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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나예)엊그제 전남서지방회교역자회 주관으로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이 강천산을 올라갔습니다.
오전 8시 30분에 모여서 대형 버스와 봉고차 2대로 함께 동행한 길목이었죠.
아직 가을 단풍이 들지 않았지만 그 산이 좋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도 그 산을 오르기에 힘이 들지 않는 이유입니다.
평평한 길목이고 또 모래를 깔아 놓은 곳이라 신발을 벗고 많이들 올라가는 코스였죠.
물론 구름다리도 있고 산 꼭대기도 있지만 대부분 평범한 코스라 산행을 하기에 참 좋은 길목이었습니다.
중간에 어떤 목사님은 다리가 아프다면서, 또 다른 목사님은 허리 수술을 했다면서, 내려오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목사님과 사모님은 구름다리를 건너가려고 하다가 다리가 출렁거려서 그만 돌아간 분도 있었습니다.
(깨달음)12시 10분까지 산 입구까지 내려오도록 했는데 몇 몇 일행은 조금 늦은 분들도 있었습니다.
뭐든 시작점이 있는가 하면 끝 지점도 있고 그리고 다시금 돌아오는 지점도 있지 않습니까?
인생도 다 같이 갓난 아이에서 출발하지만 중간 지점도 고지도 그리고 늙어 하산하는 때도 다 다르듯 말이죠.
중요한 것은 늦게 내려오는 분들까지도 다 기다렸다가 함께 식사를 했다는 점입니다.
일찍 내려오는 분들은 조금 더 기다렸고 제 때에 내려온 분들은 얼마 기다리지 않고 곧장 식사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었죠.
(적용)무엇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까?
교회 공동체는 그 어떤 공동체든 사랑이 있을 때 함께 자라간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앞에서 끌어주는 사랑이 필요하고 누군가는 뒤에서 밀어주는 사랑이 필요한 법이죠.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가릴 것 없이 서로 서로 사랑하며 손을 잡아 줄 때 그 산행이 아름답고 즐거운 법이죠.
혹여라도 자기 잘난 맛에 일찍 올라갔다가 일찍 내려와 버린다면 그래서 기다릴 줄 모른다면 그 공동체에 해로움을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누군가는 일찍 올라갈 수 있고 또 누군가는 아파서 늦게 올라갈 수 있지만 서로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준다면 그 공동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선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부터 성령의 은사에 대한 목회적 답변을 제시해주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영적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가 더욱 크다고 경쟁하고 으시댔습니다.
특히 방언에 관해서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경쟁하듯이 이야기를 했죠.
사로 방언을 통해 큰 자임을 과시하기 위해서 마치 이방인들이 우상 신전에서 술먹고 춤추며 괴성을 발하는 듯한 그 모습을 교회 안에서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신령한 것에 대해 반드시 알기를 바랐고 방언이 성령께서 선물로 주신 것임을 아는 신령한 사람은 함부로 자랑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자신이 자랑하고 싶거나 내키는 말만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말을 하는 자이기 때문이죠.
그와 같은 방언에 관한 분쟁이 얼마나 컸던지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전체를 방언에 관해 다루기도 햐죠.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성령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여러 가지’인데 헬라어 ‘디아이레시스’(διαίρεσις)는 은사의 다양성(diversty)을 말하는 게 아니었죠.
성령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열매와 같은 은사의 다양성(distribution)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님을 한 뿌리로 그 뿌리로부터 여려 열매가 맺히기 때문에 그 은사를 성령님께서 분할해 주신 격입니다.
그만큼 성령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사는 인간의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성령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든 각 사람에게 유익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 유익은 개인적인 유익만을 염두에 둔 게 아니라 교히 공동체의 유익을 위함이라고 했죠.
그만큼 개인이 받은 은사를 교회 공동체의 질서와 평강과 상대방의 덕을 위해 사용하고 헌신하길 원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진정으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라면 타인에게 유익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님은 성령을 선물로 주실 때 가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나눠주신다고 했습니다.
100명이면 100명 또 200명이면 200명 다 모아 놓고 단체로 한꺼번에 은사를 주시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씩 인격적으로 대하시고 그 신앙 경륜과 자질을 보시고 그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은사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결코 나의 자랑거리가 될 수 없고 남의 은사를 경시할 수도 없는 것이죠.
그런 다양성은 실은 우리 몸과 같은 격이죠.
우리 몸에 각 지체가 있고 그 지체는 저마다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머리와 손과 발과 가슴과 또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속에 내장들이 있죠.
그렇다고 어떤 기관이 낫다고 자랑할 수가 없는 것이죠.
눈도 소중하지만 귀가 없다면 손과 발이 없다면 그 눈을 제대로 활용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만큼 우리 개개인은 다 다르고 은사도 다르지만 모두가 한 몸 곧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돼 있어서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죠.
(깨달음)일례로 눈이나 비가 온 뒤에 자동차 창문이 더럽게 됩니다.
그런데 와이퍼 물구멍은 0.1m도 안 된다고 하죠.
하지만 그것 없이는 자동차를 운전하고 나갈 수가 없는 것이죠.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구멍 하나가 실은 온 몸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과 같은 격입니다.
그처럼 우리 가운데 불필요한 지체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이기에 지체를 허락한 것이듯이 교회 안에 한 사람 한 살마도 모두가 필요한 존재로 한 몸을 이루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한 이유가 있죠.
