친절’(kind)을 뜻하는 말입니다.
내가 속에서 올라오는 걸 참았다면 집에 가서 잠을 못자지만 다음날 어제처럼 인사한다면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죠.
내가 참다 보니까 속에서는 번민이 일어날 수 있지만 그 사람에게 여전히 친절을 대할 수 있는 법이죠.
세 번째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입니다.
‘기뻐한다’는 헬라어 ‘쉰카이로’(συγχαίρω)는 ‘더불어 기뻐하다’는 뜻입니다.
진리로 더불어 기뻐한다는 말은 진리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돈 때문도 명예때문도 직책 때문도 아니라 진리로 인해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 동거하는 게 싫지만 내게 명령하시는 주님의 진리 때문에 함께 하는 것이죠.
그래서 진리와 함께 하는 삶 자체가 사랑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가 ‘모든 것을 참는다’입니다.
우리말로 오래 참는다, 길게 참는다,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죠.
‘참는다’는 헬라어 ‘스테고’(στέγω)는 ‘덮어 준다’(to cover)는 뜻입니다.
그냥 적당히 덮어주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덮어주는 것입니다.
이 스테고라는 단어에서 ‘지붕’(a roof)을 뜻하는 ‘스테게’(στέγη)가 파생이 되었습니다.
지붕은 비를 막아주고 모든 걸 지켜줍니다.
그만큼 사랑은 상대의 허물이나 약점이나 추한 부분도 다 덮어주는 것이죠.
마치 노아의 세 아들 중에서 아버지가 하체를 드러낼 때 두 아들은 스테고 하며 덮어준 것처럼 말입니다.
다섯 번째는 ‘모든 것을 믿는다’입니다.
우리말 ‘믿는다’는 헬라어 ‘피스튀오’(πιστεύω)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는 걸 뜻하죠.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 데서 시작됩니다.
저 사람이 내가 보기에 미흡하고 여러 가지 껄끄럽지만 저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걸 믿는 것이죠.
그때 사랑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모든 것을 ‘바란다’입니다.
‘바란다’는 헬라어 ‘엘피조’( ἐλπίζω)는 ‘소망한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미흡하지만 이 사람의 미래가 바람직하게 될 것을 바라는 게 소망하는 것입니다.
부부지간이나 부모자식지간이나 친구지간에도 마찬가지죠.
일곱 번째가 모든 것을 ‘견딘다’입니다.
‘견딘다’는 헬라어 ‘휘포메노’(ὑπομένω)는 ‘모든 것을 수용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의 좋은 부분만 사랑하려고 하죠.
그래서 내 마음에 드는 것만 딱 떼어 사랑하려고 하고 아닌 것은 배척하려고 합니다.
손흥민을 사랑한다고 할 때 축구하는 모습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졸리는 듯한 눈까지도 사랑하는 걸 말합니다.
그만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있는 모든 것을 수용하는 걸 말합니다.
‘휘포메노’는 ‘-밑에’(under)를 뜻하는 ‘휘포’(ὑπό)와 ‘기다린다’(to wait for)라는 ‘메노’(μένω)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그 사람 밑에 거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입장에 서는 걸 뜻합니다.
그래서 영어로 이해하다가 understand인데 그 뜻은 그 사람의 아래에 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 서 보면 그 사람의 처지가 이해가 되는 법이죠.
그 사람에 대해 이해가 되면 내 마음에 드는 부분뿐만 아니라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것도 수용할 수가 있죠.
(깨달음)그래서 사랑은 온유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걸 참고 믿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실은 참는 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참지 않으면 나머지 모든 것들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단어는 ‘오래’(long)를 뜻하는 ‘마크로스’(μακρός)와 ‘화’를 뜻하는 ‘쉬모스’(θυμός)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더욱이 ‘쉬모스’의 원형은 ‘쉬오’(θύω)인데 희생제사(to sacrifice)를 뜻하는 말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뜻하는 것입니다.
누가 오래참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제물되었듯이 나도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는 사람만 오래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래 참는 것으로부터 나머지 적극적인 사랑도 가능한 것입니다.
(적용)바울이 소극적인 정의와 적극적인 정의로 사랑을 총 15개 단어로 정의했습니다.
다 잊어도 좋지만 두 개는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은 참는다’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의 삶이 되면 그 다음 단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한 단계씩 넘어갈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 스스로 때문에 교회 공동체나 가정 공동체가 허물어지면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로 인해서 더욱 튼튼한 공동체 건강한 공동체가 되는 게 중요하죠.
그를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에 힙입어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때에만 시기하지 않고, 오래 참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때에만 하나님의 뜻 안에서 교회 공동체든 가정 공동체든 국가 공동체든 건강하게 세워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시기로부터 시작되는 소극적인 사랑도 중요하지만 오래 참는 적극적인 사랑을 나누며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죽인 것은 시기심 때문에 비롯된 것 아니었더냐?”
“동생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셨고 자기 제사는 받지 않았다면 스스로를 살피고 부족함을 채워가면 되는데 동생에 대한 시시김에 살인을 불러온 것 아니더냐?”
“그 시기를 경계하지 않으면 자랑하고 교만하고 무례하고 자기 유익만 좇고 쉽게 화를 내고 악한 걸 생각하고 불의를 좇아 사리사욕만 챙기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기에 진정한 사랑의 시작은 오래 참는데서부터 시작되는 법 아니겠느냐?”
“마귀 대장이 그 신부의 동생이 주교가 됐다는 이야기로 시기심을 불러일으켰을 때 그 스스로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생각한다면 겨코 시기심이 일어나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적극적인 사랑의 시작점이 오래 참든데서부터 시작되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죽일 때에만 가능한 법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런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뭐든 오래 참게 되면 친절하게 되고 진리를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소망하며 수용하며 살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바울도 지중해 세계를 누빌 때 자기를 위한 열심히 아니라 주님을 위한 열심이었기 때문에 결코 시기하지 않고 오래 참으며 복음의 도구로 쓰임받은 것 아니었더냐?”
“부부지간에도 부모지간에도 형제지간에도 성도 사이에도 날마다 십자가에 자신을 죽여야 사랑을 완성해갈 수 있는 법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찬양)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도 교만도 아니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네
사랑은 모든 것 감싸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며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없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 끝까지 영원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기에도 짧은 이 세상의 삶이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제물되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상대방을 사랑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길은 시기하지 않는데서부터 시작이 되고 그것은 뭐든 오래 참는데서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래참는 것도 나 스스로는 불가능한 것이요 ‘나는 십자가 앞에 죽은 사람입니다’할 때에만 가능한 줄 믿습니다.
오래참을 때 나머지 적극적이 사랑도 또 소극적인 사랑도 완성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이 충만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수요설교WednesdaySermon > 고린도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언하기를 원하노라(고전14:1-5) (0) | 2024.12.11 |
---|---|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8-13) (1) | 2024.12.04 |
사랑이 없으면2(고전13:2-3) (0) | 2024.11.20 |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고전13:1) (0) | 2024.11.13 |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12:28-31) (2) | 2024.11.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