방언의 은사만 최고로 여기는 자들을 향해 다른 은사를 받은 이들, 심지어 은사가 드러나지 않는 이들까지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필요한 존재로 여기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모두가 한 성령의 뿌리에서 나온 다양한 은사를 지닌 이들이요 모두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통일성을 이뤄나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오늘 본문 28-30절입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깨달음)바울은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몇 몇 지체를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를 세우기 위해 이런 이런 은사를 주셨다는 것이죠.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방언으로 인해 서로가 격돌하고 있는데 바울이 은사를 이야기하면서 방언을 맨 뒤로 빼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너희들이 방언을 모든 것으로 생각지만 은사에는 우열이 없다는 것이죠.
그 모든 은사는 오직 성령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니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도구로 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도도 선지자도 교사도 마찬가지라는 것깁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사도의 은사를 받아야되겠다고 한다면,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다 사도의 은사를 갖고자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두가 사도라면서 다 앞서고자 하고 누구도 뒤따르고자 하지 않는다면 고린도교회는 완전히 중구난방이 되고 말겠죠.
얼굴에 눈만 하나 붙어 있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되는 것이죠.
(본문2)바울은 그래서 31절을 통해 결론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원해)여기에 ‘더욱 큰’이란 헬라어로 ‘크레이톤’(κρείττων)이란 단어로 ‘더욱 탁월한’(more excellent)을 뜻한 말이죠.
물론 그렇게 말하면 뭔가 더욱 크고 더 좋은 은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여태껏 말한 사도 바울의 말에 모순이 생기는 것이죠.
사도든 선지자든 교사든 능력을 행하는 자든 병고치는 자든 서로 돕는 것이든 방언을 말하는 것이든 모두가 성령님의 뿌리에서 나온 다양한 선물이라는 것 말입니다.
(깨달음)그런데 더 탁월한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다면 지금껏 말한 것보다 더 강력한 은사가 따로 있지 않나 생각하는 것 말이죠.
하지만 이 말은 은사 자체에 더 크고 높은 구별이 있다는 게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는 데 더욱 탁월한 은사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더욱 열렬히 사모해야 할 것은 교회에는 별로 유익이 되지 않으면서도 외형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방언의 은사보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다른 은사라는 것입니다.
어떤 은사든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써야 하는데 그를 위한 길이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내가 보이리라.’하고 권면한 게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유익을 끼치는 데에 쓰는 그 길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 속에서만 모든 지체는 서로 같이 돌보는 지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계명을 주신도 사랑이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적용)그만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공동체에서는 서로 사랑하는 자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사랑하거나 부자가 가난한 자를 사랑하거나 건강한 자가 병약한 자를 사랑하는 것은 틀린 게 아닙니다.
그렇지만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또 병약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사랑만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틀린 것이죠.
교회 공동체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를 사랑한다면 가난한 자도 자기 곁에 있는 자를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랑의 은사 속에서만 모든 육체의 지체가 서로 사랑하며 돌보듯이 우리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문)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나가도록 각자 받은 은사를 통해 사랑으로 섬기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렇기에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강천산 등반을 할 때 모두가 사도요 선지자요 교사가 되어 앞장선다고 하면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누군가는 앞에서 리드하고 또 누군가는 뒤에서 밀어줄 때 선하고 아름다운 공동체의 산행이 되지 않겠느냐?”
“또 누군가는 일찍 정상을 찍고 내려올 수 있고 누군가는 중간에서 내려올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뒤늦게 내려올 수 있지만 사랑으로 기다려서 함께 점심을 먹는 게 아름다운 모습이지 않더냐?”
“지금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성령님으로부터 받은 은사의 다양성을 말하면서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행하도록 권면한 것도 그런 이유이지 않더냐?”
“사랑으로 섬기고 사랑으로 품고 사랑으로 기다려주는 게 없으면 어찌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갈 수 있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너도 성령님께서 주신 은사를 통해 사랑으로 섬기고 사랑으로 품고 사랑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겠느냐?”
“사도의 은사도 선지자의 은사도 교사의 은사도 능력을 행하고 예언을 하고 위로를 하고 방언을 하는 은사도 실은 공통분모인 사랑하도록 한 것 아니겠느냐?”
“설령 너에게 눈에 띄는 은사가 드러나지 않아도 묵묵히 연약한 자를 사랑으로 섬긴다면 그것이 최고의 은사이지 않겠느냐?”
“주님의 몸된 교회는 그렇게 사랑으로 섬기는 자들을 통해 한 단계 한 단계 세워질 수 있으니 말이다.”
“주님께서는 그런 너를 기쁘게 여기시고 너의 삶 가운데 친히 함께 하지 않겠느냐?”
(찬양)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모습은 실은 산을 오르고 내리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라는 목표를 향해 함께 발맞추어 올라갈 때 누군가는 이끌고 또 누군가는 뒤에서 밀어주며 올라가야 하죠.
힘이 좋으면 좋은데로 앞에서 이끌고 또 힘이 약하면 약한 대로 뒤에서 천천히 올라가는 것 말이죠.
누군가는 빨리갈 수 있고 또 누군가는 늦게 갈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중심에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야 기다려줄 수 있고 함께 식사도 하고 함께 내려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품고 사랑으로 격려하고 사랑으로 이해해줄 때 주님의 몸된 공동체는 아름답고 선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고린교회 성도들이 받은 다양한 은사를 상대방을 위한 사랑을 위해 사용할 때 그 은사가 더욱 아름답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도 성령님께서 받은 다양한 은사를 사랑을 토대로 섬길 때 주님께서 더욱 아름답고 선한 공동체로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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